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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86화 (86/109)
  • 86화

    *여긴 보육원인가.배 위의 보육원? 햇살이 따사로웠다.

    바다 표면에 부서지는 빛들을 배경으로 배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꺄르르, 꺄르르.

    “언니! 밥 뭐 먹어, 우리?”

    어여쁜 여자아이가 내 팔을 붙들고 고개를 들어 해맑게 웃어 보인다.

    “글쎄.

    가서 펠 아저씨한데 물어봐.”

    내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곤 달려 나가는 아이.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이거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

    고아원에서보다 밝아 보이는 아이들.

    수틀리면 누구 하나 때려잡는 건 일도 아닐 것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저마다 수줍게 웃으며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아이들의 적응력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대성통곡, 오열하던 것이 무색하게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된 것을 직감한 뒤로는 즐겼다.

    “와, 파도 봐!”

    춥지도 않은지 아주 팔팔하구나, 얘들아.이 배의 우두머리를 만나러 갈 때만 해도 죽는 거 아닌가 했는데.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이후, 사내들도 마냥 나를 방치할 수는 없었는지 떨떠름하게 자신들의 우두머리격 되는 자에게 내 존재를 밝혔다.그때만 해도 어딘가 두루뭉술한 사내들과는 달리 무표정한 우두머리를 만나고 얼마나 긴장했던가.

    - …그냥 둬.물끄러미 생기 없는 눈으로 날 보던 그는 툭 한마디를 던지곤 사라졌다.

    “아무 의욕이 없어 보이던데.”

    그리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두머리의 무관심을 환영이라 받아들이기라도 한 걸까.

    분위기가 한결 풀어지더니 지금에 이르렀다.

    “아저씨! 뱅글뱅글!!”

    “어허허, 녀석.”

    덩치가 산만 한 사내가 조그만 아이를 번쩍 들어 눈 돌아가게 원을 그렸다.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연잇는 것을 흐린 눈으로 보는 나.

    “허, 참!”

    황당한 게 나뿐만은 아닌지 어느새 옆을 차지한 적갈색 머리 사내가 헛숨을 들이켰다.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냐?”

    눈을 찌푸리고 내게 묻는 얘가 첫날 내게 까칠하게 굴던 그놈이다.

    “노마, 왜 친한 척이야.”

    “내가 언제 친한 척을 했다고!”

    알고 보니 그냥 바보였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소리치는 꼴이 영락없이 꼬마의 모습이다.

    쯧, 내가 이런 걸 보고 그렇게 겁을 먹었다니.

    수치다, 수치.

    “그럼 뭐, 막 묶어놓고 애들 막 울고.

    그래야 하니?”

    사실 그 모습이 더 상상하기 수월하긴 했다.

    지금 이 납치 보육원의 모습보다야.잔뜩 일그러진 얼굴, 눈동자에 담긴 죄책감을 숨기지 못한 노마가 입을 달싹였다.

    “…그건 아니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빤히 그 옆얼굴을 들여다봤다.

    같이 지낸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알게 된 것.노마는 내 또래였다.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매일같이 뛰노는 아이들이 넘어지지는 않을까, 바다에 빠지지는 않을까 지켜보는 사람.이런 일에 동참할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아, 물론 저기서 방싯대는 아저씨들도 그렇긴 하지만.

    “왜 이런 일을 해?”

    내 물음에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춘다.

    진지한 얼굴로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었다.

    “이런… 이런 일인 줄 몰랐어.”

    “몰랐다고?”

    “…며칠 물건을 나르기만 하면 큰돈을 준다길래.”

    제국민을 왕국에 노예로 팔기 위해 이송하는 걸 저렇게 표현해?!

    “왜 너만 몰라.

    저 아저씨들은 알고도 했다던데.”

    저렇게 지금은 아이들과 웃고 있지만, 대다수가 고아원 아이들을 왕국에 팔아넘기려는 수작인 걸 알고도 이 배에 올라탔단다.가족이 아파서, 돈이 필요해서…….핑계에 불과하지만, 막상 일을 받아들일 때만 해도 실감이 안 났던 거지.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어떤 죄를 짓는 것인지.어마어마한 금액의 숫자가 눈을 가렸으리라.

    “정말 몰랐어.

    이렇게 이런 일로 돈을 벌러 나온 건 처음이라.”

    찌푸려진 노마의 미간이 보였다.

    구르고 구른 아저씨들은 대충 금액과 설명을 보고 짐작했겠지.

    “그래, 그럼 이 배에서 내리고 난 다음엔 착하게 살아라.”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우선 이 일부터 수습하고…….”

    라고 작게 덧붙이는데, 아주 자책과 죄책감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담담히 내뱉는 내 말에 그가 의문을 표했다.

    나는 그런 노마를 보며 처연히 눈을 내리깔았다.다시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을 눈에 담는다.너희는 다 무사하겠지…….

    문제는 나다.

    지금쯤 얼마나 난리가 났을까.

    내게 관심 없는 이 배 안의 인간들보다 더 무서운 건 자칭 나를 아끼는 자들이다.디에고가 괜찮을까 모르겠네.아버지는 또 어떻고.

    마리, 내 시녀 그만둔다고 하는 거 아닐까.

    황태자도, 황궁도 알았겠지? 스텔라의 지긋지긋하다는 표정도 떠오른다.독을 마신 이후, 알았다.내가 사고를 치면.

    아니, 엄밀히 말해 내가 벌이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무언가에 휘말리면 주변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걱정을 끼치는 것도 죄지 싶을 정도로 모두가 힘들어했음을.

    “하아.”

    이마를 짚고 절로 나오는 한숨을 쉬며 울상을 짓자 노마가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살핀다.

    “괜찮아? 또 멀미해?”

    나는 손을 저었다.

    “…안 괜찮지만, 괜찮아.”

    이건 마치 지금 디에고가 무척 보고 싶지만, 막상 보는 것이 두려운 그런 마음과 같았다.

    걱정, 많이 하겠지.또 한껏 상해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라도 디에고가 납치당하면 울고불고 난리, 그런 난리가 없을 게 뻔한데.

    ‘정말 미안해요, 각하.’

    *황궁을 나서는 디에고 앞에 제랄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비비안이 타고 있는 배를 쫓는다.”

    이미 레사와 콘라드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어느 정도 파악한 제랄드가 답했다.

    “지금 배를 준비하러 보냈으니, 곧장 가시면 됩니다.”

    제랄드는 알았다.

    취합한 정보를 나누던 레사의 사람이 왕국으로 떠날 마차와 말을 준비한다 했을 때, 그와 콘라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목적지는 왕국이 아니었다.제 주군이라면, 지금 당장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가 있는 곳에 도달하려 할 터였다.분명 하늘에 해가 떠 있음에도 디에고의 주변에 빛이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긴 제랄드가 제 주군의 뒤를 따랐다.파도 소리가 바람에 실려 퍼지는 커다란 배 앞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한 무리의 브라이트 가문 기사들이 도열하고 있었다.그 검은 무리 옆으로 이질적인 백색, 황태자의 기사 넷을 확인한 디에고가 무심히 걸음을 옮긴다.

    “최대한 빠르게 간다.”

    디에고의 한마디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배 안에 자리한 방에 들어선 디에고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 콘라드가 각하께 보낸 전갈입니다.툭 떨구고 있던 손 안에 쥔 쪽지.

    천천히 그 내용을 살피던 디에고가 이내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끔 종이를 움켜쥐었다.

    “…눈앞에 두고 당했군.”

    그가 불도 밝히지 않아 어두운 방 안에서 분노를 억눌렀다.

    비비안의 납치를 도모한 자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무엇보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것이 주였다.

    “주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연인의 납치 소식을 알게 된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제 주군의 모습은 처참했다.

    ‘가다가 지레 병나는 것은 아닐까…….’

    어둠이 깃든 디에고의 얼굴을 힐긋 보던 제랄드가 상황을 보고했다.

    “조금 위험할 수 있으나 밤낮 가리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항해하는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상관이 저 지경이니 알아서 눈치껏 처신해야 할 때라 판단한 제랄드의 계획이었다.

    이것도 평소 워낙 합리적이고 관대하게 기사들을 대해줬던 주군이었기에 가능했다.

    - 뭐? 주군의 연인이 납치?

    - 어떤 새끼들이 감히.간단히 전해 들은 것만으로 분개한 기사들이 제 일처럼 앞서 열의를 불태운 덕에 수월하게 과중한 임무를 떠넘긴 제랄드.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디에고를 한참 바라보던 그가 머뭇댔다.

    ‘뭔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살면서 주군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난감하게 미간을 좁힌 그가 간신히 입을 떼어본다.

    “저, 영애는 괜찮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그분은 타고난 운이 있으세요.”

    디에고의 비웃음과 함께 거대한 침묵이 제랄드를 내리눌렀다.

    ‘…운이 좋아서 독을 먹고 납치를 당하겠나.’

    제기랄,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텐데.

    차라리 입 다물 것을.

    질끈 눈을 감았다 뜬 제랄드가 후회의 늪을 헤매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당분간 함부로 입을 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그가 터덜터덜 배 위를 배회했다.

    “단장, 주군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걱정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에게 제랄드는 해줄 말이 없었다.

    제가 보기에도 안 괜찮아 보였으니까.하루가 다르게 상하는 얼굴과 주변을 모두 삼켜버린 듯 디에고를 감싼 공기만 지나치게 달라져갔다.

    “…안 괜찮으신 것 같으니까.

    그냥 빨리 따라잡을 생각이나 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우수한 기사들 덕일까, 얼마 안 가 그들의 시야에 배 한 척이 걸렸다.

    “하아, 드디어.”

    제랄드가 탄식했다.어떻게 봐도 자신들이 찾는 그 배임을 직감한 기사들이 하나둘 몸을 풀었다.

    그간 디에고의 슬픔과 분노에 동화라도 된 듯 그들 또한 억눌린 무언가가 가슴에 가득했다.

    “준비들 해.

    주군께 알리고 올 테니.”

    노을마저 바다 아래로 가라앉을 것 같은 시각, 디에고가 제 눈에 걸려 있는 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손을 뻗으면 그대로 비비안에게 닿을 수 있을 만큼, 한시라도 빨리 배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삐딱하게 고개를 튼 그의 얼굴에 전에 없던 퇴폐가 깃들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동안 한없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디에고에게 남은 것은 질척이는 감정들뿐이었다.

    ‘…부디.’

    이미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실감하던 디에고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그의 뒤로 자리한 브라이트 기사단, 그들의 눈이 사냥감을 마주한 때처럼 번들거린다.이윽고 해가 온전히 그 빛을 지우자 디에고의 서늘한 음성이 고요한 바다에 떨어졌다.

    “되찾으러 간다.”

    그와 동시에 거침없는 검은 짐승들이 비비안이 타고 있는 배로 뛰어들었다.이 배 건너 비비안을 마주했을 때, 그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비비안 윈데이너는 무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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