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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88화 (88/109)
  • 88화

    *

    “허.”

    배 위는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디에고와 둘만의 세상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달려왔더니 혼란 그 자체네.잔뜩 구른 듯한 행색의 아저씨들.

    그 곁에서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훌쩍이는 아이들.

    난감함이 드리운 기사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내게 익숙한 얼굴이 다가온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빙긋 웃는 얼굴에 여유가 묻어나는 그는 대공가의 기사단장이라 했다.나는 상황에는 맞지 않았지만 미소로 화답했다.

    날 구하러 여기까지 달려와서 웃는데, 나도 웃어야지.

    “경,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그 스스로도 의아함이 남았는지 고개를 갸웃한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우선 영애를 납치한 자들이라 상대하기는 했지만.

    저희로서도 지금 도통 이해가 안 가서 곤란하던 참인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함께하며 정이 들 만큼 든 아저씨들과 아이들은 이미 서로를 아꼈으니까.

    기사들이 대뜸 밤에 쳐들어와 무력을 행사하니 저들 입장에서는 날벼락 같았겠지.

    “그… 납치가, 납치는 맞는데.”

    나는 요모조모 그간의 사정을 손짓, 발짓 써가며 설명했다.그러니까 쟤들이 나쁜 짓을 한 건 맞는데, 이게 또 정작 후회하는 기색이라고.

    나와 아이들은 그간 아무런 핍박 없이 너무 미안할 정도로 잘 지냈다고.저 한쪽 구석에 무력하게 앉아 있는 이 배의 우두머리가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여전히 남 일이었다.

    대체 쟤는 왜 이 배에 올라탄 걸까.

    “흠.

    어찌할까요, 주군.”

    모든 사정을 들었어도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지 기사단장의 시선이 디에고에게 향한다.그래, 곤란하지.

    그럴 거야.

    이들이 이런 일을 수행할 만큼 명백히 악하고 삐뚤어진 심성을 가지고 그에 맞는 태도를 취해왔다면.그랬다면 오히려 일이 수월했을 터였다.그 이상으로 잔혹하게 다루면 되니까.

    “어떻게 하기를 원해, 비비안?”

    디에고가 내 시선에 맞춰 제 높이를 낮추고 다정하게 묻는다.

    “음, 각하 생각은 어떠세요?”

    그래도 여기서 네 권력이 압도적인데, 의견 있니?

    “내게서 그대를 뺏어간 자들과 같은 하늘 아래 있고 싶지 않으니.”

    그의 입매가 그린 듯 곡선으로 휘었다.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만.”

    말끝에 다다른 시선이 바다를 가리켰다.

    “히익―”

    그 소리를 나만 들은 것은 아닌지 여기저기서 고요한 비명과 동요가 소란하다.

    ‘아, 그냥 여기서 싹 다 밀어버리겠다는 거구나, 너는.’

    나는 살짝 그의 옷깃을 끌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숨을 잃어야 할 만큼은 아닌 거 같아요.

    그래도 하면 안 되는 짓에 동참한 자들이니 적당한 처벌은 있어야겠고요.”

    썩 내키지는 않는지 눈썹을 추켜올리긴 했지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처분은 추후에 결정하지.”

    당장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을 알았는지 아저씨들이 감격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그들을 뒤로하고 디에고가 나를 옆구리에 낀 채 자신들이 타고 온 배로 훌쩍 넘어갔다.

    그렇게 그가 이끄는 대로 내 거취가 새로이 정해졌다.디에고와 함께 쓰는 방으로.

    ‘…왜? 이렇게까지? 이제 위험은 없는데.’

    이 배에 방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크기도 참 컸고, 타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각하, 방은 따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옆방, 옆방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맹렬히 옆을 가리켰으나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물러설 기미가 안 보였다.어떻게 조금 틈이 보이면 우겨볼까 했으나 좀처럼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글렀다.

    영락없이 같이 자게 생겼네.완고한 디에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두 손 번쩍 들어 항복을 표했다.

    “후우, 그런데 이제 어쩌실 생각이세요?”

    사실 그가 나를 찾아낼 것이라고는 믿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닷길에서 마주하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다.왕국 어딘가에서 보겠거니 했는데.그래서 내내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여겨 고민했다.

    육지에 닿기 전에.나도, 아이들도 배에서는 안전할 수 있었지만 왕국에 도착하면 또 상황이 달라질 테니까.

    “내가 이만 돌아가자고 하면 그리 따라올 건가.”

    그리고 또 하나.배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갱생이라도 되는 건지, 이런저런 것들을 술술 털어놓던 사내들 덕에 나는 그 안에서 정보를 취합할 수 있었다.이 일로 이득을 보려던 데이비드 후작, 그리고 추잡한 욕망으로 가득한 왕국의 인물들을 한데 잡아들일 수 있는 기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각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자 진지하던 그의 얼굴이 끝내 허물어졌다.

    “놀랍지도 않군.

    그래서 따로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느른하게 웃은 디에고가 나를 이끌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폭 기대자 너무 넓은 품 덕에 안정감마저 느껴진다.그 어떤 소파보다 편안하구나.

    “원래대로 가는 건 어떨까 싶어요.”

    그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의 계획대로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게.”

    그래서 그들이 안심하고 고개를 내밀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목덜미를 옥죄일 수 있도록.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담담한 디에고의 목소리에 약간 불만이 서린 것 같은데.

    “네가 또 그 일에 앞장선다면,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손장난을 치던 그의 손이 자유의지를 갖고 내 손을 옭아맸다.

    손동작에서마저 자신의 단호함을 피력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지금 꽤 예민한 상태라서, 비비안.”

    편안하기만 했던 자세가 어쩐지 불편해진다.

    넓다 여겼던 품 안에 잠겨드는 듯, 뒤에서부터 그가 나를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그대는 당분간 내게서 한 발짝도 멀어질 수 없어.”

    귓가에 스미는 음성에 어디를 향한 것인지 모를 열기가 가득하다.

    ‘뭔가 다른데…….’

    내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찝찝함이 스쳤다.

    아까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고.

    눈동자가 살짝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아무튼 오늘의 디에고는 자꾸만 나를 긴장시킨다.

    “저도 각하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진심이었다.

    만나니까 이렇게 좋은걸.

    그러나 이건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이기는 했다.

    ‘디에고가 붙어 있으면 내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데.’

    옹기종기 내 주변을 따스하게 채워주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 어린애들을 보호자 없이 진창으로 내모는 건, 아주 짧은 시간이래도 고려한 적 없었기에 곤란했다.

    “…그래도 아이들만 보내는 건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

    “그 수보다 더 많은 기사를 붙여두지.”

    “애들이 너무 불안해할 거예요.”

    “그게 마음에 걸리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걸로.”

    “…….”

    이번만큼은 디에고가 쉽사리 양보할 것 같지 않았다.잠시 물러난다, 내가.

    아직 시간 있으니 설득할 여지가 생기겠지.

    오늘은 워낙 걱정과 불안감 속에 지내다가 만나서 더 그런 걸 거야.하루, 이틀 지나면 너도 안정 찾고, 나도 이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그랬다.

    문제는 내게도 있었다.우선 나부터 디에고 품에서 떠나기가 싫은데.

    가슴을 가득 채우는 네 향기, 내 몸 이곳저곳에 닿는 네 온기, 그리고 무엇보다 애정이 담긴 눈빛에서 벗어나기 너무 힘들다.

    ‘어흑.

    오늘따라 왜 또 이렇게 야해 보이는 걸까, 네 얼굴.’

    심란하다.

    피로와 예민함이 곁들여져서 그런지 디에고의 얼굴이 한층 우수에 차 보였다.

    그게 또 퇴폐해 보이고, 그렇네.멀거니 그 얼굴을 뜯어보고 있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아주 느리게 입꼬리를 늘였다.

    “좀 더 만져도 되는데.”

    “네?”

    대답 대신 해사하게 웃는 디에고.화르륵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지금 안 보이는 거 아니에요?”

    횡설수설 그의 무릎에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굴자 디에고가 손으로 눈가를 덮더니 소리 내 웃는다.이 자식, 붙어 있어도 내 마음 보고 그러는 거 아니야?!의심이 솟구쳤다.

    억울했고 부끄러웠다.갑자기 두 팔로 나를 꼭 껴안은 그가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아주 신났구나, 너.*슈베른 왕국, 왕세자의 집무실에 한 마리의 새가 도착했다.

    “이거 오랜만인데.”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무료하게 앉아 있던 에녹이 창가로 다가갔다.

    익숙한 듯 새의 다리에서 쪽지를 풀어낸 그가 웃으며 먹이를 건넨다.부지런히 부리로 먹이를 쪼는 새를 흐뭇하게 보던 에녹이 쪽지를 펼쳤다.[윈데이너 영애를 납치한 배가 왕국으로 향하는 중.

    노예 거래 예정으로 보임.

    그 뒤를 대공이 뒤쫓아갔음.]졸린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른하던 왕세자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하, 헛숨을 들이켠 그가 손으로 푸른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납치를 왜 당해?”

    황망히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들어 다시 노려봐도 내용은 그대로였다.

    “둘 다 뭘 하고 있었길래.

    이딴 거지 같은 상황을 만든 거지.”

    짜증과 답답함이 서린 음성이 아무도 없는 집무실 허공에 흩어졌다.비비안 윈데이너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전에 제 처지를 상기하고 멈췄으니까.감히 욕심을 내거나 미련 따위를 품은 적은 없다.그러나 무탈하게, 제가 마음을 줄 뻔한 그 모습 그대로 평안하기를 바랐다.

    “…젠장.

    더럽게 불안하군.”

    [그 뒤를 대공이 뒤쫓아갔음.]문구를 되새긴 에녹의 표정이 침잠했다.

    ‘디에고 브라이트.’

    그 이름과 함께 떠오른 이의 모습을 가만히 그리던 그가 이내 눈을 감았다.한결 차분해진 에녹이 깊은 한숨을 내뱉더니 왕세자로서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제국을 다녀온 뒤로 이제야 좀 뒷수습이 끝나가나 했더니.

    머리가 복잡해진 그가 손으로 제 이마를 문질렀다.한참 정적 속에서 갖가지 상황을 유추해 보던 에녹의 고개가 한숨과 함께 들어 올려진다.

    집무실 밖 시종을 부른 그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왕녀, 집무실로 들라고 전해.”

    명을 수행하기 위해 시종이 자리를 비우자 에녹이 고개를 젖히고 제 미간을 눌렀다.제국에 다녀온 이후, 기대 이상으로 왕국 내 상황을 깔끔히 정리해 둔 클라라.

    그 일로 제 누이를 다시 본 그는 좀 더 왕녀에게 일을 맡기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이렇게 빨리 또 사건 수습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왕국에 남아 이 순간을 기다리던 황태자의 사람과 레사 또한 드디어 움직일 때가 온 것이다.그들 또한 불러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에녹에게 다시금 비비안의 잔상이 떠올랐다.

    “…그 미친 디에고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만.”

    부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상태로 마주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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