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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00화 (100/109)
  • 100화

    *격하게 혼자 있고 싶은데 또 떨어지기 싫은 이 기분.

    - 물 갖다 줄게.

    잠깐 있어.

    -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철푸덕―

    - 어?

    - 그러게.

    누워 있으라니까.디에고가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가뿐히 안아들고 침대에 도로 내려놓았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후우―”

    갓 태어난 새끼 짐승이 이럴까 싶었다.

    “평소에 너무 움직임이 없었나.”

    어제 너무 극도의 긴장으로 온몸에 무리가 간 듯했다.

    원래 다들 이런 건지, 내가 유독 몸이 튼튼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인지는 모르겠다만.탁―트롤리를 끌고 들어오는 디에고가 보였다.

    아니, 저걸 자기가 왜 끌어, 끌기는.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테이블 위로 음식을 하나씩 나열하는 모습마저 고아했다.침대에 앉아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디에고가 성큼성큼 다가온다.또 휙 들어서 옮기기 전에 재빨리 먼저 침대 밑으로 다리를 뻗었다.

    이번에는 휘청이지 않았다.그렇지, 아까는 잠시 다리에 힘이 풀렸을 뿐이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디에고를 지나치자 낮은 웃음을 흘리며 그가 뒤따랐다.소파에 앉으려는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디에고의 팔이 허리를 감싸들었다.

    앉으려던 모습 그대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게 된 내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왜 못 앉게 하니, 나.디에고가 먼저 소파에 자리를 잡더니 내 허리를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시중을 들어볼까 해서.”

    어딘가 신나 보이는 목소리로 스튜 그릇을 들어 올린 디에고가 스푼을 내게 내밀었다.

    “아―”

    아? 아아~?새가 부리로 쪼듯 스푼이 꾹 다문 입술을 두드렸다.시중, 시중이라.

    왜 또 그런 발칙한 발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려울 것도 없지.

    “아아~”

    입을 쩍 벌리자 입 안 가득 스튜가 들어찼다.

    크림 스튜가 참 맛이 좋구나.

    한 입 하고 나니 급격히 허기가 진다.오랜만에 벨리타가 된 심정으로 디에고를 부려보도록 하자.

    본인이 원한다는데.난 검지 하나로 그를 조종하기 시작했다.디에고는 유능했다.

    내게 빵을 물려두고 그 틈을 타 스테이크를 조각내다니.

    “아―”

    심지어 일부러 토마토와 채소는 거들떠도 안 보고 있는데도 알아서 스테이크 넣어주고 정신없을 때 채소까지 밀어 넣었다.깐깐한 유모가 따로 없다.

    “각하는 안 드세요?”

    “비비안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데.”

    아빠……? 아니지, 엄마인가?한참 야무지게 식사를 하고 나서야 부른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그의 품에 등을 기댔다.

    “디에고, 슬슬 수도에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이 담긴 두 번째 서신이 도착했다.

    “…그런가.”

    내키지 않는 주제인지 현저히 말을 아끼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

    “네.

    가봐야죠, 저도 이제.”

    고개를 꺾자 디에고의 내리깐 시선과 맞닿았다.

    “이번에 저 가면 신년 연회 때나 뵙겠네요.”

    내가 입매를 올려 웃는 것과 다르게 그의 얼굴엔 미소 한 자락 걸리지 않았다.나라고 너랑 떨어지고 싶겠니.

    그래도 어쩌니.

    여기가 네 집이고, 내 집은 수도에 있는걸.

    “그럴지도.”

    “나도 같이 갈까.”

    라며 디에고가 내 어깨에 이마를 부비며 속삭였다.나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다들 아닌 척했지만 대공령의 겨울은 바빠 보였으니까.

    게다가 이번 사건 때문에 그가 대공으로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기도 했고.

    ‘일해라, 디에고.’

    방해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냉정하군.”

    목덜미를 입술로 지분거리자 찌르르, 오묘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보고 싶을 거예요.

    기다릴게요.”

    그렇게 내게 주어졌던 행복한 시간들을 마지막까지 디에고와 함께 곱씹으며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분명 짐 하나 없이 대공령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이게 다 뭐람.나 하나 수도로 돌아가는데 마차가 다섯 대나 줄지어 서 있었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요.

    언제든지, 부디.”

    새벽부터 짐마차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정말 끝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었던 집사장 헴멜과 하녀장 안젤라가 인사를 전해왔다.그런데 너무 비장하다, 이분들.눈에 뭔가 열망이 가득하신 것 같은데, 지금.

    “그대들 덕에 과하게 편안했던 것 같아.

    그대로 쭉 머물고 싶을 만큼.”

    나는 진심을 담아 환하게 웃으며 감사함을 표했다.두 사람이 감격에 겨운 듯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며 당황하려던 차.

    “결국 가는군.”

    디에고가 등장했다.

    산뜻한 미소를 지은 그가 겨울바람 한 조각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내 로브를 꼼꼼히 여몄다.

    “대공령을 벗어나는 곳까지 함께 가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커다랗고 아늑한 대공저를 뒤로하고 마차에 올라탄 나와 디에고.제 무릎 위로 나를 앉히고 바로 틈 하나 없이 껴안은 그가 나른한 손짓으로 내 머리와 등을 토닥였다.

    “…보내기 싫은데.”

    나 또한 팔로 그의 얼굴을 그대로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그럼 같이 갈래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

    서로의 따듯한 온기를 나누며 농을 주고받던 짧은 시간은 금방 끝이 났고, 아쉬움과 애틋함이 덕지덕지 묻어 나는 입맞춤을 마지막으로 디에고를 돌려보냈다.*아련하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한가로이 눈물 훔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아주 시끌벅적했다.때맞춰 수도 경계 숲까지 마중 나온 아버지를 마주하고 둘이 어찌나 펑펑 울면서 재회의 기쁨을 가졌던지.아버지 얼굴을 보니 그간의 설움이 훅 밀려온 탓이다.저택에 도착해선 그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눈 밑 그늘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거 아닌가 싶게 피로가 서린 마리의 대성통곡이 이어졌다.

    ‘그래도 집이 좋긴 좋다.’

    역시 내 집만 한 게 없는지 후작저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마음에 평안이 깃들었다.며칠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일상.

    “마리, 진짜 나 지금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어.”

    나태하게 맛있는 거나 챙겨 먹으면서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고 누워 있는 삶.

    ‘그래, 이게 내 삶이었거늘!’

    헤벌쭉 웃으며 넓은 침대 위로 빙그르르 굴러다니자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아가씨의 이런 모습을 보니 너무 안심이 되네요.”

    디에고와 마찬가지로 사건의 충격이 컸던 나머지 후작저에도 내 납치 후유증이 심하게 남아 있다.한시도 혼자 있을 수 없었다.그래도 괜찮았다.

    침실에 누워만 있으니까.

    “응.

    난 또 내가 여행하면서 사실은 이렇게 잉여롭게 사는 게 나한테 안 맞았던 건 아닐까, 싶었거든?”

    아니었다.

    그냥 그 당시 기분에 취해 착각한 것이었어.

    “아닌 것 같아.

    나 지금 지나치게 행복하다.”

    원래 그런 애였던 게 맞았다.

    마리가 새삼스러운 소리를 한다며 가벼이 내 말에 동의했다.그러나 또 이만 일어나 봐야지.수도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입궁부터 했었다.

    황제 내외와 황태자에게 내 무사를 확인시키고 그간의 일들을 나누기 위함이었으나.후자는 뒤로 미뤘었다.이유는 장기 이동으로 피곤할 대로 피곤했던 내가 다시 쓰러지기라도 할 몰골이라서.이제는 동난 체력도 다 회복했겠다, 리안을 만나러 갈 때였다.황태자의 집무실, 뭐 하나 변하지 않은 그 풍경을 눈동자만 데굴 굴리며 확인한 내가 공간만큼이나 변함없는 리안을 바라봤다.

    “잘 지내셨어요, 전하?”

    “잘 못 지냈지.

    하도 납치범이 극성이라.”

    하하, 그것참.그날 이후 리안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걱정이 많았는데.우려와 달리 우리 둘 사이에 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그러나 분명 온화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이다.’

    어쩐지 훨씬 늘어난 듯한 서류 더미에서 일어난 그가 내가 앉은 소파 맞은편에 자리했다.확실히 서류 탑에 비례하듯 턱이 더 뾰족해진 것 같은데.

    “그래도 얼굴이 좋아 보이네, 비비안.”

    리안의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전하는 괜찮으신 거예요?”

    미간을 찌푸리며 너는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을 전해본다.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은 잘 안 나오는지 그가 살포시 얼굴을 찡그렸다.

    “…일이 좀 많은 것 같긴 하군.”

    와, 쟤가 저런 말 하는 애가 아닌데.대체 어느 정도면 저렇게 말한단 말인가.

    나는 덩달아 숙연해졌다.

    입궁 전까지 침대에 누워 방싯대던 것이 생각나 더 그랬다.

    “그,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 주세요.”

    “그러도록 하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한 리안이 무슨무슨 일들을 비비안에게 떠넘길까, 하며 농을 던졌다.

    ‘농, 이겠지? 진짜 일 나눠주는 거야?’

    아니다.

    진짜 나눌 수 있으면 나눠야지…….

    돌아가기 전에 뭐라도 하나 맡아서 가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다니엘 카터.

    그자와 관련된 이들도 조사에 들어갔어.”

    나와 디에고가 그들을 잡기는 했지만, 실상 잡고 난 후의 일들이 더 번잡스러울 터였다.

    “더불어 일이 일단락되면서 죄를 물어야 할 귀족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중이지.”

    그 일에 던컨 공자의 손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고 말하는 리안의 표정이 순간 매서운 상관의 그것과 같아 보여 움찔했다.

    “공자가 일을 참 잘하시나 봐요.”

    조심스레 말을 건네자 그가 흡족하게 미소를 띠었다.

    “유능한 부하가 생겼지.”

    “…….”

    “다 비비안 덕분이야.”

    “네가 지지해 줘서, 너를 통해 나를 돌아봐 주는 이들이 늘었어.”

    라며 해사하게 웃는다.그건 모두 네가 잘나서 그런 거란다.

    “전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지요.”

    나 또한 네 고결한 이상에 마음이 끌렸으니까,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눈을 동그랗게 뜬 리안이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전에 없이 후련해 보여서 내 마음마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잘됐어요.

    저는 진짜 전하가 큰일을 척척 잘 해내실 거라 믿고 있었다니까요?”

    내 너스레에 어깨까지 부들거리며 웃은 그가 상쾌한 표정으로 그간 내가 수도를 비운 사이 진행된 사안들을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이야기 중간중간 던컨 공자의 과중한 업무와 황태자의 레사 조련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텔라, 그냥… 황태자 직속 조직처럼 열심히 했구나.’

    이 일들로 인해 던컨 공작가가 황태자를 지지한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고, 리안의 공으로 돌려진 이 모든 것들이 그의 권력이 되어주었다.또다시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겠지만 당분간은 귀족들의 손발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워둔 꼴이라서 조용할 것이다.황태자 리안에게 전에 없던 막강한 지원군들이 생겨서 다행이었다.나를 포함한 견고한 그 기둥들이 제국을 수호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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