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신년 연회 이후 가능한 한 오래 수도에 머물겠다고 말한 디에고는 매일 나를 만나러 왔다.오늘도 어김없이 저녁 약속을 기다리며 마리와 티타임을 갖는 중인데.
“결혼이란 뭘까.”
내 공허한 목소리에도 마리가 흔들림 하나 없이 차를 음미한다.
“…가문끼리의 결합?”
고저 없는 목소리로 냉정한 답을 내놓는 마리.
“제가 이번에 보니까.
아가씨께 청혼서가 엄청 들어왔잖아요? 개중에 아가씨랑 말이나 한 번 섞어본 이가 대체 있기는 한 건지.”
없다, 없었던 것 같다.
“확실히 그러네.”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귀족들 생각하는 거야 뻔하니까.
꼭 나쁜 것만도 아니고.
“그래도 이젠 청혼서가 안 들어오네요, 아가씨.”
내 예상대로 신년 연회 이후로는 잠잠했다.
“나 각하랑 만나는 거 소문 다 났는데, 뭐.”
연회뿐만 아니라 근래 대놓고 둘이 돌아다니는데 그걸 보고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청혼서를 들이밀겠나.알아서 철회하는 놈들도 있더만.
“가문끼리의 결합이면, 윈데이너 후작가 좋잖아.”
우리랑 손잡으면 그야말로 두려울 것이 없을 만큼 귀족 사회에서 빠지는 거 하나 없는데.
“당연하죠!”
콧김을 뿜으며 자부심에 넘치는 마리를 보자 뿌듯했다.
“그런데 왜 청혼 안 해?”
“네?”
“아니, 청혼서라는 게 있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한 번 입을 열자 아주 우수수 쏟아지려 했다.
분명 내가 청혼서 잔뜩 받은 거 알고 있다고 했잖아.
“…각하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곧 하시겠죠.”
태평하게 말할 때가 아니야, 마리.나도 그런 줄 알았어.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청혼서가 들이닥치기 시작할 때, 언젠가 디에고의 것도 받겠구나, 하고 막연히.
“그보다 이제 결혼 생각이 있으신 거예요?”
마리가 눈을 반짝였다.있다,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응.”
“어머! 대공비라고요? 아가씨, 대공비!”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마리가 손뼉까치 쳤다.
얘가 이러는 이유가 있지.
그간 황태자비 싫다고 노래를 부르며 같이 머리 쥐어짜기를 몇 년인가.
‘잘됐다!’
가 아닌
‘너 정말 괜찮겠냐?’
는 물음이지.
“어쩔 수 없어…….”
나는 이미 디에고 없는 삶은 그려지지도 않았고, 멀리 떨어져서 볼 수 없는 것도 싫었다.당시엔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제대로 못 즐긴 것 같기는 한데, 같이 잠들고 눈을 뜨면 디에고가 보이는 것도 좋았다.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디에고를 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볼 때면 한숨이 절로 터졌고.그러니까.결혼하고 싶은 이유가 참 많았다.
“각하랑 결혼하고 싶어.”
결혼하면 안 좋은 점들을 아무리 나열해 봐도 좋은 점 하나를 이기지 못하더라.대공비, 일 많겠지.그럼 그 일 하면서 디에고 옆에 있는 게, 여기서 일없이 그를 그리는 것보다 나았다.
“어쩜!”
허윽, 그런데 그러면 뭐 하나.
상대가 전혀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신년 연회가 열리던 날, 테라스에서 보낸 시간을 되새기며 침 흘리기를 며칠.
문득 한 대화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내 고민이 시작되었다.
- 그거 결혼하자는 거예요?같이 살자길래 내가 물었더랬지.
그런데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더라.
물론 시간 차가 있었지만 답이 돌아오기는 했는데.
- 결혼이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내 옆에 있어줘.내가 언제 싫다고 했나.나 안 싫은데.
나 지금 이렇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
- 너랑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어.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다며.
“왜지.
왜일까.”
나는 그날의 대화를 곱씹으며 마리에게 의견을 구했다.
저건 무슨 뜻이겠냐고.
자기가 결혼이 싫다는 거야, 뭐야.
“아! 혹시 각하께서 알고 계신 거 아닐까요?”
“뭘?”
“아가씨께서 황태자비 자리를 극구 고사하셨던 진짜 이유.”
“아…….”
그럴싸했다.
내가 자리를 꾀하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걸 그가 알고 있었다면 디에고의 말이 이해가 갔다.그래도 그렇지.너무 하고 싶으면 한번 물어는 봐줄 수 있잖아? 그만큼 간절하지는 않다는 건가?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이걸 어떻게 풀지?”
‘나 너랑 결혼하고 싶다!’
라고 외쳐?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마리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 과한 권력은 좋아하지 않으시잖아요, 정말로.”
순화해서 표현하느라 애쓰는 마리의 표정이 심각했다.이름값, 주어지는 게 많으면 사실 그만큼 책임도 많아지는 게 이치였다.
잃을 것이 늘어나면 그만큼 조심해야 할 게 배로 생기는 법이고.그래서 가능하면 손에 무언가 더 쥐고 싶지 않았다.
그다지 원하지 않았으니까.내가 좀 더 권력욕이나 명예욕 같은 게 있었다면 훨씬 살기 수월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사실 달갑지는 않은데.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 대공령을 다녀오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사랑하는 사람을 받아준 곳.
황태자에서 대공이 된 그를 환영해 준 영지.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가꿨을 공간.디에고가 거기서 살아왔다는 것만으로 눈에 닿는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고 애틋했다.디에고 브라이트를 통해 나는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오늘은 저택에서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때마침 도착한 디에고와 차려진 식사 자리로 향하면서 그의 옆얼굴을 힐긋댔다.아까까지 마리와 결혼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서일까.
괜히 긴장됐다.
‘오해를 어떻게 풀지?’
황태자비 때랑은 상황이 많이 다르잖니.
너는 내가 사랑하잖아.
후우, 이걸 말로 해? 말로 해야 한다고?
“아까부터 무슨 생각해, 비비안?”
도착하자마자 덥석 손부터 잡고 한 번을 놓지 않는 중이다.내가 식사도 옆자리로 했어.
네가 내 생각 볼까 봐.
“아무 생각 안 했는데요!”
누가 봐도 무슨 생각 한 사람의 태도였다.
오늘 밥이 제대로 넘어갈지 모르겠네.문이 열리고 잘 차려진 식탁과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그가 앉은 의자와 내가 앉은 의자가 거의 붙어 있다시피 거리가 가깝다.
수프를 시작으로 시작한 식사는 이번에도 내 우려와 달리 잘만 넘어갔다.디에고가 온다는 소리에 주방장이 어제부터 주방에서 안 나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맛있네, 맛있어.’
연신 내 스테이크 썰어주랴.
조금 떨어진 곳에 올려진 요리 덜어주랴.쉴 새 없이 움직이는 디에고, 이거 결혼하자는 건가?이렇게 살뜰히 챙기면서 내내 웃는 거 보면 그거 아니겠어?
“비비안, 채소도 좀 먹어.”
접시 위로 푸른 풀밭이 형성되고 있었다.
‘내 건강 챙겨주는 거니? 결혼하자는 거야?’
잠시 멍하니 식탁을 바라봤다.
이러는 내가 좀 웃겼다.
말만 안 할 뿐이지, 디에고의 손길이며 눈빛이며 뭐 하나 달콤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이러니까 지금 막 온통 결혼 생각뿐인 내게는 하나같이 청혼으로 보였다.
“후우―”
결국 참지 못한 흥분을 긴 호흡으로 진정시켜 본다.
“왜? 뭐 걸렸어?”
목구멍에 결혼이 걸렸다.바로 물잔을 내게 내미는 그가 상냥했다.
더 결혼이 하고 싶어진다.
뜻하지 않게 죄가 많구나, 디에고.그만 집착하자.마음속으로 결혼 타령만 하던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이제 서서히 겨울이 끝나가는 듯 바람이 그렇게 차지 않아 함께 정원을 산책하기로 했다.벌써 디에고와 맞는 세 번째 겨울이었다.첫 겨울에는 서로를 전혀 몰랐고, 두 번째 겨울에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제는 그와 결혼이 하고 싶다.
‘작작해라, 나.’
이젠 내 속마음에 내가 질릴 지경이었다.뭘 생각해도 자꾸 거기로 빠지지?심각하게 미간을 좁히고 작금의 사태를 돌아보는데, 불쑥 들어온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붙들었다.
“자꾸 딴생각을 하는군.”
이걸 딴생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온통 네 생각 한 건데.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그가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냥 데려갈까?”
“네?”
디에고의 얼굴이 진지했다.
“널 두고 대공령으로 갈 생각을 하니 벌써 착잡해져서.”
곧 돌아갈 예정이 있는 듯한 말에 나 또한 절로 눈꼬리가 밑으로 처지는 게 느껴졌다.
“같이 갈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그게 퍽 마음에 찬 것인지 그가 허물어지듯 웃음을 짓는다.
달빛이 내리기 시작한 디에고의 얼굴이 고왔다.
“언제 가는데요?”
초조함이 묻어나는 내 질문에 그가 이마에 입술을 맞대었다.
“조금 더 있다가.”
그 조금이 어느 정도일까.
한 달은 될까.
그것도 안 되겠지? 그냥 나 짐 싸? 같이 가쟤잖아.이내 제 품에 날 끌어당긴 디에고가 장난스레 말한다.
“한 번 더 납치할까?”
“이번에는 아버지가 친히 구하러 오실 것 같던데요.”
내 머리 위에서 그가 소리 내 웃었다.
이제는 이 웃음소리가 들려오면 나른해진다.
“디에고, 이번에는 내가 만나러 갈게요.”
보고 싶으면 내가 가면 되지.
봄을 맞이한 대공령도 궁금했다.
“봄이 오면 놀러갈게요.”
내 얼굴을 멀거니 보던 디에고가 살포시 입술을 내렸다.
짧게, 꽃잎이 내려앉듯 닿았던 그의 입술이 멀어지고 부드러이 눈매를 휜 디에고의 얼굴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봄이 기다려지는군.”
기약 없이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 나니 한결 나았다.막연한 그리움의 나날들이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는 시간으로 탈바꿈된 순간이다.다시 나를 꼭 안은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래도 역시 지금 납치하는 편이 더 현명한 거 아닐까?”
이것 봐.
이게 결혼하자는 거랑 뭐가 달라?차라리 청혼서를 날려라.
납치보다 쉬운 길인 것 같은데, 지금.누가 디에고에게 이 방법 좀 일러주면 좋겠다.
결혼하면 이렇게 애틋하게 헤어짐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눈앞에 길을 두고 한참 돌아가는 이 기분.차라리 내가 그냥 하자고 할까.
이러다 분명 입에서 튀어 나갈 게 뻔했다.
“…각하,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안 그러면 내가 널 납치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