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04화 (104/109)

104화

*대공저로 돌아온 디에고가 소파에 앉아 비비안을 되새겨봤다.

“좀 이상한데…….”

종종 딴생각에 빠져 있던 비비안.특히 오늘따라 계속 자신과 닿아 있으려는 것을 보아 숨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 봐도 근래 특별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짐작 가는 것이 도통 없었다.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그가 일어났다.이미 길은 어두웠지만 그런 것은 디에고에게 중요하지 않았다.같이 집무실에 앉아 있던 콘라드가 흐린 눈으로 디에고를 바라봤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나간단 말이냐.’

성큼성큼 문으로 향하는 그를 콘라드의 목소리가 붙잡는다.

“각하, 어디 가십니까?”

“윈데이너 후작가.”

“금방 거기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틀어 콘라드를 바라보는 디에고의 시선이 무감했다.

한마디로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말해보라는 눈빛이었다.

“그냥 여쭤봤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안녕히 주무십시오.’

라고 인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콘라드는 생각했다.대체 멀쩡한 집 놔두고 왜 자꾸 밖에서 잔단 말인가.듣기로는 저렇게 밤이나 새벽 후작가로 향하는 날에는 나무 위에서 쪽잠을 자기도 하고 때때로 발코니에 기댄 채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차라리 침실에나 들어가면 말을 안 하지.’

몰래 짝사랑하는 상대도 아니고.

왜 저럴까, 정말.콘라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콘라드의 한탄은 듣지 못한 채 금방 윈데이너 후작가에 도착한 디에고는 익숙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항상 걷던 길을 걸어 비비안의 방 발코니 아래 도착한 그가 고개를 들고 한참 바라본다.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아 아직 잠에 든 것 같지는 않은데.그리고 그때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디에고가 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미 흠뻑 젖은 몸을 난감하게 내려다보던 그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다시 발코니로 향한 시선에 갈등이 일었다.그저 잠든 얼굴이나 한 번 더 들여다보고 가려 했을 뿐인데.곧이어 훌쩍 발코니 난간으로 뛰어오른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커튼 사이로 빛 한 줄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 안이 보이지는 않았다.문고리에 손을 얹자 아무런 저항 없이 열리고 만다.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디에고가 낮게 한숨을 내쉰다.사실 언제부턴가 비비안은 발코니 문을 잠그지 않았다.

아마도 제가 이렇게 수시로 드나드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혹시나 자신이 잠들었을 때 내가 오기라도 할까 봐.발코니에 우두커니 서 있을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못하다 했던 게 생각난다.

“그래도 문은 꼭 잠그라고 말했건만.”

커튼을 젖히고 한 발 안으로 들어선 디에고가 멈칫한다.

“어?”

침대 밑에 주저앉아 흔들흔들거리는 인영.

“뒤에고?”

어딘가 몹시 안 좋은 발음.그의 눈에 포착된 커다란 술병.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며 멈췄던 발을 움직인 디에고가 어느새 비비안의 코앞까지 다가왔다.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던 비비안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대체 왜……?’

제 연인이 어째서 지금 이렇게 취해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가던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까 갔는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시야를 낮춘 디에고가 비비안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서 살폈다.

“다시 왔어.”

“왜요?”

데구르르―한 병인 줄 알았는데, 뒤에서 빈 병 하나가 굴러왔다.

“…….”

“아이코! 신경 쓰지 말아요~ 다 먹은 거예요!”

다 먹은 것이라 더 신경이 쓰인다는 말을 삼킨 그가 제 손목을 붙든 비비안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이 와중에 본능인 것인지 닿아 있으려는 비비안.슬며시 힘 하나 없는 그 가는 손을 떼어낸다.

아무것도 닿지 않은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형상.늑대 한 마리와 꽃밭이었다.잠시 말을 잃고 허공을 응시하던 디에고가 다시 눈을 내려 비비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오늘 무슨 생각 했어?”

안타깝게도 이성은 저 멀리 날려 보낸 비비안이 그의 부드러운 어조에 골몰하기 시작한다.

“결혼!”

뜻밖의 단어에 디에고의 눈이 커졌다.

“…결혼?”

그러더니 해맑던 그녀의 얼굴이 점차 시무룩해진다.

급기야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확인한 그가 그대로 비비안을 안아들었다.이로써 실시간으로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물 건너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소파에 앉은 디에고가 제 품에 비비안을 두고 토닥였다.

“속상해?”

목소리가 참 다정하기도 했다.그 덕에 비비안의 얼굴이 울기 직전의 아이처럼 일그러졌다.

서러움이 차오르는지 어깨가 들썩들썩한다.엄지로 그녀의 눈가를 훔친 그가 조용히 기다렸다.

“…청혼서가 안 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자신이 대공령에 있을 당시 비비안에게 청혼서가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을 들었다.심지어 누가 보낸 것인지까지 다 꿰고 있는 디에고였다.

“…연회 이후로 청혼서가 안 온다는 말인가.”

둘이 등장해 연인임을 과시한 것은 일부 그의 계획이기도 했다.

자신이 비비안의 곁을 비웠을 때에도 다가오지 말라는.한데 그게 무척 잘 먹히기는 했다만, 지금 그걸로 청혼서 끊긴 것이 아쉬운 건가.

“…뒤에고.”

자신의 이름인 듯한 것을 웅얼대는 비비안.

‘다른 말은 잘하면서 왜 내 이름만 저리…….’

“뒤에고가 청혼서를 안 보내서.”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잘게 흔들리는 동공이 디에고가 지금 얼마나 당황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결혼은 원치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자신은 비비안에게 대공비라는 이름을, 원치 않는데 짊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저 평생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있다면, 결혼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아―”

비비안의 어깨로 무너진 디에고가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결혼,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그녀가 답했다.

“싫었어.

그치만 디에고랑은 하고 싶어.”

몸을 움찔한 디에고가 말이 없었다.비비안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 묻어둔 다른 이유가 불쑥 찾아온 탓이다.

“…내일 기억 못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천천히 품 안의 비비안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네가 내 가족이 되면 널 잃을까 봐.”

실은 가족을 만드는 것이 두려웠다.제 가족은 항상 너무 일찍 저를 두고 떠났으니까.어린아이 같은 발상인 것을 알면서도.

정말 우습게도 비비안이 가족이 되면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한 번 든 생각은 두려움을 먹고 자랐다.너라서 두려웠다.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

“나한테 중요한 건 단지 네 곁에 머무는 거라서.”

그게 어떤 형태이든 중요치 않다 여겼다.담담히 툭툭 내뱉는 디에고의 진심을 비비안이 듣고 있었다.게다가 아직 너무 이른 생각임을 알지만, 제가 아이를 가지면 혹시 이 능력을 물려주는 게 아닐까.그것도 겁이 났다.그 덕에 비비안을 만나고 그녀를 더 잘 살펴볼 수 있음에 지금은 만족스러웠지만.전에는 고통스러운 경험과 기억이 태반이었다.비비안이 손을 뻗어 디에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따스했다.

“괜찮아, 괜찮아.”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았다.꽤 시간이 흘러 몸을 떼어낸 디에고가 졸음이 묻어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비비안을 보며 웃었다.

“결혼이라.”

이내 졸기 시작하는 비비안을 안고 침대 가로 향한다.포근한 침대 위로 그녀를 눕히고 아직은 찬 공기에 이불을 꼼꼼히 덮어줬다.그러고도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결국 디에고가 침대에 기대 바닥에 앉았다.

고개를 돌리면 비비안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오늘 하루 이해가 안 갔던 비비안의 모습을 되새기며 그가 미소 지었다.*왜 나는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무, 무울.”

물을 찾으며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는데 빈 병이 두 개나 되었다.

심지어 크기도 남다른 술병이.

“아가씨! 깨셨어요? 저 정말 침실 들어오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아세요? 여기 물부터 드세요.”

침실 꼬라지 보고 먼저 물부터 챙기러 갔다 온 거니? 너 참 유능하구나!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고 한숨을 쉬어본다.

숨을 크게 내쉬면 술기운이 빠져나가지는 않을까?

“후우―”

나 원래 숙취 없다며.

한데 비오첼라가에서 술 마신 뒤로는 꼬박꼬박 숙취와 기억이 딸려왔다.

“세상에.”

빈 병을 치우며 마리가 혀를 내두른다.어제는 내가 그냥 좀 싱숭생숭해서 그랬다.

한 번 의식하니까 어찌나

‘결혼’

이라는 게 나를 뒤흔들던지.일단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쓰는데 어김없이 기억이 날아들었다.어제 침실에서 나 혼자 마셨으니 별일 있었겠나 안심했는데.

- 뒤에고.뒤에고가 누구야?

- 결혼!

- 뒤에고가 청혼서를 안 보내서.아, 그래.

혼자 저런 말 할 수 있지.

있는데, 혼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점점 희게 질려가는 내 얼굴에 마리가 수선을 떨었다.

“아프세요? 의원 불러올까요?”

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나 지금 영혼이 아팠다.

심각한 수치심과 후회로.

“하아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벅벅 문질렀다.저택에 있는 술을 죄다 갖다 버리든가 해야지!

“…….”

그런데 기억이 돌아올수록 다른 감정이 몰아쳤다.디에고의 두려움, 상처.

한없이 연약한 새끼 짐승처럼 무방비하게 내게 기대오던 너.

괜찮다는 말만 속삭였던 나.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내가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좀 더 안아줬을 텐데, 더 너를 어루만져 줬을 건데.뒤늦게 너무 속상했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으니까.

항상 여유롭게 웃고 있어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미안했다.

‘난… 술 먹고 주정이나 부리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한참을 버둥거렸다.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뭐라도 해서 디에고의 불안감을 덜어주고 싶었다.분명 희미하게 웃어주었지만 꼭 우는 것만 같았다.

술 취한 와중에도 그게 너무 슬퍼서 그를 껴안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고.

“…미안해.”

혼자 그런 생각을 하게 해서.

내가 몸이 좋지 않거나 쓰러질 때면 유독 극심한 불안을 느끼던 디에고의 모습들이 연이어 떠올랐다.…내가 너무 몹쓸 짓을 했네.

“하아―”

그렇게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아픈 몸과 싸워가며 치열하게 고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