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평소와 달리 달큰한 향이 감도는 침실.더 이상 비비안에게 파묻힌 디에고는 없었으나 여전히 진득한 손길은 거둬지지 않았다.이미 한계까지 치달은 비비안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금방 수마에 빠져들었고.
“…잘 자.”
쉬이 꺼지지 않는 열기로 인해 탁한 목소리의 디에고가 그녀를 도닥였다.단 한 번이었다.지금도 몸은 갈증에 타들어 갔지만, 마음만은 이 한 번으로 충분했다.제 욕심보다 비비안이 소중해서.
오히려 이 이상 그녀를 흔들었다면, 후회했을 터였다.알면서도, 제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 육체에 그가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팔을 들어 눈가를 덮고 진정하려 했으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자신이 만든 어둠 속에서 그는 비비안을 빚었다.
“빌어먹을.”
끝내 비비안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둔 디에고가 발코니로 향했다.겨울의 찬바람에 몸을 식히고자 난간을 부여잡고 서 있는 그.그러다 이내 포기했다.
제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다만 이성을 잃고 비비안에게 달려들지 않도록 제 다리를 묶어두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 그가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응시한다.황홀했다.가능하다면 시간을 멈추고 싶었을 정도로.그녀의 긴 머리칼은 침대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 같았다.
저와 비비안의 몸짓에 때때로 가닥가닥 얽혀드는 분홍 실, 몇 번이나 입술을 맞대었던가.항상 투명하게 빛나던 보랏빛 눈동자가 열기와 물기로 흐려졌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동을 내리눌러야만 했다.
- 하…….
제발.애원하던 비비안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그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버거워 얼굴을 찡그리며 칭얼대던 것이 떠올라 디에고가 이마를 짚었다.당시엔 많이 참는다고 참은 것 같은데, 되새길수록 비비안의 몸 상태가 걱정됐다.그렇게 한참 혼자 마음을 추스르던 그가 침실로 들어섰다.
찬 기운이 남아 곧바로 비비안에게 가지 못하고 소파에 앉는다.워낙 고되었는지 꿈도 꾸지 않는 비비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에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품 안에 비비안을 끌어다 놓고, 못 견디겠다는 듯 얼굴 곳곳에 포슬포슬한 눈처럼 내려앉았다.그러기를 수 시간이 지나서야 눈을 감은 그의 앞에 봄이 펼쳐졌다.두리번거리던 시야에 툭 튀어나온 남자아이가 저를 통과해 지나쳤다.
‘어머니!’
반투명한 몸에 그대로 햇빛이 투과되었다.
“…꿈?”
도란도란 들려오는 대화에 디에고가 걸음을 옮겼다.잘 꾸며진 정원, 자유분방하게 차려진 테이블과 웃음이 끊이지 않는 세 여인.
‘어머니, 아기는 어디 있어요?’
앉아 있는 여인의 무릎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아이가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전하, 아기는 여기 있답니다.’
그 말에 남자아이가 달려간다.제게 퍽 익숙한 분홍 머리칼을 우아하게 올린 여인이 품에 안은 아기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기울여주었다.
‘우와―’
‘디에고, 아기는 아직 연약하니 조심히 다뤄야 해요.’
반짝이는 눈으로 힘껏 고개를 끄덕인 꼬마 디에고가 앙증맞은 손가락을 아기의 볼에 대본다.
“디에고라…….”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제 어린 시절 꿈이라는 것을.현실에선 볼 수 없는 이들이 버젓이 웃고 있었으니까.
“그 그림을 봐서 그런가.”
지난번 콘라드가 보여준 그림의 풍경과 비슷했다.그 평화로운 곳으로 디에고가 발을 내디뎠다.제 기억 속 그대로의 어머니를 이리 생생하게 볼 수 있음에 그의 시선이 전 황후에게서 떠나질 않는다.아무것도 모른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어린 자신이 애틋했다.너무 행복해 보여서 이 이후를 알고 있는 디에고에겐 더 사무치는 순간이었다.한참 가라앉던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듯 커다란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
‘으아아앙―’
‘왜 그럴까, 우리 공주님.’
디에고의 시선이 못 박힌 듯 고정됐다.
아주 건강해 보이는 아기 비비안에게.천천히 도달한 그가 아기의 뺨을 어루만졌다.
허망하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슬픔에 잠기던 푸른 눈동자에 빛이 들어찬다.
“귀중한 걸 보는군.”
자신의 분홍 토끼는 어릴 때도 콩알만 한 분홍 토끼였다.이 조그마한 아기가 어떻게 그렇게 어엿한 어른이 되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인 줄 알면서 점점 더 사고가 우스운 쪽으로 흘렀다.
‘이제 안 운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꼬마 디에고가 슬쩍 아기 비비안에게 제 검지를 내밀었다.
턱 박력 있게 그 손가락을 낚아챈 아기 비비안이 배시시 웃는다.
‘어머! 귀여워라.’
여인들의 자잘한 웃음소리가 번지고, 꼬마 디에고는 한 손으로 제 가슴을 부여잡은 채 감동하고 있었다.
“…설마, 저 때부터였나.”
발그레해진 뺨으로 아기 비비안 곁을 떠날 줄을 모른다.
‘잠시 응접실에 다녀와야겠어요.’
윈데이너 후작 부인이 일어서자 꼬마 디에고가 제 어미 품으로 뛰어들었다.
야무지게 손을 모은 아이가 어머니의 귓가에 속삭인다.
‘어머니, 제가 아기를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아들의 귀여운 요청에 미소 지은 황후가 장난스레 되물었다.
‘그리 비비안이 좋은가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꼬마 디에고의 얼굴에 비장함마저 깃들었다.다시 까치발을 들어 귓속말을 전하는 꼬마 디에고.
‘어머니, 비비안 주변은 무지개처럼 아주 예뻐요.’
한껏 흥분한 아이가 콧김까지 내뿜으며 커다란 비밀을 속닥였다.
‘오호.’
손뼉을 치며 같이 기뻐해 준 황후를 뒤로하고 아이가 아기 비비안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그 귀여운 모습에 남은 두 여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다과를 들기 시작했다.
‘부인! 제가 아기와 함께 있어도 될까요?’
조마조마한 마음이 얼굴 가득 표 나는 아이가 올망한 눈으로 윈데이너 후작 부인을 올려다봤다.
‘전하가 곁에 있어주신다니 무척 안심이 되네요.’
‘정말인가요?’
‘예.
앞으로도 비비안과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전하.’
생글 웃는 얼굴이 비비안이 후작 부인을 많이 닮았음을 알게 했다.커다란 침대에 작은 솜뭉치처럼 눕혀진 아기 비비안의 눈에 끔뻑끔뻑 졸음이 묻어난다.그 옆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꼬마 디에고가 슬며시 아기의 손에 제 손가락을 쥐여주었다.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윈데이너 후작 부인이 정원으로 돌아가고, 둘만 남은 자리에 꼬마 디에고의 얼굴이 헤실 풀린다.
‘…….’
어린 제 모습에 괜히 부끄러워진 디에고의 귀가 새빨갰다.
‘우와― 진짜 이렇게 예쁜 건 처음 봐.’
이때 이미 모든 것이 보였던 게 기억난다.
숨이 막힌다며 자주 울었던 시절.휘적휘적 손을 흔들던 아이가 아주 조심스럽게 제 이마를 아기의 이마에 살포시 얹었다.
‘비비안, 내가 지켜줄게.’
그리고 그 순간, 아이의 눈이 확장됐다.
퍼뜩 고개를 든 꼬마 디에고가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안 보이네?!’
디에고의 시선이 여태 아기 비비안의 손과 아이의 손가락이 닿아 있음을 확인했다.잔뜩 흥분해 파닥대던 꼬마 디에고가 작게 뒤척이는 비비안을 보고는 굳었다.
‘안 되지, 안 돼.’
꼼지락대며 아기 옆에 누운 아이가 빤히 비비안을 들여다본다.
‘너무 귀여워.’
이어진 꼬마 디에고의 말에 손으로 제 눈가를 덮은 디에고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방금까지 잠든 비비안을 곁에 두고 시간을 보내던 자신이 떠오른 탓이다.
산뜻함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 하는 행동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그렇게 꼬마 디에고마저 잠에 빠져드는 것 같자 디에고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어머! 폐하, 디에고가 비비안의 주변은 무지개처럼 아주 예쁘다고 하더군요.’
잠든 두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목소리.그리운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한차례 들려왔다.
‘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군.’
‘예, 제가 다 기뻤답니다.
비비안에게 감사의 선물이라도 보내야겠어요.’
장난기 담은 웃음이 싱그러웠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구려.’
대화 소리가 멀어지듯 잦아들었다.
‘이 능력은 사실, 단 한 명을 구별하고 만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요?’
‘아주 오래전 황후를 유독 사랑했던 선대가 남긴 말이라더군.’
아버지의 따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잠든 듯 보였던 디에고의 눈이 스르륵 뜨였다.
“단 한 명을 만나기 위해서라…….”
그 새벽, 고요한 침실 안에 디에고의 잔잔한 미소가 내내 비비안을 향했다.
【 함께하고 싶은 마음 】
원래도 아침에 눈 뜨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정말 눈꺼풀에 추를 매달아 놓은 듯했다.그뿐만이 아니었다.가볍게 끌어안은 채 눈을 뜬 적은 제법 있었지만 이처럼 칭칭 꼬여 있었던 적은 없었는데.
‘숨 막힐 지경인데, 이거.’
내 머리에 얹어진 디에고의 것이라 추정되는 턱.허리를 휘감은 팔.
내 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네 다리.너무 가까웠다, 모든 것이.디에고가 깨지 않게 어떻게 좀 틈을 벌려보고 싶은데.
꼼지락대며 요리조리 공간을 찾아봤지만 기가 막힐 정도로 빈틈이 없다.
“흐음.”
끙끙댔더니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히는 것 같다.
부지런히 움직이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는데.몽롱한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오동통했어.”
잠이 덜 깬 듯 잔뜩 잠긴 목소리로 멍하니 웅얼대는 디에고.오동통……? 지금 내 몸이 뭐 막 오동통했다, 그 얘기야?손으로 내 볼을 잡더니 주욱 늘린다.
나 얘 진짜 모르겠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만 어버버거리는데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은 아니네.”
푸스스 웃은 디에고가 나를 꼬옥 껴안았다.
“꿈을 꿨어.”
“꿈이요? 무슨 꿈?”
“아기 비비안이 나왔어.”
뭐?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아기? 아기라니.
물론 아기 너무 좋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너무 귀엽고 예쁘더군.”
“그 시절의 내가 질투 날 정도로.”
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이마를 맞댄다.이해가 안 돼서 미간을 찌푸렸으나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저 오늘은 내 뺨에 원수라도 진 것인지 계속 조물딱거린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저지하기엔 너무 행복한 얼굴이었다.
“즐거웠으면 됐어요.
나도 아기 디에고 보고 싶네요.”
아기 디에고라니.
후우, 토실토실한 얼굴로 근엄한 표정을 한 뚱한 아기 얼굴이 그려졌다.
‘…심하게 귀여운데?’
고개를 갸웃한 그가 짓궂은 미소를 장착했다.
필시 나를 놀릴 때 곁들이던 그것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준비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