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슈베른 왕국.
제국을 넘어 그곳에 도착한 한스 자작이 온갖 짜증을 내며 투덜거렸다.
“이게 무슨 고생이야.”
마차 타고 이곳까지 오는 길이 답답하고 힘겨웠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자신은 제국 내 여기저기서 물건을 긁어모으기나 했지.
근래 비오첼라가 빠지고 그들이 하던 일을 대신하는 한스 자작이 혀를 내둘렀다.
‘안 맞아.
빨리 이런 일들은 적임자에게 넘겨버려야지.’
숨통을 조이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얼굴을 보는 게 낙인 자작에게 저 멀리 서 있는 사내의 재수 없는 면상이나 들여다보며 길을 내달리는 것은 고역이나 다름없었다.꼿꼿이 선 채 무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후작의 그림자 또는 개라 여겨지는 자, 통칭 엘이라 부르는 그가 자작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상단에 기별을 넣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멋대로 하라는 듯 손을 내저은 한스 자작을 확인한 엘이 금세 자취를 감췄다.
“쯧, 하여간.”
혀를 찬 한스 자작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머물 만한 곳으로 향했다.
배가 들어오기 전, 먼저 거래를 성사시키고 준비를 해야 하는 통에 무리해 달려왔다.이제 또 얼마나 귀찮고 번거로울지 가늠하던 한스 자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스 자작이 몸을 뉘이고 있던 방으로 엘이 찾아들었다.불쑥 방으로 쳐들어온 그가 못마땅해 한마디 하려던 차.
“거래는 진행하기로 했으니, 우리도 배가 도착하면 지체하지 않고 넘겨야 할 것입니다.”
엘이 한발 빨랐다.
“뭐?”
“상단이 바로 준비에 들어간다 전해 드렸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그들이 응했다고?”
귀족들과 한차례 약물 거래를 진행해 본 한스 자작이 미심쩍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물품이 은밀할수록 거래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보통인데.한 번도 거래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 쉽게 승낙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약재상 이야기를 하니 안 그래도 이런 큰일을 도모하기에 그들은 배짱이 없다 하더군요.”
그 말에 저와 몇 번 만났던 약재상을 떠올린 한스 자작이 끝내 미소 지었다.
“그렇긴 하지.
오죽하면 미약 하나 못 팔아서 날 찾아왔겠나.”
어쩐지 단번에 자신이 대범하고 큰사람이 된 것 같아 어깨가 올라간 한스 자작,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이 등을 보였다.
“그럼 쉬십시오.”
“자네도 수고했어.”
자신이 할 일이 꽤 줄어들어 한결 기분이 나아진 한스 자작이 평소와 다르게 인사를 받아주었다.같은 시각.슈베른 왕국, 왕녀가 따로 마련한 그녀의 공간.
상점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저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던 그곳에 불이 켜졌다.이번에 처음 그곳을 방문한 왕세자, 에녹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언제 또 이런 걸 몰래 만드셨을까, 우리 누이는.”
생긋 웃은 왕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나 밀회를 즐기고 싶어질 때가 올까 싶어 그랬지요.”
“이런, 아쉽군.
네가 밀회를 즐겨보기도 전에 일적으로 사용하게 되어서.”
“영광이지요.”
서로의 속내를 훤히 알면서도 가벼이 농을 주고받은 그들이 저택 내 응접실로 향했다.탁―왕녀의 비밀 저택에 처음으로 타인들이 들어선 순간이었다.왕족의 등장에 잔뜩 긴장해 있던 이들이 벌떡 일어서 인사를 올렸다.
“앉게들.”
에녹과 클라라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장착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래, 그들이 도착했다고.”
에녹이 툭 말을 던지자 수더분하지만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사내가 입을 뗀다.
“예.
말씀하신 대로 노예 경매를 제안하길래 승낙하고 오는 길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왕세자가 반대편 소파에 앉은 레사의 사람,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어때, 할 만한가.”
“저하의 손길 덕분에 수월하다 못해 저희가 할 일이 없는 지경이지요.”
난감한 듯 웃는 그를 보며 왕세자가 고개를 기울였다.처음 황태자의 보좌관과 레사가 찾아와 왕국에 상단을 꾸리겠다는 말을 했을 때, 이미 그때 에녹은 머리를 굴렸다.
“다 카리슨 상단 덕분이지.”
능글맞은 에녹의 목소리에 슈베른 왕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카리슨 상단의 상단주, 아놀드가 튀어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많은 자금과 밑 작업으로 그럴싸한 것을 꾸며낸들 진짜만 하겠는가.’
왕국의 왕세자가 직접 저를 불러들였을 때만 해도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몰랐다.
- 카리슨 상단, 그곳에서 일을 주도한다 하면 쥐새끼들도 좀 더 쉽게 그 꼬리를 드러내지 않겠어?레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여겼다.그들을 못 믿어서라기보다 돌아가는 판이 그랬다.
아무리 잘 꾸려낸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상단의 이름에 위험을 불사하겠나.왕세자가 잡아들이고 싶은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려면 좀 더 많은 자들이 겁 없이 일에 뛰어들 수 있어야 했다.그렇기에 그들이 준비한 패.왕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서 깊은 대상단.그들이 뒤로 이런 일을 주최한다 하면, 그렇다면 음침하고 의심 많은 이라도 한 번은 귀가 솔깃할 것이었다.그만큼 이 상단이 왕국에서 갖는 존재감은 컸다.
“…장사는 신뢰인데.”
아놀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슬쩍 제 불만을 표했다.일이 끝나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다 드러날 것이었다.카리슨 상단이 이 일과 꽤 연관이 있었다는 것.
여태 자신들이 이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는 비밀 엄수와 신뢰가 바탕이 되어왔거늘.그리고 눈에 띄게 누군가를 지지하지 않았기에 폭넓은 고객층을 향유했었다.
“왕세자 저하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느른한 미소로 헛숨을 삼킨 아놀드가 에녹과 시선을 맞췄다.
덕분에 앞으로 왕세자의 반대편에 선 자들이 그들과 거래를 끊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런가.
나쁘지 않을걸세, 그 자리도.”
해사한 미소로 답하는 에녹을 보며 끝내 아놀드도 피식 웃는다.
“예.
카리슨 상단이 그 정도 일로 휘청일 만큼 부실하지는 않지요.”
팽팽하던 공기가 이내 조금 느슨해지자 왕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서 귀족들은 좀 움직일 것 같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고 얼마 안 가 아놀드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그게 말입니다.”
한 가지 생각지 못했던 것에 대해 그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 시일이 급해 저희 쪽에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자신을 찾아온 사내에게선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에 참 많은 사람이 있다지만 웬만한 부류는 다 한 번씩 상대해 봤다 자부하던 아놀드 그가 내심 당황했을 정도로.그리고 단정한 몸짓으로 사내가 내민 것.그것을 품에서 꺼낸 그가 왕세자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어지?”
“지금껏 제국과 노예 거래를 진행하던 왕국의 귀족 명단입니다.”
왈칵 얼굴이 구겨진 에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아놀드를 바라봤다.
“저를 찾아온 자가 건네주더군요.
일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아놀드의 얼굴에 비웃음이 깃들었다.가만히 명단을 살피는 응접실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찬찬히 분노가 차오르는 듯 왕세자의 주먹 쥔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모하고 있었다.탁―그대로 탁자에 명단을 내려놓은 에녹이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당장 그들을 죄다 잡아들이고 싶지만, 증거라곤 종이뿐이니.모함이라며 소리칠 그들의 뻔뻔함을 되새기며 간신히 참아내는 그였다.
“…전부, 가능하면 다 불러들여.
하나도 빠짐없이.”
분노를 품은 서늘한 음성이 권력을 지닌 채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평소 여유롭고 나른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대하는 에녹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왕국의 차기 주인으로서 그가 가진 위압감을 설핏 엿본 듯한 아놀드가 깊이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출렁이지 않는 육지.
이게 얼마 만인가.
“와, 이제 살 것 같네.”
반가운 땅바닥에 힘껏 발을 문대본다.
‘어흑.
그간 고생 많았다, 내 위장아.’
훅 불어온 바람이 내 머리를 감싼 후드를 날려버리자 커다란 손이 다시 푹 눌러 씌운다.그리고 때마침 도착한 마차 한 대.아무런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마차 안에서 낯익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뵐 줄은 몰랐는데.”
클라라가 비죽이 솟은 입꼬리를 선보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언니, 제국에서 만날 때랑 너무 다른 모습 아닌가요?이편이 더 내 취향이기는 했다.
그 가느다랗고 우아한 손을 맞잡자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온다.
“왕국에서 자네를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
한껏 풀어진 미소로 디에고에게 말을 거는 왕세자 에녹.그가 고개를 돌려 마주친 눈동자에 찰나 걱정과 안도가 스치는 것만 같다.
“…매번 저를 근심에 빠지게 만드시는군요, 영애.”
허물어지듯 미소 지은 에녹이 내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이번에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모든 게 다 꾸며진 듯 보이던 그에게서 이제는 조금 익숙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너는 항상 내게 미안과 걱정이 담긴 표정만은 진짜로 보여주는구나.
“네, 다 저하가 걱정해 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가벼운 어조로 농인 듯 아닌 듯 건강하게 웃어 보였다.
건강하게, 가 중요했다.짐짓 놀란 표정을 짓던 왕세자가 끝내 소리 내 웃음을 흘리곤 마차를 가리킨다.
“바람이 차가우니 이만 가시지요.”
“예, 제 비밀 저택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답니다.”
요사스러운 미소와 당당하고도 생기 넘치는 왕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와, 진짜 이게 너구나.호호호, 거리며 가련한 표정을 주로 짓던 모습이 지금의 그녀와 겹쳐졌다.
‘그냥 다른 사람인데…….’
그런 내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고 만 건지 왕녀가 짓궂게 웃는다.
“보니 영애 취향이 제 본모습에 가까운 것 같아서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니.
맞다, 맞아.스텔라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언니.더불어 제국에서는 디에고를 두고 나를 울적하게 했는데 지금은 그쪽으로 눈길 한 번을 안 준다.
- 이제 와 드리는 말씀이지만, 각하는 얼굴 빼고는 그다지 볼 것이 없네요.제국을 떠나기 전 내 귓가에 속삭이던 클라라.내가 병상에 누워 황망히 바라보자 어깨와 눈썹을 으쓱이며 그녀가 덧붙였더랬지.
- 영애 가지세요.왜일까.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허, 참.어느새 디에고가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무표정을 고수하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왜?’
이내 비밀을 속삭이듯 다정한 입 모양이 돌아왔다.그게 또 괜히 간질간질해서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지난 며칠간, 악몽 같기도 달콤한 꿈 같기도 했던 바다를 뒤로한 채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