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92화 (92/109)

92화

순식간에 비명이 난무하는 경매장.그런데 그 속에서 예기치 못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디에고……?”

혼비백산해 도망가는 귀족들 사이사이 검을 든 자들이 우리와 맞서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미간을 찌푸린 아놀드의 목소리에 당황이 깃들어 있다.그에 반해 아무런 말이 없는 디에고.

“…….”

그러나 한참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내가 보기에도 기사들이 밀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생각했던 시간보다 정리하는 데 오래 걸릴 듯 보였다.

“각하, 내려가 보세요.”

디에고가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고 싶지 않군.”

“저 걱정하시는 거 아는데, 괜찮을 거예요.

여긴 올라오지도 않고.

또 정 위험하면 뒤편 통로로 바로 도망가면 되는걸요.”

애초에 그럴 일조차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그의 표정이 점점 더 구겨졌다.아니,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은데! 어중이떠중이 같던 아저씨들과 다르게 지금 아래서 날뛰는 자들은 훈련이 잘된 진짜 용병들 같았다.

“각하가 내려가서 휙휙 검 휘둘러주시면 훨씬 더 일찍 끝날 것 같은데요.”

쥐새끼처럼 들어왔던 출입구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귀족들이 자꾸 늘었다.그 앞을 기사들이 철저하게 막고는 있는데, 저러다 한 명쯤은 어떻게 도망가지 않을까?

- 단 한 명도, 제명에 살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빠질 수 없는 대회의가 있어 여기 오지 못한 게 한이라는 듯 이를 갈던 왕세자.에녹이 짓씹듯 당부한 말이 떠오르자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진다.

“어? 저기 한 놈 빠져나가려 한다!”

인상을 찌푸리며 디에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가 장난스러운 화가 스민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잠깐이면 돼.”

“네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씨익 웃어 보이자 손으로 내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린 그가 훌쩍 난간을 넘어 착지했다.그러더니 기사를 불러 내 쪽을 가리킨다.

디에고와 대화를 나눈 기사가 헐레벌떡 내게 달려왔다.

“제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나는 고맙다며 미소 짓고 다시 아래를 바라봤다.

‘와.’

디에고가 서 있는 곳부터 완전히 초토화가 되는 모습이 엄청나다.

순식간에 정리해 대는 통에 금방 끝날 듯싶구나.브라이트 기사단이 월등히 몸놀림이 날렵하고 깔끔한 것이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는데.

‘쟤는 아예 종족이 다른 것 같은데?’

멍하니 눈으로 디에고를 좇자 그가 한 번씩 나를 돌아봤다.눈이 마주친 것 같아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자 눈을 휘며 웃어준다.아주 여유롭구나, 디에고 너.

내 생각을 들여다볼 그를 위해서 나는 열심히 응원하는 그림을 그려봤다.

“영애, 아무래도 바깥 상황이 걱정돼서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내 옆에 서 있던 아놀드가 혹시나 휩쓸릴지 모를 저택 내 왕국민 걱정에 걸음을 재촉했다.힐긋 아래를 보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고.

“먼저 가세요, 저는 각하가 오시면 같이 갈게요.”

아놀드도 금방 상황이 정리될 것 같았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통로 사이로 사라졌다.그를 보내고 뒤를 돈 순간, 섬뜩한 시선이 따라붙는다.잠시 고요하게 나를 응시하던 남자가 돌연 내 쪽으로 내달려온다.당장 소리쳐 디에고를 부르려 배에 힘을 주는데, 달려오던 남자가 무언가를 옆구리에 낀 채 손가락을 입술에 붙였다.어두워 보이지 않는 것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살피는데.

“제레미?!”

잔뜩 공포에 질린 아이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다급한 상황에 시선을 돌려 디에고를 찾았으나 유독 그에게 달려드는 사내들 때문에 시야가 가로막힌다.

“저기, 수상한 자가―”

내가 말을 채 끝내기 전에 턱 끝까지 다가온 남자가 기사의 얼굴을 무언가로 덮었다.

“읍―”

별다른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 건장한 기사가 그대로 고꾸라진다.

그런 기사를 발로 차 저 멀리 치워버린 남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이어 순식간에 내게 도달한 남자가 거칠게 나를 움켜쥐고 벽으로 몰아세웠다.

“…나가는 문, 안내해.”

소름 끼치는 목소리와 서늘한 얼굴이 흔들림 하나 없이 나를 향한다.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자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누, 누나…….”

한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깨달았다.

지금의 내겐 선택지가 없다.

“괜찮아, 제레미.”

손을 뻗어 아이의 뺨을 간신히 한 번 쓰다듬자 남자가 턱짓으로 재촉했다.당장이라도 제레미를 해할 수 있다는 듯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는 남자.

그 악력이 고통스러운지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나는 간절하게 남자에게 빌었다.몸을 돌리기 전, 바라본 곳에 디에고의 등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엉켜드는 사내들 사이로 사라져버렸지만.

‘정신 차리자.’

좁고 어두운 통로를 걷는 내내 아이의 훌쩍임이 번져갔다.

어떻게든 제레미만은 남자에게서 벗어나게 해야 하는데.

“…….”

끝에 다다른 것인지 발치에 빛이 스며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샹들리에에 반짝이던 이 화려한 빛 아래, 디에고와 함께였는데.

“자연스럽게 빠져나가.

가족인 것처럼.”

“하.”

기막힌 숨이 터졌다.날 선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으나 틈 하나 없는 무표정이 나를 내리누를 뿐이었다.그가 내 등을 제 손으로 밀었다.질끈 감은 눈을 뜨자 여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소음과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여기서 소리를 지르며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무사할 수 있을까.

그런 내 망설임을 알아챈 건지 남자가 제레미를 붙든 손을 슬며시 내게 보인다.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의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여전히 내 등에 머무는 손이 칼날처럼 느껴진다.남자의 힘에 이끌려 사람들을 헤치고 건물 밖으로 향하면서도, 사방을 살폈다.

‘날카로운 게 필요해.’

그리고 막 밖으로 나서기 전, 뾰족한 머리 장식 하나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아이, 아이는 두고 가요.”

돌아본 남자가 빤히 눈을 맞춰왔다.

“내가 지금 시간을 벌어야 해서.”

“그대들이 소리라도 지르면 곤란할 것 같은데.”

라고 단호히 말한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리를 두고 가면 곧바로 사람이 붙을 거라는 계산인 듯했다.살짝 손이 떨려왔지만, 두 번은 못 할 것 같아 있는 힘껏 챙겨온 머리 장식으로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팔을 그었다.후두둑―

‘어흑, 너무 아파.’

판델 남작 영애의 심정이 이해 가는 순간이었다.너무 세게 그었나.

그래도 흔적이 안 보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깜깜한 하늘과 달리 거리엔 수많은 별이 자리한 듯 빛이 난무해 낮과 다름없었다.

‘덕분에 이렇게 피를 낼 생각을 했지.’

점점이 바닥에 길을 내는 붉은 자국을 확인한 내가 남자의 뒤를 따랐다.

“왜, 순순히 따라오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제레미가 아직 네 손에 있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내 장기 말이었어.”

인적 드문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남자가 뜬금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대로 역할이 끝나고, 네 자리로 갔으면 더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말? 이해가 안 갔다.

나는 처음 보는 이가 마치 나를, 이 모든 상황을 다 잘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비비안 윈데이너를 엮으면 손쉽게 황태자와 대공을 움직일 수 있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너를 이용해 그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건, 쉬웠어.

아주 잘 따라와 줬으니까.”

걸음을 멈춘 그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너희가 해온 일들이 모두 내 계획이었으나, 아직 모르는 것 같군.”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남자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난 노예를 부리는 것들이 싫거든.

그리고 그런 쓰레기들을 가장 잔혹하게 다뤄줄 이가 디에고 브라이트라 여겼는데.”

“너, 정체가 뭐야.”

“왜, 너도 그러지 않았나.

비오첼라를 무너뜨릴 때 너 또한 대공을 그런 용도로 써먹어 놓고.”

남자를 향한 내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게 나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나와 다를 게 없다 보는데.”

광기로 물든 입매가 위로 솟구쳤다.

터벅터벅 다시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뒤에서 생각했다.

‘나도 디에고를 장기 말처럼 사용한 적이…….’

는 무슨! 헛소리하고 있네!어떻게 저런 거랑 내가 같을 수가 있겠나.

내가 디에고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일은 원래 제국의 대공이 충분히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아니, 오히려 한낱 일개 후작 영애인 내가 지나치게 힘쓴 거 아닌가?!화가 났다.어디서 거지 같은 생각에 잡아먹힌 인간이 누가 누굴 이용했다고 지껄이는 건가.

‘야! 넌 그냥 미친놈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목숨이 귀중했다.*한창 제게 달려드는 검날들을 쳐내던 디에고가 짜증 서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가는 것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비비안이 있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

아놀드도 같이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둘이 먼저 빠져나간 것은 아닐까.

자신이 붙여준 기사 또한 함께 있을 터였다.그러니 먼저 바깥 상황을 살피러 갔을 법하다 생각하면서도.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무거운 검날을 보지도 않고 가볍게 쳐낸 디에고가 걸음을 옮겨 빠르게 통로를 관통했다.불안했다.시끌벅적한 인파를 헤치고 아놀드에게 다가간 그가 싸늘히 주변을 훑었다.

“비비안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나?”

“아니요.

각하랑 같이 오신다고 하셨는데…….”

디에고 주변의 공기가 대번에 사나워지더니 곧이어 그가 뛰쳐나갔다.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던 불안의 이유를 알았다.

있어야 할 놈이 보이지 않는다.[각하, 다니엘 카터 남작.

그자입니다.]콘라드가 보내온 서신에 적혀 있던 것은 자신의 감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건물을 빠져나온 그가 어디로 향할지 멈칫한 사이 붉은 선이 시야에 걸린다.

“…비비안.”

으득, 이를 간 디에고가 피를 따라 나아갔다.후작가 저택에서 비비안의 생일 연회가 열리던 날, 테라스에서 처음 마주한 자.데이비드 후작의 그림자에게선 놀라울 정도로 깊은 어둠이 새어 나왔었다.

그를 둘러싼 밤하늘보다도 까맣던 덩어리 덕에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보지 못했건만.

“아까부터 피 냄새가 나는데.”

골목에 들어서기 직전에 들려오는 음침한 목소리.

“…피, 피는 무슨.”

파르르 떨리며 이어지는 비비안의 음성이 꽂히고, 바닥에 향해 있던 디에고의 고개가 들렸다.꿀렁거리며 그 크기를 더해가는 까만 덩어리가 비비안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한다.그것은 한 인간이 품기엔 지나치게 크고 날카로워 매번 피비린내를 동반했고.

- 데이비드 후작, 그 뒤에 있는 놈 주시하도록 해.빛 한 줄기 투과할 수 없을 만큼 숨을 조여오는 것이었기에.질척하고 더러운 덩어리와는 다른, 고아하고 커다란 어둠이 깃든 디에고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듯 남자를 덮쳤다.

“다니엘 카터.”

지난날, 디에고가 그토록 경계했던 이는 하찮은 후작이 아니라 그 곁에 선 괴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