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다니엘 카터 남작 】
비비안 윈데이너가 사라진 직후, 후작가를 살피러 갔던 콘라드와 사라가 침울한 공기가 흐르는 응접실에 자리했다.
“두 분은 고아원에서 저녁을 함께한 이후, 윈데이너 영애와 마주한 적이 없으시다는 거죠?”
콘라드의 물음에 걱정 가득한 두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앤 라야 자작 영애라는 분은?”
아까부터 사라의 신경을 긁고 있는 인물에 대해 다시금 묻자 판델 남작 영애의 미간에 주름이 진다.
새벽녘 마주친 자작 영애의 행색이 퍽 수상했음을 기억한 연유였다.
‘평소에도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연인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벌어지고 나니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
그렇게 판델 남작 영애가 입을 열었다.
제가 본 것과 느낀 것, 아는 것을 모두 토로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새벽녘에 그녀를 봤어요.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일찍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하더군요.”
얘기를 듣던 셀빈 자작 영애의 얼굴에 살짝 허탈한 비웃음이 걸렸다.
“그분은 어제 얼굴 한 번을 안 비치시더니 언제 돌아오셨답니까?”
셀빈 자작 영애의 말에 판델 남작 영애의 고개가 기울어지며 무언가를 떠올렸다.
“혹시 언제쯤 라야 자작 영애가 저택에 돌아온 것인지 알거나 본 사람이 있습니까?”
사라의 질문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어제는 각기 방에 들어서 피곤함에 저택을 나돌아다니지 않았으니 못 봤을 확률이 높았다.그리고 그때, 판델 남작 영애가 다시 한번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자작 영애, 어쩌면 자기 방에 돌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자신도 새벽녘 그녀를 마주쳤을 때, 그제야 자작 영애가 저택에 돌아온 것이라 착각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라야 자작 영애의 행색이 새로이 단장한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었다.
“로브를 입고 있어서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머리도 그렇고, 방금 치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판델 남작 영애의 신중한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던 사라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 라야 자작 영애의 방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방의 주인이 부재한다지만 후작 영애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지금, 그녀를 찾기 위해서 못 할 일은 없었다.마리의 뒤를 따라 도착한 라야 자작 영애의 방.콘라드는 그 방을 둘러보며 작게 감탄했다.
‘아무리 부가 넘쳐나는 후작가라지만, 상상 이상이군.’
기약 없이 머무는 영애들이었다.
사건이 있기 전엔 이렇다 할 관계가 있던 인연도 아니고.비비안 윈데이너가 내어준 방은 여느 명망 높은 귀족가의 영애가 머물 법한, 그것도 아주 사랑받는 이가 차지했을 듯한 공간이었다.콘라드의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은 셀빈 자작 영애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과분하죠.”
넉넉한 자금으로 머무는 사람을 최대한 고려한 듯한 세심함이 곳곳에 드러났다.설핏 눈물이 맺힌 듯한 셀빈 자작 영애를 본 콘라드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빨리 뭐라도 찾아내야 해.’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매의 눈으로 방을 살피며 침대 가를 더듬었다.
침실 정리를 한 이후 사람이 든 흔적이 안 느껴지는 방.
“이건 무어죠?”
그때, 사라가 화장대 가운데 고이 모셔져 있는 머리 장식을 들어 보였다.
“아, 그걸 놓고 갔을 리가 없는데.”
판델 남작 영애가 의아한 듯 말을 하자 그 옆의 셀빈 자작 영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연인의 선물이라며 언제나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그들이었다.
“라야 자작 영애가 무척 아끼는 물건이라, 외출할 때도 항상 하고 가시던 거예요.”
그리고 그 순간.조심스레 방문이 열렸다.
“어?”
“…….”
“아, 영애.
죄송해요.
멋대로 방에 들어와서.”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라야 자작 영애가 문 앞에 굳어 있다.
판델 남작 영애의 멋쩍은 사과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한 그녀가 손을 벌벌 떨었다.
“…앤 라야 자작 영애신가요?”
그때 사라가 여전히 머리 장식을 손에 쥔 채 그녀에게 물었다.
무심결에 소리가 난 곳을 향하던 라야 자작 영애의 눈이 화들짝 커진다.
“제, 제 거예요.”
황급히 달려와 사라의 손에 쥐어져 있던 머리 장식을 거칠게 뺏어든 라야 자작 영애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예, 멋대로 손을 대서 죄송합니다.”
그런 그녀를 찬찬히 훑어 내려가던 사라가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으려던 때.망연자실한 채 쉴 새 없이 눈물을 보이던 마리가 성큼성큼 라야 자작 영애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이었어?”
억눌린 분노가 담긴, 비명과도 같은 마리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향했다.라야 자작 영애가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 그것은 어제 마리가 손수 비비안에게 입혀준 것이었다.못 알아볼 리가 없다.
잘못 봤을 리도.
착각할 수도 없는 제 아가씨의 드레스.침대 밑에서 나온 분홍색 가발.누군가 아가씨 흉내를 냈다는 증거.마리의 시선이 자신의 드레스를 향한 것에 그제야 로브를 걸치지 않았음을 알아챈 자작 영애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당신이 우리 아가씨 행세를 한 거야?”
바들바들 떨리는 음성이 난데없이 정곡을 찌르자 라야 자작 영애의 전신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 이게 아닌데…….’
“아니야! 내가 무, 무슨 행세를 했다는 거야?!”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귀족으로서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사람이었다.소소한 심술은 부렸어도 이런 일을 꾸며본 적도, 행해본 적도 없던 무지한 자작 영애에게 일련의 상황은 헤쳐 나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생사람 잡지 말고, 저리 비켜!”
제가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고 그저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해진 라야 자작 영애가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그리고 걸음을 옮기려는데.짜악―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라야 자작 영애의 얼굴이 사정없이 옆으로 돌아갔다.휘청인 그녀가 붉게 부풀기 시작한 제 뺨을 감싸곤 황망한 시선을 들었다.
“우리 아가씨, 어디 있어.”
파랗게 질린 입술로 눈에 가득 차오른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힘준 마리가 서늘하게 물었다.방금 제 얼굴을 내려친 것이 이 눈앞의 시녀, 마리의 손이 맞는 것인지 눈으로 좇은 라야 자작 영애가 숨을 몰아쉬었다.*파도 소리가 이따금 들려오는 배 안의 방.요 며칠 달콤한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각하, 이것 좀 놔주시죠.”
“어째서.”
아무리 네 너른 가슴이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지만 우리가 무슨 서로의 신체 일부도 아니고.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연인의 가슴이라니.좋기는 무지하게 좋았다.절로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단속하는 것이 요새 내 아침 일과다.
정말 디에고는 허투루 말을 내뱉는 애가 아니었다.하루면 될 줄 알았다.
‘설마 내내 같은 방을 쓸 줄이야.’
배 안에서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언제나 우리는 여유로웠다.
잠이 깨고도 한참을 침대에서 노닥거릴 정도로.고개를 들고 디에고의 잘난 얼굴을 빤히 본다.자다 깬 지 얼마 안 된 그의 얼굴은 어느 명화보다 감명 깊었다.
‘살짝 멍한 눈빛에 왜 이렇게까지 가슴이 뛰냐고.’
나른하게 눈꺼풀을 내렸다 올리며 행복한 듯 미소 짓는 디에고의 얼굴이 내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보는 두 번째 광경이었다.첫 번째는 그의 가슴이고.그런데.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첫날은 하도 정신이 없어서 뭣도 모르고 격하게 콧김 내뿜다 잠들었지만.한 번, 두 번 반복되면서 내 안에 의문이 자랐다.나 여자, 너 남자.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는 남녀.내가 경험은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애는 아닌데.
이게 이렇게 태평할 상황인가?
‘…내가 여자로 안 보여?’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에 얼굴을 구기자 디에고의 눈썹이 위로 솟구친다.
“응? 왜 그러지?”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러이 감싸 들어 올린 그가 지나칠 정도로 다정한 눈을 맞춰왔다.
‘너는 나랑 한 침대에서 이렇게 붙어 자는데, 아무렇지도 않니?!’
라고 어떻게 외친단 말인가.어쩐지 서러움이 밀려온다.
나는 밤에 자려고 눕기만 해도 가슴이 미친 듯이 떨려서 정말 어쩔 줄을 모르는데!
“…아니에요.
이만 일어나려고요.”
푸른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난다.
찬찬히 나를 살피던 그가 상체를 들어 내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쪽―가벼이 입맞춤한 후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살며시 쓰다듬는 디에고.
“…예쁘다.”
자고 일어난 후 조금 잠긴 듯한 그의 목소리 덕에 귀가 움찔, 떨려왔다.목소리만으로도 이렇게 반응하는 내가.
네가 이럴 때마다 나 혼자 너무 안달이 난 것 같아서 분했다.혼자 씩씩거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디에고가 몸을 일으킨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내게 닿아 있던 제 신체 부위를 하나씩 떨어트리는 너.
유려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명백한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내 마음을 훔쳐보겠다고.얼른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꼭 쥐어본다.
“함부로 나한테서 떨어지지 말아요.”
곁눈질로 디에고를 째려보자 동그랗게 뜨인 눈을 끔벅끔벅 깜빡인다.
“설레는걸.”
누가 얘를 늑대라고 했는가.
보면 볼수록 요망한 여우에 가까웠다, 얄미울 정도로.
“진짜 일어나야겠어요.
오늘 왕국 도착 맞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바다 위 생활이 끝난다.
끝까지 나를 괴롭히던 뱃멀미와도 이제 안녕이다.디에고와 나를 태운 배는 원래 내가 타고 있던 배보다 먼저 왕국에 들어서기로 되어 있다.
“도착하면 바로 왕세자 저하를 만나기로 되어 있는 거고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디에고가 어느새 털 달린 로브를 들고 와 내 어깨에 얹어주었다.나 눈곱도 안 뗐는데 로브 앞자락을 여미며 야무지게 리본을 묶는다.
“…나 아직 안 씻었는데.”
“공기가 차.
감기 들어.”
겨울이라 확실히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찬 기운이 돌기는 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대로 나를 들더니 소파에 앉는다.번쩍 들어 나르는 게 무슨 짐이라도 된 기분인데.디에고의 품에 기댄 채 소파에 앉은 꼴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가만가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줌에 따라 몸이 노곤노곤해진다.몸도, 마음도 한껏 늘어지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본다.
- 약재상이 알려준 곳과 직접 거래를 하겠다더군.배의 우두머리는 우리가 묻는 것에 담담히 답했다.
‘아마 이 배가 도착하기 전에 그들에게 접촉해 두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자를 모르겠다.
어떤 인간인지, 무슨 목적을 지닌 것인지.
그는 내 존재를 알았을 때도, 디에고의 등장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마치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인 것처럼.
“수상해.”
“무엇이?”
“우두머리요.
그 세상 의욕 없어 보이는 말라깽이.”
내 표현이 우스웠는지 디에고가 피식 웃었다.
“그렇긴 하다만,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무슨 근거로?”
뒤를 돌아보며 되묻자 그가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입을 뗀다.
“보이니까.
비비 말대로 그자는 아무런 의욕이 없어.”
“아.”
그렇다면 넘어간다.
디에고를 속일 수는 없지.
한데 분명 다른 이들 건 나처럼 글자나 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느낌, 연기, 색깔.
이런 걸로 보인다고 했죠?”
“응.
이렇게나 보고 살면 그만으로도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지.”
내가 궁금해한 것이 무언지 알고 있다는 듯 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