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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87화 (87/109)

87화

*두꺼운 줄을 내던지는 묵직한 소음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그와 동시에 비비안과 아이들을 태운 고요한 배 위로 기사들이 날렵하게 몸을 날린다.뒤이어 디에고마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배에 발을 디뎠을 때.

“웬 놈들이냐!”

하나둘 배에 상주하고 있던 사내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거기까지는 식상할 정도로 뻔한 흐름이었으나 가만히 지켜보던 브라이트 가문의 기사단장, 제랄드의 눈썹이 꿈틀댄다.

‘저건 또 무슨 그림이야.’

분명 어딘가에 한데 가둬져 있지 않을까 했던 아이들이 여기저기 자유로이 존재했다.

더불어 두렵고 낯설 이 순간, 아이들이 저마다 사내들의 옷자락을 쥐고 울망울망하고 있는 게 아닌가.거기가 끝이 아니었다.사내들은 어딘가 결연한 눈빛을 하곤 아이들을 등 뒤로 숨기기까지 했다.

“얼씨구,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네.”

미간을 찌푸린 제랄드가 서로 대치 중인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이상하군.’

다시 한번 어처구니없는 풍경을 싹 훑은 그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제 주군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냈다.

“죽이지 말고, 다 포획해.”

그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기사들이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그들을 죄다 제압하기 시작했다.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솜 주먹으로 좀 맞기도 하고, 울분 섞인 원망을 받아내느라 어리둥절하기는 했으나 맡은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짠했다.

“…어떻게 봐도 우리가 악당이네.”

팔짱을 낀 채 일련의 상황을 둘러보던 제랄드가 허탈한 듯 웃었다.그리고 그 아수라장을 지나쳐 배 내부로 들어선 디에고가 빠르게 방들을 열어보았다.

“꺅!”

별안간 살기를 두른 채 나타나는 디에고를 볼 때마다 아이들은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고.탁―그럼 말없이 문을 닫고 다시 다른 방을 열어젖히는 행동을 반복하던 그의 시야에 다급하게 한곳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내가 잡힌다.

“…….”

단숨에 거리를 좁힌 디에고가 다시금 그 문을 열었을 때, 제 눈앞에 넘실대는 분홍 너울을 마주할 수 있었다.또 제멋대로 만든 환상은 아닐까, 눈 한 번을 깜빡이지 못한 그가 집요하게 비비안을 바라봤다.

“찾았다.”

그녀의 몸을 따라 찬찬히 내려간 시선에 걸리는 낯선 이의 손.

그 손이 비비안의 가녀린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너, 너, 뭐야!”

얼마 힘들이지 않고 그 손을 치운 디에고의 싸늘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사내를 일별했다.

“비비안.”

이어 다른 존재는 지워버린 그가 그대로 비비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원래도 작은 얼굴이 더 야윈 것 같아 디에고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그간 고생을 한 것인지, 혹여 험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닌지.그에 반해 여전히 맑은 보랏빛 눈동자를 보고 안심한 그가 눈가를 일그러뜨렸다.자신이 곁에 없던 며칠간 비비안의 하루가 다 고통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은 아닐지, 그의 마음이 가라앉았다.더 가까이서 무사함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에 디에고의 고개가 숙여진다.비비안의 체향을 한껏 들이마시자 그제야 사납게 일렁이던 그의 가슴속이 먹이를 삼키듯 안정을 찾아갔다.*아, 시간이 안 간다.

배에서 지내는 게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는 데다 툭하면 멀미가 일어서 괴로운 나날.오늘도 나는 완연한 어둠이 내리기도 전, 몸을 뉘여본다.

“누나, 아파?”

몽글몽글한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톡, 쳐보는 아이가 귀엽다.

이제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오는 게 제법 친해진 것 같아.

“아니, 안 아파.

그냥 누워 있는 거야.”

사실은 아파.

방금 먹은 저녁이 위장을 때려 부수고 있는 것 같단다.애써 웃어 보였으나 티가 나는지 내 곁을 맴돌던 아이가 조그만 손으로 여기저기를 주물러주었다.

‘천사가 따로 없구나.’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데.

“어?”

아이의 의문 섞인 음성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연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 상체를 들어 귀를 기울이자 잘못 들은 게 아닌 듯했다.밖에 지금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누나……?”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낀 아이가 내게 바짝 붙는다.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였다.

배 안의 인간들과 문제가 없는 한 무슨 일이 생기는 건 불가능하다 안심하고 있었는데.점점 더 소음이 커졌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고함이 커진다.

“누, 누나.”

우리가 있는 방 앞에서 멈춘 발소리.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문을 노려봤다.이윽고 벌컥 열린 문 뒤로 모습을 드러낸 인영에 어깨에 힘이 빠진다.

“야! 어디든 빨리 숨어!”

헝클어진 차림의 노마가 씩씩대며 다가오더니 내 팔을 움켜쥐었다.

“아! 대체 무슨 일인데!”

붙잡힌 팔이 아파 눈살을 찌푸린 그때, 그립고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찾았다.”

고개를 돌려 마저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 내 팔을 잡은 노마의 손 위로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 하나가 얹어진다.

“…너, 너, 뭐야!”

당황과 두려움이 혼재된 표정의 노마가 안간힘을 써 버텨보는 듯했으나 결국 디에고의 악력에 못 이겨 내팽개쳐졌다.

“비비안.”

녹진하고 낮은 목소리가 재차 내 이름을 되뇐다.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그의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날 붙든 디에고가 잘게 떨리는 눈동자로 내 온몸을 샅샅이 훑는 게 느껴진다.

“하아―”

끝내 제 품으로 나를 끌어당긴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마치 물속에 잠겨 있다가 막 수면 위로 올라온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디에고가 숨을 몰아쉬었다.

“…아픈 곳은?”

애끓는 목소리가 안부를 묻는다.

음절마다 눌러진 감정이 너무 진해서 숨이 막혀올 것만 같다.

“…….”

목이 메어 간신히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로 그의 등을 감싸본다.

전해지는 온기가 또 너무 따듯했다.

“아픈 데 없어요…….”

나를 가둔 그의 팔에 부쩍 힘이 들어갔다.더 뭐라 말해야 할지 입을 벙긋대는데 아래서 기척이 느껴졌다.슬쩍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자 눈물 고인 아이의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덕분에 단숨에 정신이 들었다.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던 디에고에게서 눈을 돌리자 새빨간 얼굴로 날 노려보는 노마.

“아.”

지금 여기 눈이 많았다.와, 방금까지 진짜 단둘이 있는 줄 알았네!

“저, 각하?”

“응.”

다시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디에고에게서 웅얼거리는 답이 돌아온다.

“좀 놔주실래요?”

“…….”

얘는 꼭 싫거나 불리하면 침묵하더라.

나도 네가 몹시 반갑고 막 이보다 더 밀착하고 싶고 뭔가 더 너를 가득 느끼고 싶은데!상황이 받쳐주지 않았다.이제야 밖에서 시작된 아이들의 울음이며 갖가지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우선 상황 정리 좀 하고요, 네?”

고개를 든 그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그득하다.

“밖에 같이 가봐요.”

어린애 달래듯 디에고의 손을 꼭 부여잡자 그게 또 마음에 든 것인지 한결 표정이 좋아진다.

“노마! 제레미 챙겨줘.”

넋 놓고 있던 노마가 잔뜩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곧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달고도 꾹 참고 있는 제레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제레미, 형이랑 같이 있어.

금방 올게.”

아이를 안심시키고 고개를 틀자 미묘한 표정의 디에고와 눈이 마주친다.왜, 뭐? 불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의아하게 바라보자 잡은 손을 더 얽어온다.

‘손가락일 뿐인데…….

왜 부끄럽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재빠르게 그보다 앞섰다.진정해라, 나.

지금 그럴 때 아니다.

“가요.”

순순히 날 따라오는 디에고가, 내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걱정했어.”

툭.

오른쪽 어깨에 디에고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의 머리칼이 귓가를 스치는 감각이 간지럽다.

“그대가 무사해서.”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목덜미를 지그시 누르는 숨결에 솜털이 서는 것만 같다.

“다행이야.”

그 아찔하고도 애절한 진심에 홀린 듯 몸을 틀어 디에고를 껴안았다.

“…사실은 무서웠어요.”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추스르지 못한 채 고이 접어둔 공포.내 마음을 보살피기엔 책임지고 싶은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지켜내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내 부재로 고통받고 있을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면 찾아오던 걱정.모두가 잠든 밤이면 그 무거운 상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한 번도 안 울었는데.’

까치발을 들고 그의 목을 휘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엉거주춤 허공에 놓인 디에고의 손이 내 등을 감싼다.언제부턴가 나는 디에고 앞에 섰을 때,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어쩌면 내 자신에게조차 감추려 들었던 감정이 제자리를 찾은 듯 소리를 냈다.

“흑― 안 울려고 했능데…….”

차오른 콧물과 디에고의 몸에 짓눌린 얼굴 덕에 발음이 뭉개졌다.또, 또 이 추한 꼴을 내보이는구나.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가슴팍을 파고들었다.이렇게 또 디에고의 앞섶을 내 분비물로 적시네.언제나와 같이 내 등을 토닥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제 이런 일 없을 거야.”

훌쩍―흘러내리는 콧물 양 좀 줄여보겠다고 내는 소리가 가관이다, 나 정말.

“…한시도 네게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나의 추한 몰골과 다르게 진득하고 농염한 목소리가 흘렀다.갑자기 등골이 좀 서늘한 것 같은데…….뭔가 조금 색이 다른 불안감이 싹텄으나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며칠 만에 되찾은 디에고의 품이 너무 안락했다.

“그만 가봐야 하는데.”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말은 이렇게 내뱉으면서 내 머리는 디에고의 품을 파고들다 못해 뚫어버릴 지경이다.허리에 둘러진 그의 손이 달래듯 쓰다듬는다.

뒤통수를 감싼 손이 내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어 제 존재를 드러냈다.벅찰 정도의 야릇함이 전신을 타고 흘렀으나 우습게도 그 모든 손길에서 절박함이 전해졌다.

나 또한 디에고의 몸을 떨리는 손으로 더듬고 있었으니까.

‘…여기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그렇게 서로의 온기와 체취를 힘껏 머금고 나서야 잔존하던 불안감이 자취를 감췄다.

“기다렸어.

찾으러 와줄 거라고 믿었어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믿음이었다.

디에고가 여지없이 내게 손을 내밀어줄 것이라는.막막한 어둠 속에서 홀로 버티고 있으면, 네가 내게 빛처럼 뻗어오리라는 것을.

“…응.

늦어서 미안해.”

처음 만난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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