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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85화 (85/109)

85화

*황태자궁 응접실, 숨소리마저 내기 힘든 긴장감이 가득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태자의 싸늘한 음성이 재차 되묻는다.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의 행방이 묘연하다 말씀드렸습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디에고가 전해온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던 리안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대공.”

한 치의 장난기도 담기지 않은, 오히려 초조함과 화를 억누르고 있는 디에고의 눈동자를 확인한 황태자의 얼굴이 굳었다.

“한시도 혼자 두지 않았습니다.”

그랬다.

자신이 붙인 호위는 물론이거니와 브라이트가의 호위도 둘이나 붙지 않았던가.그들을 두고 비비안을 빼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안일했나 봅니다.”

디에고의 냉기 어린 조소가 스스로를 향했다.

조금 더 신중해야 했다.

비비안이 독에 당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거늘.아직도 이리 허술하게 그녀를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사실이 디에고를 할퀴었다.

“비비안이 잠시 외출했다거나.”

리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알았으나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또 어떤 식으로 비비안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을지.

“…….”

디에고가 말아쥔 주먹에 힘을 주며 으득,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어디로든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손에 아무것도 쥔 것이 없었다.아주 조금의 시간, 그사이에 콘라드와 제랄드 그리고 레사가 무언가 찾아올 동안 저는 황궁에 통보를 하러 온 것이다.디에고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제가 그 무엇을 하건 용인해 주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그는 비비안이 독을 먹고 쓰러져 있는 동안 자신이 그녀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생생히 느꼈었다.

‘두 번은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건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감히 제 목숨을 희롱하는 자에게 베풀 자비 따윈 없었다.그런 디에고와 눈을 맞추고 있던 리안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비쳤다.

비비안의 일이라면 제가 가장 앞장서서 모든 것을 지휘했었는데.이제 자신은 한 발짝 뒤에서 지원하는 것, 그 이상 발을 내디딜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달은 터였다.

“…그리하시지요.”

디에고의 의견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감정을 가진 황태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 순간, 지금 막 응접실 앞에 당도한 이의 방문을 시종이 알려왔다.

“전하, 마이어 백작 영애 들었습니다.”

그에 주저 없이 황태자가 들여보내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어 문이 열리고 굽이치는 붉은 머리가 주인의 빠른 걸음에 의해 허공에 흩날린다.

“전하, 각하.”

차분한 어조였으나 그 안에 담긴 다급함이 채 감춰지지는 않았다.

간결하게 인사를 마친 스텔라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불찰입니다.”

탐스러운 제 입술을 이로 잘근 깨문 그녀가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간다.

“한스 자작이 오늘 새벽 배를 하나 취한 것 같습니다.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닌지라 놓쳤던 것 같아요.”

스텔라의 고운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한 지 꽤 오래였다.

단 하나도 놓친 것이 없다 여겼는데.

“혹시 몰라 영애가 들렀던 고아원 아이들의 수를 세어보니 전과 다르게 꽤 많이 비더군요.”

노예 경매를 일삼던 이들이었다.

평소와 달랐던 비비안의 하루에 가장 큰 변수였던 고아원.하필 그녀의 부재와 함께 이루어진 한스 자작의 움직임.

“…그 배에 지금, 비비안이 있을 거라는 건가.”

낮게 읊조린 디에고에게 시선을 둔 스텔라가 한숨을 삼켰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눈빛, 달려들 곳을 명확히 하기 위해 몸을 낮춘 짐승이 따로 없었다.황태자에게 고개를 돌린 그녀가 말을 올렸다.

“우선 황궁에 남은 왕국의 사신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배는 떠났다.

어떤 연유로 그 배에 올라탔을지 모르나 그곳에 비비안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들이 왕국에 도착하면 전하와 레사가 만든 상단에 접촉할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황태자가 곁에 선 시종에게 왕국의 사신을 불러들이라 명했다.각자 생각에 잠겨 어떤 방도를 낼지 정적이 흐르던 중, 슈베른 왕국 왕세자의 최측근, 아론이 응접실로 들어섰다.왕세자의 일부 권한을 대리해 제국에 남은 그.다년간의 수하 생활로 다져진 눈치가 그에게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소파에 앉기 위해 무릎을 채 다 굽히지도 못했건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간략히 말씀드리죠.

지금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와 제국민을 태운 배가 왕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백작 영애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거론된 이름에서부터 불길함이 일었다.

“…….”

“또다시 노예 경매를 하고자 그들이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아연실색한 아론이 벌어진 입을 수습하기도 전, 미동 없던 디에고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보겠습니다.”

미련 없이 뒤돌아 나가려는 디에고를 황태자가 붙잡았다.

“어디 가십니까.”

고개를 튼 디에고의 눈에 들어찬 노기가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목을 틀어쥘 듯 섬뜩했다.

“…목에 칼이 드리웠는데, 제가 어찌해야겠습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 나머지 세 사람은 제각기 디에고의 행동을 점쳐보기 시작했다.

생각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귀결된 것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얼굴에 드러났다.

“이미 늦었습니다.

왕국으로 가 그곳에서 영애를 찾는 것이 더 빠를 거예요.”

스텔라의 발언에 왕국의 입장에서 일을 고민하던 아론이 말을 덧붙인다.

“예.

왕국이 각하를 도울 것입니다.”

합리적인 백작 영애는 그렇다 치고, 왕국의 아론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눈에 선하던 디에고가 헛웃음을 지었다.

“여태 너무 순하게 굴었나 싶게, 토를 다는 자들이 많군.”

그런 그를 말없이 지켜보던 황태자는 알았다.

지금 대공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말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다만.’

끝내 디에고가 응접실의 문 앞에 도달하곤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리안과 시선을 교환한 그가 그들을 뒤로하고 비비안에게 향했다.*흔들리는 배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거였나.약물에 취해 누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자 뱃멀미가 찾아왔다.

‘와, 이러다 육지에 발 딛기 전에 죽는 거 아니야?’

“웩― 우웨웽―”

“아이고, 뭔 멀미를 이렇게 하나.”

배에 걸쳐져 넘실대는 파도에 나의 일부를 흘려보내고 있자 어느새 다가와 내 등을 두드리는 아저씨.

- 정말이잖아! 깨어났어!

- 어쩌지, 우선 알려?맨 처음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내가 뛰쳐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루루 몰려왔던 이들.하나같이 험상궂고 거친 인상과 다르게 나 하나를 어쩌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아 오히려 안심한 것도 잠시.이윽고 별안간 토악질을 하는 바람에 모든 상황을 뒤로하고 내 뱃멀미가 화두에 올랐다.

“저렇게 약해서야.

잘 붙잡고 있어! 바다에 빠질라!”

뒤에서 소리치는 것과 함께 내 몸을 붙든 우악스러운 손에 힘이 가해진다.

‘아니, 이러기 있어? 독에 이어서 토하다 죽는 거 아니야, 나?’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인 것인지 옆에서 혀 차는 소리가 돌아온다.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토하다 죽는 걸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이라니.

‘엄연히 납치인데.

비명횡사를 걱정할 분위기는 아닌 걸 감사히 여겨야 하나.’

내게 위험한 것은 저 사내들도 아니요.

칼도 아니요.

지금 이 배 자체였다.탁― 타악―

“사― 살살 좀 두드려여~”

저 딴에는 힘을 안 준 것인지 당황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내 등을 두드렸다.

그제 먹은 것까지 다 게워낸 듯 텅 빈 위장의 느낌이 공허하다.

“후우―”

스르륵 벽면에 기댄 채 주저앉자 흥미 가득한 눈길들이 따라붙는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 면면을 살펴보았다.

“…자.

이제 우리, 대화를 좀 해볼까요.”

인상을 찌푸리는 자부터 스리슬쩍 자리를 피하는 사람까지.

반응은 다양했으나 내게 이렇다 할 반감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이는 없었다.그리고 그들은 오래 합을 맞춰왔다고 보기엔 어딘지 어설펐다.

게다가 행색, 말투 그리고 행동 지침까지 뭐 하나 통일된 구석이 없어 보였고.연신 토하면서도 활짝 열어놓은 귀가 채집한 대화로 보건대.

“보아하니 여러분, 원래 같이 일하시는 분들 아니죠.

이 건 하나 하러 여기까지 오신 것 같은데.”

놀라는 얼굴, 다 봤어.

당황하는 것도 다 보았고.그렇게 훑어 내려가는데 그나마 무게 있어 보이는 적갈색 머리를 가진 사내의 표정에 짜증이 서린 것이 포착됐다.

‘쟨 좀 무서운데.’

나이는 많아 보이지 않았으나 성격이 더러워 보였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있어.”

으르렁대듯 까칠한 말을 내뱉는 사내의 기운에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그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눈빛들이 보이자 괜스레 서러워진다.가뜩이나 안 좋은 몸 상태 덕에 사고가 신통치 못했다.

“…내가 또 뭘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다고.”

작게 투덜대자 등을 두드려 주던 아저씨가 내 어깨를 토닥인다.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세워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나보다 더 불안에 떨고 있겠지.

“우와왕―”

“어, 엄마~”

역시나 감정이 전이돼 물에 잉크가 번지듯 울음이 퍼진 방은 내가 토하러 갈 때와는 또 다르게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

이걸 어쩐다.

달랜다고 달래지려나.멍하니 방 안을 둘러보자 이 안에서도 반응이 여러 갈래로 갈렸다.

하염없이 목 놓아 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구석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이도 있고.체념한 듯 멍한 시선을 두른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도 있었다.어느덧 나를 발견한 아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여들었다.

“귀, 귀족 언니다.”

아이가 속삭인다고 작은 손 모아서 말하는 게 보였으나 소리가 좀 컸다.그래, 그 귀족 언니란다.나는 빙긋 웃었다.사실 언니도 너희랑 별반 다를 거 없는 처지인데, 지금.

나도 눈 떠보니 여기였거든? 앞이 참 막막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착잡하단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언니, 누나라고 부르렴.”

호칭부터 친근하게 가보기로 한다.

“어, 언니?”

“…누나?”

동요한 나머지 울음소리가 한껏 잦아들었다.

서로를 두리번거리며 자그마한 입을 달싹이는 아이들을 보자 없던 책임감이 마구 솟아난다.

“우리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렴.”

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간신히 걸쳐보았으나 그것도 잠시, 입꼬리의 부들거림과 함께 식은땀이 흘렀다.

“우욱―”

틀렸다.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으나 멈췄던 울렁거림이 여지없이 찾아와 준 덕분에 그대로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사히, 갈 수 있나……?’

눈꼬리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또륵,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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