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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05화 (105/109)
  • 105화

    내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네 청혼서를 기다렸다는 것까지.디에고는 이제 모르는 것이 없다.

    내가 내 입으로 다 실토해 버렸으니까.그래서 나는 내 모든 지식과 경험과 정성을 더해 쉼 없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 청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정말 아가씨, 하시게요?”

    “응.”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하기로 했다.디에고가 내 청혼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잘 해내서.

    결국 불안감을 이겨내고 나와의 결혼에 적극 동참할 수 있게!

    “각하 대공령 가기 전에 해야 해서 시간이 촉박해.”

    미간을 좁히고 계획의 진행 정도를 살폈다.준비할 게 많았다.

    시간이 좀 걸리는 일도 있었고 말이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몰래 하는 것에 제일 어려움이 컸다.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었다.청혼 실패라니.

    그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됐다.

    “하아, 결혼 한 번 하기 힘들다.”

    “그래도 어쩜 이런 생각을 다 하셨어요?”

    그러게 말이다.

    숙취에 허덕이면서도 고민하던 진심, 진심이 담겨서 그렇지 않았겠나!

    “준비를 돕는 제가 다 눈물이 찔끔했다니까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이는 마리를 보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좋아할까?”

    내가 저번에 디에고 생일 때 한번 해보니까, 좋아하기는 하던데.

    되새겨보니 피아노 연주를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보아 물질보다 정성을 더 쳐주는 것이 분명했다.

    “네! 당연히 기뻐하실 것 같은데요.”

    혹시 몰라 피아노도 준비 부탁해 뒀다.뭐라도 다 해볼 참으로.사실 처음 해보는 거라 좀 걱정이 더 컸는데, 마리 덕에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마지막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혹시 안 먹힐 것을 대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해 두고 싶었다.진심으로 준비하는 청혼과, 그것으로도 다 안 먹히면 돈으로 어떻게 물량 공세라도 해볼 참이었다.

    상대가 부유한 대공이라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후우―”

    개중에 하나는 네 마음을 움직이는 게 있겠지.

    【 맞닿은 손 】

    떨렸다.대망의 청혼하는 날.이날을 위해 그간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가! 장소는 공교롭게도 다시 한번 콘라드의 도움을 받았다.

    - 콘라드, 저기…….

    부탁이 있는데.

    -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 내가 각하께 청혼을 할까 하거든? 좀 도와줄 수 있을까?

    - …예? 처, 처, 청혼이요?그 뒤로 차근히 내 설명을 들은 콘라드가 한껏 감격에 취해 어찌나 나를 칭송하던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덧붙이더라.

    - 송구하오나 각하께서 하지 않으시겠습니까?모르는 소리.지금 결혼을 하네 마네 하는 애한데 청혼까지는 무리다.이것은 지금 디에고가 가진 상처에 대한 위로이자 내가 여태 힘들게 했던 일들에 대한 사과였다.더불어 꼭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 나의 의지 표명이자!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함께하고 싶다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내 사랑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 칭할 수 있었다.

    “후우―”

    그렇게 디에고와 한 저택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그는 대공저 집무실에서, 나는 그의 침실에서.이번에도 콘라드는 과감하게 나의 뜻대로 디에고의 침실을 열어주었고, 내가 준비를 하는 동안 혹시나 그가 제 침실을 방문하지 않게끔 감시자 역할을 자처했다.

    “…하아.”

    나는 침실을 빙 둘러보았다.

    좀 크기가 큰 물건들인데도 가지런히 나열된 것이 침실이 크긴 크구나.별 물건이 그다지 없어서 더 넓은 것도 있는 것 같고.얼추 준비는 끝나갔다.

    내 마음만 도통 준비가 안 될 뿐.달칵―

    “헉.”

    “접니다, 콘라드.”

    내가 너무 놀란 것이 미안했는지 그가 멋쩍게 웃었다.

    “이제 곧 오실 것 같습니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 게 오는구나.

    준비할 때만 해도 이거 성공이다, 확신에 찼었는데 막상 와보니 망한 것 같다.이유는 없었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

    “잘 해내실 겁니다.

    아주 근사하거든요.”

    콘라드가 온화하게 웃으며 내게 용기를 북돋아줬다.탁―이제 정말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할 차례였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도 좀처럼 가슴이 진정하지를 못한다.잠시 후, 드디어 문이 열리며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의 주인공이 들어섰다.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문 앞에 굳어 있는 디에고를 보자 긴장이 좀 가셨다.

    그래도 이번에는 문 닫고 다시 나가지는 않네.

    “…….”

    나와 제 침실을 돌아보던 그가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온다.

    “디에고…….”

    아련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자, 이제 시작이야.

    잘 따라오렴.

    “우선 여기를 좀 보세요.”

    멍하니 내 손에 붙들린 디에고의 시선이 내가 손으로 가리킨 초상화로 향했다.

    “이건 지금의 우리예요.”

    최대한 현재 모습과 비슷하게 그린다고 그렸는데, 옆에 서 있는 그를 보자 그림이 한참 모자랐다.얘는 진짜 그 어디에도 담을 수 없는 그런 미모였다.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이게 약 10년 지난 우리예요.”

    한 발짝 옆으로 옮겨가면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초상화가 있다.

    “비비안, 이게…….”

    도무지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디에고가 나를 바라봤다.

    이해가 안 가겠지.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모습으로 함께하고 있을지 그려봤어요.”

    물론 그림은 화가가 그렸다.그리고 또 한 발짝.

    “약 20년 후니까.

    이건 좀 변화가 있네요.

    그렇죠?”

    40대는 확실히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디에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중후한 멋이 더해지며 색다르게 잘생겨졌다.나는 살이 좀 쪘다.

    “…이게 진짜는 아니에요.

    알죠?”

    조금 익숙해진 것인지 미소 지은 그가 자연스럽게 옆 그림으로 향한다.

    “30년.

    여기 주름 생겼다.”

    어째서 자꾸 나는 살을 찌우는 거지.살짝 기분이 오묘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다 옆을 보자 디에고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40년.”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려져 있는 그림은 유독 따스했다.

    햇살이 잘 드는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그림.비록 한 번 더 살이 쪘지만, 그게 또 푸근해 보인다.

    그러나 디에고만큼은 끝까지 길고 늘씬했다.왜지, 왤까.무엇보다 같이 늙어 있는 모습에서 찡한 감동이 몰려오기는 했다.미래를 그려보니 디에고의 어릴 적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나중에 아기 때 초상화 있는지 물어봐야지.다시 그림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 내 본심을 전해본다.

    “궁금하죠? 정말 이렇게 늙어갈지.

    아니면 다른 모습일지.”

    못 박힌 듯 그림을 보던 디에고가 내게 눈을 돌렸다.

    “나중에 어떻게 다른지, 확인시켜 줄게요.”

    그의 기억 속 여전히 젊기만 할 선황제 내외.

    그건 두려움이었다.그러니까 그에게 이런 미래가 펼쳐질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이보다 더 예쁠 것 같기는 한데.”

    나는 특히 오동통한 40대 그림을 노려봤다.

    “…그래.”

    어딘지 먹먹해 보이는 디에고를 바라보다 지금 이게 무엇인지 한번 짚어줄 필요를 느꼈다.

    “저 지금 청혼하는 거예요.”

    진심을 전하기 위해 강렬하게 시선을 맞췄다.

    기선제압이 중요했다.

    “이렇게 우리 앞으로 이어질 나날을 기대하고 궁금해하면서 같이 살아요.”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그렇게 같이 살자.디에고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감동을 받은 것 같기는 한데 너무 놀라서인지 말이 없다.

    ‘한다는 말은 안 하네.’

    재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자.

    그를 이끌고 소파로 돌아갔다.

    긴가민가할 때 정신없이 몰아붙여야 했다.

    “제가 좀 공부한 게 있는데.”

    이 나이에 건강 관련한 지식이란 지식은 다 긁었다.

    오죽하면 의원 앉혀놓고 함께 연구까지 했겠나.

    “생각보다 건강하대요, 저.

    이제 식사도 잘할 거고, 운동도 하고.

    또 위험한 일에서는 최대한 멀어지려고요.”

    그럼에도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든 살아남겠다.

    살아남아서 꼭 네 곁을 지켜줄 테니까.

    “두려운 거 알아요.”

    “비비안.”

    “그래도 나랑 결혼하자.”

    손이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싫다고 하면 좀 슬플 것 같은데.점점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 그의 가슴께에 눈을 고정한 채 기다렸다.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감싸 올리는 손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왜 몰라.

    결혼한다고 하면 되는 건데.

    초조하게 왜 이러는 건데.

    그의 불안을 없애주자고 벌인 일에 내 불안감만 증폭되고 있었다.

    “지금 거절하시는 거예요?”

    화들짝 놀라 큰 소리를 내자 디에고가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그럴 리가.”

    “그럼요?”

    “결혼하자.”

    나는 미간에 힘을 줘야 했다.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올까 봐 걱정이다.

    사실 디에고를 울리는 게 목표였는데, 내가 해놓고 내가 울게 생겼네.

    “…불로불사 방법도 찾아봤어요.

    그런데 없어서.”

    나는 슬쩍 숨겨둔 유리병을 내밀었다.

    “이거 먹으면 안 죽는다고 거짓말하려고 했어.

    끝까지 결혼 안 한다고 하면요.”

    이 지경까지 안 와서 다행이었다.병과 나를 빠르게 번갈아 본 그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웃기 시작했다.

    웃으니까 좋구나.유리병 사기극이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미안해, 마음 쓰게 해서.

    그날 다 기억하는 건가?”

    다 기억했다.

    네가 털어놓은 진심.

    -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네가 내 가족이 되면 널 잃을까 봐.얼마나 끔찍한 걱정인가.

    가족이 되면 잃게 된다니.

    다시 또 그 애절한 목소리가 떠오르자 마음이 아려왔다.그래서 절대 너만 두고 나는 떠나지 않을 거라고, 절대 너를 포기하는 선택은 그게 무엇이든 하지 않을 거라고 전하고 싶었다.나를 품에 안고 그가 머리며, 귓가며 가벼운 입맞춤을 이어가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그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그 무엇도 누군가와 나누지 못했던 디에고의 삶.항상 혼자서 삼키던 네 감정, 어쩌면 너조차 알아주지 않았을 그 마음을.

    이제는 내가 들여다보고 싶었다.디에고가 나를 살펴봐 주는 것처럼.하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와는 다르게.

    “나는 각하처럼 속마음을 볼 수는 없으니까.

    그날처럼 말해주세요.”

    내가 네 마음을 돌볼 수 있게.

    “사랑해요, 디에고.”

    어깨 위로 따듯한 체온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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