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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96화 (96/109)
  • 96화

    *단둘이 여행을 한 지도 시일이 꽤 지났다.디에고는 비비안이 보기보다 활기차고, 새로운 것을 즐기는 데 거침이 없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그녀는 윈데이너 후작가를 지워서 모두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며 좋아했지만.실상은 달랐다.사랑스러운 외모에 덧그려진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동하게 했음을.

    본인은 그걸 시선이라 여기지 않았지만.디에고는 내내 홀로 그 모든 것을 검열하고 경계했다.비비안을 좇는 사내들의 시선을 감지할 때마다 몇 번이고 자신의 커다란 몸으로 차단시키던 그.그녀 모르게 틈틈이 날리던 살기 어린 눈빛.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린 디에고가 소파에 앉은 채로 고개를 젖혔다.

    “차라리 칼부림하는 것이 덜 피곤하겠군.”

    이제 막 잠이 든 비비안의 새근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그가 미소 짓는다.고통이자 환희에 찬 아득한 시간이 디에고를 찾아오는 때.아니나 다를까.

    비비안 주위로 오늘 보았던 꽃나무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턱을 괸 그가 꽃잎을 흩날리며 번져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매번 이렇게 보는 것이 훨씬 아름답단 말이지.”

    비비안이 잠들고 나면 그녀의 꿈이 펼쳐진다.특히 근래 그 색이 더 다채로웠음에 얼마나 그녀가 이 여행을 만끽하고 있는지 디에고는 매일 밤, 깨닫고는 했다.자신으로 추정되는 검은 늑대가 빠지지 않고 꽃들 사이를 뛰어다닌다.

    꽃 폭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형국이 우스웠다.한참을 별 무리가 휩쓸고 간 자리가 뒤엎어지더니 보기만 해도 매워 보이는 빨간 음식들이 줄을 이룬다.그리고 그 긴 행렬 끝에 제가 자리했다.

    “이건 또 무슨…….”

    음식이 인상 깊었던 걸까.

    매운 음식을 좋아하나.약간의 불편함을 삼키며 비비안이 그려낸 반짝이는 자신을 바라봤다.

    스스로를 꾸미는 말이 아니라 정말 진짜로 반짝였다.

    ‘기왕이면 비비안이 나오는 게 더 나을 것을.’

    아까와 달리 조금 무감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디에고가 우뚝 굳는다.괴고 있던 턱이 삐끗하고, 지금 제 눈에 보이는 전개가 무엇인지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현실과 다르게 야무지게 매운 음식을 먹던 반짝이가 별안간 셔츠를 풀어 헤치고 있다.

    “…비비안?”

    허망한 외침은 눈앞에 펼치지는 참상을 멈추지는 못했다.끝내 온전히 벌어진 사이로 드러난 몸의 형태가 어쩐지 실제의 것과 비슷함에 디에고의 한쪽 눈썹이 치솟는다.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음식을 입에 담더니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흐른다.

    그것이 기어이 목을 훑고 굴곡진 근육을 따라 미끄러졌다.물을 들이켜는 반짝이의 목울대가 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하자 갑자기 그 과정이 천장을 가득 메울 만큼 크기를 키운다.덕분에 흠칫 놀란 디에고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이내 셔츠를 벗어 던진 것만으로 부족했는지 허리춤으로 내려가는 반짝이의 손을 본 순간, 벌떡 일어난 디에고가 단숨에 침대로 가 비비안의 손목을 쥐었다.방금까지 오색찬란했던 만큼 더없이 고요한 침묵이 그를 내리눌렀다.

    “하아.”

    들끓는 한숨을 흘려보낸 디에고가 원망 섞인 눈으로 비비안의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봤다.자신은 제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는 부류는 아니었다.제 알몸에 흥분하는 이는 더욱이 아니었고.단지, 자신을 벗기는 자가 비비안이라는 사실이 그의 욕망을 부추겼다.

    “…보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비비.”

    이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린 디에고가 그녀의 옆에 몸을 뉘었다.팔을 세워 몸을 지탱한 그가 가만히 비비안의 팔을 쓸었다.반투명한 네글리제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디에고가 조심스레 상흔을 훑는다.비비안이 스스로 낸 상처, 다행히 흘러나온 피에 비해 깊이가 깊지 않았다.이것을 볼 때마다 디에고는 제가 다 칼에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너무 여린 살은 살짝만 힘을 줘도 붉은 자욱이 되어 돌아왔다.여전히 제가 다 아픈 표정으로 닿을 듯 말 듯 상처를 쓰다듬던 그가 살며시 가녀린 팔을 들어 올린다.

    용서를 빌듯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며, 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오늘도 잠들긴 글렀군.”

    한없이 따스한 빛이 스민 눈동자가 비비안의 얼굴 곳곳을 담았다.비비안이 보여주는 세상은 아름답고 완벽했다.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환영이었지만 그러고 나면 그보다 더한 꿈이 거기 있었다.비비안이라는 꿈.지그시 눈을 감은 디에고가 그 안에서 다시금 제 안의 그녀를 그려 나갔다.온통 비비안으로 점철된 새벽이 지나 햇살이 드리우는 아침, 스르륵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응시한다.

    “…디에고?”

    “잘 잤어?”

    배시시 웃는 얼굴에 마주 미소 띤 그가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만 돌아갈까?”

    *대공령, 그 땅의 주인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모두가 분주했다.

    “…정말인가, 콘라드.”

    집사장 헴멜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예, 지금 각하가 윈데이너 영애와 함께 오는 중이십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불경한 표현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손주 보듯 지켜본 우리 각하가!노집사는 신중했다.

    “혹시 뭔가 다른 이유가……?”

    디에고가 왕국까지 넘어간 연유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그러니까 그저 윈데이너 영애를 구해 수도로 모셔가는 과정에서, 단순히 대공령을 들르는 거라든가.혹은 송구하나 영애의 일방적인 요청에 의해서라든가.의심으로 가늘어지는 시선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닌 콘라드가 강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의 연인이십니다.”

    “오, 신이시여.”

    헴멜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곤 굳은 다짐을 했다.

    ‘이것은 신이 주신 기회다.’

    디에고가 이성을 만나지 않는 것은 브라이트가의 가주로서도 걱정되는 부분이었지만 그보다 집사는 항상 그가 마음을 둘 곳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녀왔기에 더 안타까웠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는 오랜 세월 다져온 제 모든 능력을 동원해 오늘 브라이트 대공비를 맞이하리라 마음먹었다.물론 아직은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였으나 곧 그리되리라.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집사가 한결 푸근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 아는 거 있으면 다 털어놔 보게.”

    처음은 정보 수집부터였다.

    “대공비 자리는 마다하신다던데요.”

    “뭐?”

    “황태자비도 싫으시다, 대공비도 싫으시다.

    그리 들었습니다.”

    헴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도 모자라 입이 떡 벌어졌다.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럼, 지금 두 분은 무슨 사이라는 거지? 우리 각하가 가볍게 누구를 만나고 그럴 사람이 못 되는데.

    “그, 그럼 그, 각하가 지금은 호감 정도신가.”

    “아니요.

    목숨 거셨습니다.”

    단호했다.

    목숨을 걸었단다.

    “아, 목숨을…….”

    가벼운 탄식과 함께 눈동자의 총기를 잃은 집사가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모자란 게 없는 것을 넘어 완벽의 완벽함을 갖춘 제 주인이, 설마하니 여인의 마음을 못 얻어 저 지경에 이르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알겠네.

    내 그만 가보겠네.”

    침울한 표정을 한 집사가 비장하게 돌아서 걸어갔다.좀처럼 꽃이며 아기자기하고 따스운 물품들이 자리한 적 없던 대공저가 하나하나 변모하는 모습에 사용인들마저 들뜬 기분이 들었다.그것과 별개로 처음 맞이하는 가녀린 수도 영애를 거의 전설로 내려오는 요정 정도로 취급한 그들의 근심이 깊어졌다.추운 북부 겨울에 놀라지는 않을지.

    투박한 대공저의 모습에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을지.그들을 지휘하는 하녀장 안젤라가 영애를 맞이할 방 가운데 서서 이리저리 지시하기 바빴다.

    “이번에 들여온 하얀 털 있잖아! 그걸로 다 깔아.”

    “커튼도 하얀색으로! 추위에 약하실지 모르니 겹겹이 치도록 해.”

    온통 환한 색으로 탈바꿈해 가는 방을 둘러보면서도 안젤라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지금 그녀의 속마음은 집사장 헴멜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어떻게든 북부의 좋은 인상을 심어 드려야 해.’

    그렇게 각자의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던 차, 기다리고 기다리던 요정이 거의 다 도착했다는 소식에 손놀림이 빨라졌다.이윽고 모든 사용인이 일렬로 도열해 그들의 주인을 기다렸다.마차가 도착하고 언제나와 같이 고개를 숙인 채 소리만으로 상황을 가늠하는데.탁―

    “으니이, 제 발로 걸어간다그여.”

    제 딴에는 작게 속삭인다고 하는 것 같은데, 사용인들의 귀는 보통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자고 일어나서 추워, 비비안.”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소리 내지 못한 비명과 경악 어린 몸의 흔들림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대공저에서 일하면서 가주인 대공의 목소리를 들어본 자, 얼마나 되던가.자신도 모르게 슬슬 고개가 들리는 사용인들.그리고 마주한 것에 대한 인상은 이랬다.

    ‘요정과 낯선 사람!’

    분명 각하와 같이 온다 하셨는데, 요정의 앞에 서 있는 자는 각하일 리가 없었다.

    “비비안?”

    저 다정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남자는 당최 누구란 말인가!평소라면 매서운 눈길로 그들을 단속했을 헴멜과 안젤라조차 퍼뜩 고개를 든 참이었다.믿을 수가 없었다.저기 저 봄바람 같은 표정의 사내가 우리 각하가 맞는가!

    “각하, 전 정말 괜찮습니다.”

    못내 아쉬운 듯 미간을 찌푸린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비비안의 로브 앞섶을 여몄다.

    그 따스하고 섬세한 손길을 목도한 안젤라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다.그 순간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비비안이 고개를 돌리다 헴멜과 눈이 마주친다.

    “아…….”

    어색한 듯 그러나 더없이 선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돌리더니 디에고의 손에 이끌려 대공저로 들어섰다.표독스러운 여우가 우리 경험 없는 각하를 갖고 노는 것은 아닌지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헴멜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었어.’

    표독은커녕 눈만 마주쳐도 사람 마음을 환히 밝힐 것 같은 사람이었다.온갖 인간 군상이 가득한 귀족 사회에서 지내온 세월이 길었다.

    헴멜, 그는 어느덧 사람 보는 눈을 키웠다 자부하는 이로서 비비안 윈데이너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끝마쳤다.

    “안젤라,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하네.”

    은밀하게 속삭이는 집사에게 시선을 준 안젤라가 무언의 긍정을 보내왔다.이미 각하가 영애를 보는 눈빛으로 알았다.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대공저의 실세들이 열의에 차 불타올랐다.그리고 그들이 놀라 어물어물하는 사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콘라드는 흐린 눈으로 디에고의 뒤를 따랐다.

    “안 본 사이 더 심각해지신 것 같군.”

    혀를 찬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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