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몇 날 며칠을 디에고랑 한 침대에서 자며 고뇌하던 나는 이제 없다.두근대는 마음으로 잔뜩 긴장을 해도 그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몇 번이고 체험했기에.노곤노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기대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방과 연결되어 있는 문이 열린다.이제 막 씻었는지 젖은 머리칼의 디에고가 성큼성큼 내 곁으로 왔다.후―몰래 심호흡을 해본다.
촉촉한 디에고는 내가 참기 힘든 순간 중에 하나였다.
아주 그의 몸을 따라 또르르 굴러가는 물방울만 봐도 목이 탔다.
‘어흑, 자자.
그냥 눈 감고 자자, 빨리.’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 싶은 마음을 못 이겨 슬며시 떴다를 반복했다.
“졸린 것 같네.”
내 뺨을 조물조물거리며 읊조린 그가 몸을 끌어내려 눕혔다.
이불까지 아주 야무지게 덮어주는구나.
“각하는?”
그리고 일어나려는 디에고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올려다봤다.내가 이제 이상한 버릇이 든 것 같거든?나는 얼마든지 혼자 잘 수 있는 어른이었는데 그가 나를 망쳐놨다.곁에 사람을 두고 자는 건 중독과도 같은 것이었다.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사랑하는 이가 있는 것.거기 있는 것만으로 전해지는 체온.그리고 종종 자다가 눈을 뜨면 바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좋았다.어딘가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은 디에고가 느릿하게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팔을 뻗어 그 위에 내 머리를 올리곤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잘 자.”
잘 자라는 말이 잘도 나오는구나.
괜히 심통이 났다.왜냐면 지금 귀에 들리는 거 아닌가 싶게 내 심장이 내달리고 있어서.툭하면 달려들어 헉헉댈 때까지 내 입술을 물고 넘어지는 주제에.
침실에만 들어서면 입을 꾹 다물었다.…내가 무서운 건가?설마 내가 자기를 어떻게 해버릴까 싶어 몸을 사리는 거야?
“허.”
생각만 해도 황당한 가설이었다.
“각하.”
“디에고.”
나도 나지만 너도 너다.
“…디에고, 나 자면 또 어디 갈 거예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원래 잠이 없는 것인지 다른 볼일이 있는 건지, 새벽녘에도 깨어 있을 때가 많은 듯했다.때로는 소파에, 침대에 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어쩔 땐 아예 침실에 있지도 않았다.
“아무 데도 안 가.”
흡족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체향을 한껏 들이마시자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하나 금방 또 치솟는 욕망에 미간에 힘을 주어 참아봤다.탄탄한 가슴이 눈앞에 자리할 때마다 손으로 쓸어보고 싶은걸, 내가 얼마나 힘겹게 저를 지켜주고 있는지 알까.오늘도 눈을 감고 세상의 순수한 것들을 불러본다.
‘이 혼탁한 마음을 정화해 주소서.’
혼란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등을 토닥이는 디에고의 손이 참 깔끔했다.
지나치게 단정하다, 이 말이다.틈틈이 입맞춤하는 걸로 보아 아예 생각이 없지는 않아 보이는데.오죽하면 나중에는 그의 건강을 살짝 의심해 보기까지 했다.경험만 없다 뿐이지, 보고 들은 것은 남들만큼은 되었다.
그 지식을 토대로 작금의 상황을 분석해 봤지만 답이 안 나왔다.슬쩍 눈을 들어 얼굴을 찾자 부드럽게 눈을 맞춰주는 디에고.
“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등을 감싸고 품을 더 파고들었다.
분명 움찔, 떨리는 등 근육이 느껴졌는데.그 이상 별다른 반응은 없다.
‘…엄청난 자제력의 소유자였던 걸까.’
차라리 내가 덮쳐? 아, 아니다.
아니야.눈물과 한숨을 삼키고 결국 인사를 전했다.
“잘 자요, 디에고.”
*잠이 든 비비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디에고의 눈동자가 짙어졌다.상냥하고 무해하던 방금 전과 달리 당장이라도 그녀를 어쩌지 못해 안달 난 본심이 표면 위로 드러났다.더 오래 비비안과 함께 있고 싶으면서도 점점 더 그녀와 같이 있는 것이 힘들어졌다.이러다 자신이 미치는 순간이 오는 것은 아닐까.
비비안을 상처 입히지는 않을까.겁이 났다.곤히 잠든 비비안의 말간 얼굴을 보며 난잡한 생각으로 몸에 열을 올리는 제 적나라한 모습에 디에고의 얼굴 위로 조소가 걸린다.제 쪽으로 더 파고드는 비비안.가슴팍에 미약한 숨을 토해내는 그녀 덕에 디에고에게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비비안의 머리에 제 턱을 얹었다 고개를 숙여 분홍 동그라미에 꾸욱, 입 맞춘다.
“…잔인하긴.”
웅얼대며 속삭인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한참 눈을 깜빡이며 인내하던 디에고가 더는 감당하기 힘들어져 슬며시 상체를 일으킨다.제 팔에 얹어진 비비안을 다른 손으로 감싸든 그가 조심스레 내려놓으려던 그 순간.그녀의 눈꺼풀이 들리며 보랏빛 눈동자가 저를 직시했다.
잠이 덜 깨 몽롱한 그 눈을 더 바라보다간 제가 끝내 무언가를 해버릴까 싶어 손으로 비비안의 눈을 덮었다.
“…더 자.”
비비안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별안간 뻗어 나온 두 팔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어디 가…….”
고개를 튼 디에고가 눈을 감고 제게 둘러진 가느다란 팔 안쪽, 여린 살에 입을 맞췄다.
“안 가.”
여전히 풀어지지 않는 것에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침대 위로 돌려놓는다.디에고에게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 바르작거리던 비비안의 미간이 좁혀졌다.힘을 풀어주자 또 겁 없이 달려든 손이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감싸 끌어내렸다.쪽―해사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입술을 맞대는 비비안에게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진 그가 그대로 몸을 내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간지러워.”
키득키득대며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비비안.
“비비안…….”
낮은 목소리가 목덜미에 울리자 그녀가 움찔한다.느른하게 깜빡이던 비비안의 눈동자가 점점 명확해졌다.반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저지른 일들이 조금 민망해진 그녀가 슬그머니 디에고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이어 여전히 비비안의 어깨에 머물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또렷해진 눈동자에서 앙증맞은 콧방울을 지나 붉게 벌어진 입술로 시선을 옮겨가던 디에고가 손으로 그곳을 쓸었다.고스란히 그 손길을 견디던 비비안이 마른침을 삼킨다.한참 눈으로 입술을 탐하던 그가 허락을 구하듯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만.”
탁한 목소리에 홀린 듯 잘게 고개를 끄덕인다.서로 달랐던 입술의 온도가 똑같이 뜨거워질 만큼 맞붙어 있었다.
어느새 비비안의 허리를 손으로 감싼 디에고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몸을 물렸다.더는 안 됐다.벌겋게 열이 오른 비비안 또한 숨을 몰아쉬며 디에고의 얼굴을 살폈다.지금의 키스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둘 다 알았다.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멈춰보려는 디에고와 그 색정적인 얼굴에 넋이 나간 비비안.도무지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을 죽을힘을 다해 해내던 디에고의 팔을 작은 손이 만류한다.
“왜……?”
“왜 그만둬?”
라고 묻는 비비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다.
“하.”
그 맑음에 다시 한번 디에고에게서 헛숨이 터진다.
지금 자신이 목소리를 낸다면 분명 욕망에 절여진 것일 게 틀림없었으니.아무것도 모르면서.내 욕망이 어떤 건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지금의 비비안은 악마나 다름없었다.입술을 짓씹은 그가 한 번 더 몸을 물리려 하자 비비안이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싫어.
가지 마.”
그 한마디에 더는 참고 싶지 않아진 디에고가 제 팔 아래 그녀를 가뒀다.
“마지막이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했다.
“더 가면 후회해도 소용없어.”
비비안이 긴장 속에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채워진 목줄이 풀린 것처럼 디에고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그러나 목 뒤로 손을 넣어 제게 끌어온 비비안의 입술을 쉴 새 없이 탐하면서도 그의 이성은 거침없이 뻗어 나가려는 나머지 손을 붙잡아두기 위해 애썼다.천천히, 천진한 토끼가 놀라서 도망가지 않게.제 욕망에 마구잡이로 망가지지 않도록.지나치게 농밀한 키스가 버거운지 움찔거리는 그녀를 달래듯 허리를 쓸었다.
오히려 그 눅진한 손길에 더 몸이 예민해진다는 것을 알면서.기나긴 입맞춤으로 비비안의 혼을 빼놓은 그가 입술을 뗐다.벌써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입술을 매만진다.
손가락이 지나는 대로 연약하게 짓눌렸다.온전히 제 몸을 맡기듯 품에서 흐트러지는 비비안이 자꾸만 그를 더 부추겼다.
“…….”
걱정으로 흔들리는 디에고의 눈동자에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가득했다.그대로 흐르듯 몸의 선을 덧그린다.
막힘없이 내려가다가도 비비안만의 앙증맞은 무언가를 발견하면 멈춰서 한참을 눈에 새겼다.여기에 이런 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이와 같은 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기에 몸을 내려 입을 맞췄다.온전히 너만의 것.손톱, 작은 솜털 하나까지 비비안을 이루고 있는 너만의 것.그 모든 것이 경이롭고 사랑스러웠다.네가 너임을 알리는 무수한 증거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남들은 모르는 너라는 증표를 끝없이 찾았다.
“흣.”
끊임없이 구석구석 자극하는 통에 비비안의 눈가에 결국 눈물이 맺혔다.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디에고가 그녀의 눈두덩에 입술을 묻으며 달랬다.
비비안을 절벽까지 몰아세운 것은 마치 제가 아니라는 듯.생경한 느낌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비비안이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본능이었다.호기롭던 시작과 달리 자꾸만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아 두려웠다.
발밑이 바스러져 어딘가로 떨어질 것 같다.
“자, 잠깐만…….”
그 가녀린 몸짓이 애처로울 법도 한데 그마저 움켜쥔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제 입술을 내맡겼다.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되뇌며 마침내 잇닿은 두 사람.이후에도 끈질기다 싶게 비비안의 표정을 살피는 그의 눈이 거칠었다.
작은 것 하나까지 사랑해 줘서 온전히 다 삼켜버리겠다는 듯.그러다 자신은 사라지고 영원히 네 안에 존재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열망에 취해.
“…디에고.”
그녀의 달뜬 입에서 태어나는 제 이름이 기꺼웠다.
“응.
계속 이름 불러.”
다정함을 가장해 진득한 감정을 밀어 넣는다.비비안의 귓불을 잘근 깨문 디에고가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눈을 감았다 뜨면 꿈으로 끝나지 않을까, 찰나마다 믿을 수 없는 감각에 그의 눈동자가 절절하게 비비안을 좇았다.
“비비안…….”
시간이 갈수록 밭은 숨을 내쉬는 그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대자 제 얼굴을 기대어 온다.강렬한 충동과 맞서느라 여태 잔뜩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그 속절없는 사랑스러움에 무너졌다.비비안이 좋아하는 미소로, 디에고가 전부를 바쳐 비비안을 채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