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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97화 (97/109)
  • 97화

    *대공저의 분위기는 둘로 나뉘었다.분홍색 작은 요정을 보면 다들 헤벌쭉 풀린 얼굴로 봄꽃처럼 피어났으나.안타깝게도 여태 무심한 얼굴과 적은 말수로 익숙했던 디에고가 답지 않게 미소를 짓거나 다정한 목소리를 낼 때면 흠칫, 놀라기 일쑤.가장 그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순간은 지금처럼 그 둘이 함께 있을 때였다.

    “각하, 안 바쁘세요?”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비비안.

    “그다지.”

    평온한 어조로 거짓을 내뱉는 제 상관의 모습에 콘라드가 평정을 유지하느라 애썼다.그리고 그런 디에고를 빤히 보던 비비안이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를 흘겼다.

    “그럴 리가 없지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각하.”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콘라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콘라드, 지금 한창 바쁠 때로 알고 있는데.”

    맞다.

    겨울철 대공령은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은 하나였기에 있는 그대로를 고할 수는 없었다.

    “하하.”

    멋쩍게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일에 방해가 되신다면 저 그만 수도로 돌아가고요.”

    동그란 눈을 하고 천진하게 말하면 다인가!비비안의 발언에 대공비 바라기 두 사람, 헴멜과 안젤라의 눈이 부릅뜨였다.칼날 같은 질책의 시선이 콘라드의 전신에 박힌다.

    “아닙니다.

    하나도 안 바쁩니다.

    아주 여유로워요, 대공저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의 모습을 짠하게 본 비비안의 고개가 기울었다.

    ‘눈 밑 거뭇한 거나 회복하고 말하지 그래, 콘라드…….’

    왕국 여행 때는 워낙 특수한 상황인지라 계속 붙어 있었던 것인데.

    대공령에 도착해서조차 한시도 제 곁을 비우지 않으려는 디에고의 모습에 당사자인 비비안마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그나마 그녀가 낮잠을 잘 때나 급한 집무를 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알게 된 비비안이 어설프게 하품을 했다.

    “저는 좀 졸려서 잠시 방에 가볼게요.”

    “같이 가지.”

    비비안의 흐린 눈이 디에고에게 향했다.

    여기서 더 실랑이 벌이느니 가서 빠르게 자는 척하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여전히 서로의 손을 붙들고 있기도 했고.사용인들이 어떻게든 디에고와 닿아 있으려는 제 모습을 어찌 볼지 마음이 쓰이는 비비안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루 종일 마음을 보이면서 살 수는 없지.’

    그렇게 비비안과 침실에 든 디에고가 그녀를 눕히고 가만히 토닥였다.분명 자는 척하자 다짐했던 그녀에게서 금방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온다.그를 확인한 디에고가 비비안의 이마에 짧게 입술을 맞대고는 방을 나섰다.집무실로 돌아온 그에게 콘라드의 물음이 돌아왔다.

    “…요새 무척 행복해 보이시는데 얼굴은 또 왜 초췌하십니까.”

    내심 신경이 쓰이는 그였다.

    분명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와 별개로 제 상관의 얼굴이 갈수록 피로해 보인 탓이다.그렇게 잠도 안 자고 서류를 뒤적이고, 몇 날 며칠 쉬지도 않고 말을 몰아 수도로 향할 때마저 산뜻했던 얼굴인데.소파에 기대앉은 디에고가 제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잠을 못 자서.”

    “네? 왜요?”

    “내내 같이 잤거든, 비비안이랑.”

    촤르륵―아무렇지 않게 툭 뱉어진 말에 콘라드가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떨궜다.자신이 지금 이 대화를 이어 나가도 괜찮은 걸까.

    아니.

    뭘,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면!

    “저 각하, 송구하오나 설마.”

    “그런 일 없었다.”

    차라리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말라죽을 것 같지는 않았겠지.

    “아…….”

    콘라드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분명 내내라고 하였는데.

    왕국에서부터…….’

    그러나 차라리 말로 내뱉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게 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짐과 동시에 동정마저 서렸다.

    “그… 근래 몸이 쇠약해지셨다든가… 예, 아닙니다.”

    설핏 제 건강을 염려하는 듯 확연히 드러나는 콘라드의 속내에 디에고가 헛웃음을 내뱉는다.

    “나는 너무 건강해서 탈이고.”

    디에고와 콘라드 둘 다 수심이 깊어졌다.

    “…아, 두 분이 오시기 전에 저택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애써 화제를 돌려보는 콘라드가 빠르게 한쪽에 보존하고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그림이었다.낯익은 얼굴들.

    “…….”

    세 여인이 햇빛이 쏟아지는 정원 가운데 자유로운 표정으로 차를 나눠 마시는 그림.차례차례 시선을 옮겨가며 그들의 정체를 가늠해 본다.기억 속 마지막 모습과 비슷한 어머니.지금보다 좀 더 활기차 보이는 황후 폐하.그리고 언젠가 비비안의 꿈에서 만나뵌 윈데이너 후작 부인.

    “세 분이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군.”

    따스한 그림이었다.

    각자의 표정도, 그들 주변으로 흐르고 있을 듯한 공기도.비비안이 보면 좋아할 것 같았다.

    제가 볼 때도 좋았으니까.디에고의 얼굴에 그리움과 함께 반가움이 겹쳐졌다.*

    - 이만 돌아갈까?라고 했는데.

    그래서 나도 이제 그만 윈데이너 후작가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그런데 어째서 나는 아직도 집에 가지 못한 것인가.

    - 설원, 보고 싶지 않나.보고 싶지.

    사실 설원도 보고 싶고 디에고가 머무는 대공령 자체가 무척 궁금했다.그리하여 대번에 좋다고 따라온 나.[납치당했다 들었다.

    아비가 친히 구하러 가마.]힘주어 눌러쓴 티가 나는 서신에 허겁지겁 장장 다섯 장에 걸친 답신을 보내느라 진땀을 흘렸더랬지.내가 얼마나 지금 잘 지내고 있는지.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많아 조금만 더 둘러보고 가겠다, 구구절절 간곡히 썼었다.

    ‘땀이 다 날 만큼 긴박했지.’

    그렇게 머물게 된 북부 대공령은 사람들이 떠들던 모습과 같게 몹시 추웠다.

    수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추위였다.그러나 날씨만큼이나 무뚝뚝한 사람이 많다던 말은 틀렸다.

    ‘오히려 너무 섬세한 거 아닌가.’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나를 무슨 깨질 유리 인형 정도로 생각하는지.

    내가 머무는 방은 발 딛는 곳이 전부 푹푹 꺼질 정도로 푹신한 털로 덮여 있었다.

    “…그래도 정말 돌아갈 때가 되기는 했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제국 내 상황도 궁금하고.디에고도 그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고.오늘 설원을 보여주겠다던 그를 기다리며 그간의 대공저 생활을 돌아봤다.워낙 부유하고 안정적인 영지라 날씨로 인해 겪는 어려움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생산이 어려운 것은 전부 들여올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는 것은 물론, 그를 사고파는 상점가의 수준이 몹시 월등했다.한 번씩 디에고와 산책할 때 스쳐 지나가는 영지민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만족하며 이 대공령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인지.

    “…대공비가 되면 나도 여기 살게 되는 거겠지.”

    허, 서둘러 머리를 털었다.

    대공비라니! 대공비라니! 나 무슨 일이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내뱉은 거지!느슨해졌다.

    - 대공저의 일은 워낙 잘 분배가 되어 있어서 딱히 어려움이 없답니다.

    - 지금 일하는 이들만으로 온갖 잡일부터 각하를 도와 집무를 보는 일까지.

    다 맡은 자들이 있지요.이상하게 집사장과 하녀장은 마주칠 일이 있으면 매번 저런 식으로 내게 속삭였다.

    - 그러니 영애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푹 쉬시면 된답니다.여기까지 소문이 난 것일까.내가 일하는 거 싫어하고 병약해서 주로 침실에 박힌 채 잉여롭게 산다는 걸.이들도 다 알고 하는 소리일까 싶다.

    ‘나 보기보다 일 잘할 수 있는데.

    정말 막 엄청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때마침 준비를 끝마친 디에고가 나를 데리러 왔기에 금세 대공비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말을 타고 좀 나가야 하는데.”

    “그런데요?”

    “바람이 차서 걱정이야.

    다음에 갈까?”

    다음이 어딨어.

    여기 북부야, 바람 찬 게 무슨 대수라고.

    “아뇨! 괜찮아요.

    오늘 가요.”

    바람이 많이 차긴 찼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기는 했으나 콧물이 난다.그렇게 적당히 볼이 얼었다 싶을 때쯤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새하얀 세상에 도착했다.

    “와―”

    뽀드득―말에서 내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귀가 간지러운 소리가 연이었다.

    수도엔 이렇게 잔뜩 덮일 만큼 눈이 내린 적은 없어서 신기할 따름이다.

    “으악.”

    무심결에 발을 내딛자 그대로 몸이 푹 꺼졌다.

    종아리까지 파묻힌 한쪽 다리를 입 벌리고 바라보고 있자 디에고의 손이 불쑥 내 허리를 쥐었다.힘들이지 않고 눈 속에서 나를 구해낸 그가 몸을 숙여 다리의 눈을 털어준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장난기가 듬뿍 담긴 미소로 나를 올려다보는 디에고.몸을 일으킨 그의 뒤편으로 끝없이 설원이 이어졌다.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그에 대비되어 디에고의 색이 더욱 선명해진다.

    “…각하도 이랬던 적 있을 거 아니에요.”

    샐쭉이 대꾸하자 그가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글쎄.

    기억에는 없는데.”

    자기만 끝까지 멋있는 척하겠다, 이거구나.그런데 멋있었다.그 언젠가 설원에 서 있는 디에고를 상상해 본 적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는데.그때 그려본 상상 속의 디에고는 혼자였다.지금은 나와 둘이고.

    “…둘이라서 좋네요.”

    “응?”

    지금 보니 가뜩이나 아름다운 만큼 쓸쓸함이 감도는 이곳에 그가 혼자 있는 그림은 썩 내키지 않았다.그대로 디에고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비비자 나를 꼭 안아준다.

    “추워, 비비안?”

    추운 걸로 해두자.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더 몸을 밀착해 온기를 전했다.이내 그대로 나를 안아든 디에고가 푹푹 꺼지는 눈밭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걸음을 옮긴다.그의 어깨 너머로 보니 눈부시게 반짝이는 눈 위로 나와 디에고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얽혀 있었다.떨어지지 않고, 함께 찍혀 있는 것이 기꺼웠다.짧은 설원 구경을 마치고 돌아와 따듯한 물에 몸을 녹이니 훨씬 더 행복감이 차올랐다.

    ‘크으~ 좋다, 좋아.’

    욕조에 몸을 뉘이고 생각해 본다.저녁마다 갖가지 향이 나는 것들을 내게 치덕치덕 발라주며 나를 노곤하게 만드는 대공저의 사용인들.그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티 냈다.

    “…그럴 만도 하지.”

    처음에 내가 머물 곳을 안내받았을 때는 기겁했다, 나도.디에고의 옆방까지는 어떻게 받아들여 보려 했는데, 서로의 방이 연결되어 있었다.문이 하나 나 있었다, 이 말이다.그 문이 왜 있겠나!

    “누가 봐도 부부가 쓰는 방 아니냐고…….”

    게다가 디에고는 매일 그 문을 잘도 이용했다.사용인들이 기대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젠 나도 기대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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