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조용히 배로 들어올 수 있었던 외진 항구.
드나드는 이 없어 버려진 그곳에 두 번째 배가 들어섰다.
“왔네요.”
고아하게 내 옆에 선 클라라가 멀거니 바다를 바라본다.남들 모르게 왕국에 발을 딛기 위해 이곳에 배를 댄 것이 며칠 전.아이들을 태운 배가 뒤이어 도착했다.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밝은 얼굴의 아이들이 내게 달려왔다.
“언니!”
달려와 내게 폭삭 안기는 아이들로 인해 몸이 뒤로 기울었다.턱―그런 내 등 뒤로 커다란 온기가 굳건히 존재한다.
뒤를 돌아보자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짓는 디에고와 눈이 마주쳤다.
“고마워요.”
마주 웃어주고 다시금 고개를 돌리니 기사들과 한데 어울려 이쪽으로 걸어오는 아저씨들이 보였다.후덕한 분위기와 이질감 없는 저 친분, 뭐지?그들은 무슨 몇 년은 함께한 전우들처럼 자연스럽게 섞여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저래도 괜찮은 건가.’
저 아저씨들 친화력, 무슨 일이지, 진짜?그리고 그 사이에서 기사들이 웃으며 스스럼없이 머리를 헝클어뜨려 놓은 노마가 보인다.얼굴에 한껏 짜증이 서렸음에도 내심 싫지 않은 것 같은데.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까칠한 막냇동생 같았다.
“주군,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제일 먼저 디에고의 앞으로 달려와 인사를 올리는 기사단장.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제랄드.”
짧게 웃은 그의 시선이 제랄드 뒤편으로 향하는 것에 내 시선 또한 딸려갔다.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며칠을 함께하는 것이 특별한 친밀감을 선사한 듯 기사들과 아저씨들 사이 곳곳에 아이들이 자리하고 있다.해맑게 흐르는 웃음소리에 가슴이 아려온다.
“…몹쓸 짓이군요, 정말.”
나와 같은 마음이 든 건지 클라라의 얼굴 또한 일그러졌다.
“걱정 마.
다 지킬 테니까.”
눈을 휘며 안심하라는 듯 웃는 디에고의 얼굴에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런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한데 모은 그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너희를 브라이트 기사단의 일원으로 삼을까 하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기사님들처럼요?”
흥분한 남자아이가 확장된 콧구멍을 자랑하며 외친다.
하나둘 동요하는 아이들.
“그래.
그간 봐보니 충분히 용맹하고 정의롭더군.”
애들 눈이 별이 뜬 것처럼 초롱초롱 빛나며 기묘한 고양심이 퍼져 나가는 게 보일 정도였다.
“브라이트 기사단으로서 너희가 해줄 일이 있어.”
“임무, 임무인가요?”
술렁이는 애들이 불끈 쥔 주먹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고개를 끄덕인 그가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잘 할 수 있지.”
어느새 자신이 동경하던 기사들처럼 첫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아이들이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에게서 두려움과 망설임은 사라지고 의욕만이 넘쳐흐른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 번 훑은 디에고가 미소를 띠고 나를 돌아보았다.너무 감동적인 장면이었다.어쩜! 나는 찔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두 손을 모으고 가슴을 꾹 눌렀다.
“…주군께 저런 모습이 다 있었군요.”
옆에서 굉장히 놀란 듯한 제랄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지? 너도 지금 놀랐지? 저렇게 다정하고 세심할 수가!
“사기꾼 같은 면모라니, 놀라운데.”
감탄하며 고개를 좌우로 젓는 제랄드에게서 나오는 뒷말이 이상했다.
“허,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옆에서 혀를 차며 재밌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클라라까지.이건 아니었다.
지금 저 성자같이 후광 비추는 듯한 디에고에게서 사기꾼의 면모라니! 사기꾼이라니!속상하다.디에고를 향한 세상의 편견이 너무했다.
‘나라도 알아줘야지…….
디에고.
멋지다, 너.’
나는 세상 아련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마침내 경매가 열리는 밤이 되었다.카리슨 상단의 이름값 덕분인지 제법 많은 귀족들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고 들었다.개중에 1왕자와 2왕자를 지지하는 귀족의 수가 상당하다며 비릿한 미소를 짓던 왕세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번에 아주 제대로 입지를 굳히겠네.’
나쁘지 않았다.
제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슈베른 왕국이니 그 나라를 통솔하는 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상당히 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까.에녹은 꽤 괜찮은 상대였다.다른 이유로 번잡스럽긴 하겠다만.
“…건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삐죽이 입을 내밀고 답지 않게 내게 존댓말을 하는 것을 보자 기분이 언짢았다.
“노마, 갑자기 왜 존댓말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사단장과 말을 나누고 있는 디에고에게 노마의 시선이 향했다.정말이지, 어린아이가 따로 없었다.사실은 조금 기뻤는데.
내게는 없는, 같은 나이의 친구가 있다면 이랬을까.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면 이런 기분일까, 를 느끼게 해준 게 노마였다.
“서운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노마의 눈이 더없이 커진다.그걸 보자 괜스레 민망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인상을 찌푸리고 시선을 돌렸다.
“젠장.”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제 머리를 벅벅 긁더니 별안간 고개를 숙였다.
“미안, 미안해.
내가 너무 못나게 굴었다.”
“풉.”
터져 나온 웃음에 노마가 왈칵 인상을 쓴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와 시뻘건 얼굴로 성을 내는 것이 영락없는 그였다.
“너는, 사람이 기껏 진지하게 사과를 했는데!”
“그래, 그래.”
“…아무튼, 나는 앞으로도 이 모습 그대로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새초롬하게 툭 내뱉은 노마가 부끄러움을 채 이기지 못하겠는지 나를 노려본다.
“아오! 나 간다!”
덩치는 어른인데 속은 아이보다 못하다, 쟤가 정말.멀어져가는 노마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디에고의 시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녹진한 눈동자가 내 속을 샅샅이 살피듯 집요했다.이내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던 그가 여유롭게 미소를 덧그린다.
“한눈을 판 건가.”
손을 들어 흘러내린 옆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짓이 야릇했다.
“날 두고.”
한눈을 팔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멍하니 디에고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자 한참 눈을 맞춰주던 그가 그대로 나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다 머리 위로 제 입술을 꾹 눌러온다.
“내가 이렇게 질투가 심한 줄은 몰랐는데.”
담담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다분했다.
“…질투할 만한 일, 전혀 없었는데.”
“알아.”
나를 껴안은 팔에 힘을 준 그가 이내 조심스레 나를 떨어트렸다.
“준비 다 됐어.”
그를 빗겨 바라본 뒤편으로 정리를 끝마친 듯 보이는 기사들이 보였다.아이들과 기사들 그 모두의 안전을 빌며 우리는 경매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이미 애들은 경매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그들을 인도하기로 되어 있는 아저씨들이 함께였다.
여차하면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몸소 움직여주기로 약속한.
- …너희가 진짜를 구별할 수 있을까.마지막에 스치듯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전하던 우두머리.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뜻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뭘까.
그냥 던진 말인가? 흘려듣기엔 계속 신경이 쓰였다.
골몰히 그에 대해 유추해 보는데 디에고가 말을 건다.
“비비안, 지금이라도 왕녀의 저택에서 기다려달라고 하면 들어줄 건가?”
아니요.
전전긍긍 너무 힘들 것 같은데, 그건.우리 한 발씩 양보하기로 했잖아.
나 애들이랑 같이 경매장으로 가는 것 포기했고.내 단호한 표정을 힐긋 본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대 덕에 내 수명이 주는 것 같아.”
“걱정 마세요.
각하는 오래 살 얼굴이세요.”
어이없다는 시선이 진득하게 내 얼굴에 달라붙는다.
좋은 말인데, 뭐.실없는 실랑이가 끝나갈 때쯤 번화가 중에서도 그 크기가 남다른 저택 앞에 멈춰 섰다.대저택 버금가는 크기.
“대단하네.”
슈베른 왕국의 부유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위용이었다.어둠이 내린 이 시각에도 많은 이들이 드나들고 있는 이곳.
화려한 불빛이 여기저기 사치품들을 비추고 있다.카리슨 상단이 소유한 이곳은 그들이 업무를 보는 공간이자 상품을 판매하고, 더불어 유흥을 즐길 수 있는 각종 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그러니까 평소에도 수많은 사람이 밤늦게까지 드나드는 곳.누가, 언제, 얼마나 이곳에 머물렀는지 특정 짓기 힘든 장소.그리고 누구든 드나들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에서 노예 경매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택지였겠지.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든 나와 디에고가 미리 언질받은 장소로 향했다.곧이어 카리슨 상단의 상단주, 아놀드와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었다.
“…직접 가보신다고 하여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가 준 가면을 쓰자 그 모습을 확인한 아놀드가 앞장섰다.좁은 통로를 따라 굽이굽이 들어서자 조용하던 주변에 소란이 스며들기 시작한다.빛이 적던 통로 끝에 다다르자 들이치는 화려한 불빛들에 절로 눈이 감긴다.감겼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커다란 무대가 보였고, 그 앞을 가득 메운 가면 쓴 이들을 보자 구역질이 밀려왔다.
“역겹군.”
나만 저 모습에 숨통이 막혀온 것이 아니라는 듯 디에고의 노기 찬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습니까.
저는 통쾌하군요.”
아놀드가 짙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제 발로 관에 기어 들어온 꼴 아니겠습니까.”
그의 시선이 어둠 속에 가려진 통로들을 훑는 것이 보였다.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웠으나 이 공간은 말 그대로 저들을 묻어버리기 위한 구조로 만들어졌다고 했다.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어리석게도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빛만이 아님을 모르는 자들.브라이트 기사단과 슈베른 왕국의 기사들이 빼곡히 저들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그들은 모른다.
“…아이들이 무대에 서기 전에 일을 끝냈으면 해요.”
그런 경험, 기억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지금 여기까지 오게 한 것만으로 이미 못 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을 지우기 힘들다.
“예, 험한 꼴을 보일 필요는 없지요.”
그랬다.
시작과 동시에 아수라장이 될 이곳은 아이들에게 위험하니까.
애초에 들이지 않아야 했다.
“제랄드를 보내놨어.
먼저 빼돌릴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비비안.”
고개를 끄덕이고 바라본 곳에서 이제 막 사회자의 경쾌한 목소리가 뻗어 나왔다.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검을 든 기사들이 위층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