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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84화 (84/109)
  • 84화

    *대공저의 고요한 아침, 콘라드가 간만에 되찾은 여유를 만끽하며 집무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쾅―그것도 잠시, 벌컥 문이 열리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들어서는 디에고의 모습에 콘라드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아침 일찍 후작가로 향하는 제 상관의 모습을 확인한 뒤라 밤이 되고서야 돌아오리라 여겼는데.

    “각하, 윈데이너 후작가 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제랄드, 수도에 있지.”

    제랄드, 브라이트 대공가의 유일무이한 기사단장.

    “예, 이틀 전에 수도에 도착한 이후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디에고가 수도에 머무는 만큼 대공령의 집무는 콘라드가, 영지 내 치안 및 관리는 기사단장인 제랄드가 맡고 있었다.그 둘이 수도와 대공령을 왔다 갔다 한 지도 이미 수개월.

    워낙 자유로운 제랄드는 수도에 도착해 디에고에게 업무 보고를 마치면 사라지곤 했다.

    “들어오라고 해.”

    심상치 않은 디에고의 표정에 콘라드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밖 기사에게 명했다.

    “각하께서 기사단장 찾으신다고 전해.”

    기사의 다급한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뒤로하고 그가 제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콘라드, 기사들 소집해서 비비안 흔적 쫓도록 해.”

    “영애의 흔적이요?”

    디에고 주변으로 수십 개의 칼날이 솟아난 듯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이 퍼져 나갔다.

    “비비안이 사라졌어.”

    콘라드의 입이 망연히 벌어졌다.

    “여, 영애가…….”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잠시도 행방이 묘연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비비안 윈데이너는.콘라드의 동공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오랜 보좌관 생활 동안 이런 위험 상황은 접해본 적도, 차마 상정해 본 적도 없었던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황궁으로 간다.”

    채비를 마친 디에고가 거침없이 집무실 밖으로 향하는 것에 마른침을 삼킨 콘라드가 말을 이었다.

    “저는 저택에 남아 정리한 후 윈데이너 후작가로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디에고가 빠른 속도로 대공저를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던 콘라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리 났군.”

    어느새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을 훔친 콘라드가 눈을 감았다.

    ‘찾아야 한다.’

    정적 속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눈을 떴다.

    그 안에 다시금 되찾은 차분함과 집요함이 서려 있다.쾅―느른하게 풀린 제랄드가 집무실 안에 디에고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콘라드에게 한껏 귀찮음을 표하려던 그가 방 안의 오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자세를 바로 했다.그리고 그의 시야에 한 사내가 걸린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주군의 명에 따라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의 곁에 항시 붙어 있어야 할 기사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주군께서 단장님께 상황을 면밀히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상황? 무슨 상황?”

    무언가 낌새가 좋지 않음을 알아챈 제랄드의 시선이 콘라드에게 향했다.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가 사라졌다.”

    손을 들어 제 이마를 긁은 제랄드가 감은 눈을 찡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라져?”

    그럴 리 없었다.

    자그마치 정예 기사를 둘이나 붙여놓았다.

    게다가 자신들보다 먼저 영애에게 붙어 있던 황태자의 그림자마저 있지 않은가.평화롭기 그지없는 영애의 삶을 비춰보면 어쩌면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과보호였다.

    “각하께선 황궁으로 가셨다.

    기사들을 소집해 영애의 흔적을 쫓고, 대기하라 하셨어.”

    제랄드의 싸늘한 눈이 제 앞에 선 기사에게 향한다.

    “말해.

    뭐 했냐, 너.”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영애를 놓친 것도 문제였으나 무엇보다 상황을 알아챈 지금,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더욱 그의 목을 조여왔다.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제랄드가 한숨을 쉬더니 누그러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상황 보고나 해.”

    그제야 살며시 고개를 든 기사가 최대한 침착하게 전날 비비안 윈데이너의 일거수일투족을 나열했다.저택을 나서 고아원을 향했던 것.

    그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낸 것.그리고 몸이 안 좋아 먼저 후작가로 돌아간 것까지.그 어디에도 구멍이 없었기에 허탈했다.

    “…고아원부터 털어보지.”

    제랄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콘라드가 때마침 들어서는 레사의 사람을 바라봤다.

    “찾으셨다고.”

    승마복과 암살복의 중간쯤 될까.

    레몬색 머리칼을 하나로 높이 묶은 여인이 꼿꼿하게 선 채 콘라드와 마주했다.

    “예.

    극진히 반겨 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군요, 사라.”

    “그런 것 같더군요.

    공주님이 사라지셨다고.”

    그녀의 붉은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오는 동안 다 파악하신 것 같으니 빨리 움직이도록 하죠.”

    그런 두 사람을 무감하게 바라보고 있는 제랄드와 눈을 맞춘 콘라드가 입을 떼었다.

    “나는 레사와 윈데이너 후작가를 살펴보지.”

    좀처럼 여유를 잃지 않던 제랄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주군과 맞닥뜨리기 전에 뭐라도 찾아놔야겠네.”

    이윽고 윈데이너 후작가에 도착한 사라와 콘라드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영애를 보고 있는 눈이 그리 많은데, 어떻게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후작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주고받았음에도 결국 그 무엇도 특정 짓지 못한 채였다.

    “그것도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레사에서 비비안 윈데이너를 칭하는 호칭은 두 개였다.

    ‘고객님, 그리고 공주.’

    오랜 세월 레사에게 의뢰를 맡기던 고객.

    같은 건으로 수 곳에 의뢰하는 데다 호쾌한 지불로 유명했다.자신은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각기 다른 조직의 것을 취합하여 정보의 질과 신뢰성을 높인 것이라 여겼을 비비안 윈데이너.하나 결국 단 한 곳, 레사에서 찢어 나눈 정보들이라는 걸 조직원들은 모두 알았다.오죽했으면 그런 그녀의 뿌듯해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는 이들마저 생겨났을 정도였다.

    덕분에 비비안 윈데이너의 의뢰가 들어오면 모두가 발 벗고 최선을 다하는 지경까지 갔었다.

    뭐라도 하나 더 주자 싶어서…….

    “겁도 없지.”

    그리고 지금은 제국의 큰 줄기들이 애지중지하는 공주님,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고귀한 존재.그게 비비안 윈데이너였다.

    “지금부터, 알아내야죠.”

    그러니 지금 상황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짓씹듯 내뱉은 콘라드가 성큼성큼 후작가로 들어섰다.그리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넋이 나간 마리였다.

    “아가씨 방에서 발견한 거예요.”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꼭 쥐고 있던 것, 그것은 침대 밑에 있던 가발이었다.그 분홍빛 머리칼을 빤히 보던 콘라드가 눈을 찌푸렸다.

    “…누군가 영애의 흉내라도 냈다는 건가?”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답하려던 마리.

    하지만 입을 떼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단 생각에 다급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택을 빠져나간 사람은 없습니까.”

    사라의 물음에 고심하듯 마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가씨가 안 계신 걸 확인한 이후엔 아무도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기사들의 통제하에 윈데이너 저택은 봉쇄되었다.

    “그렇군요.

    어제 동행했던 영애들을 좀 만나뵙고 싶은데.”

    비비안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영애들은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얼마 안 가 자신들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고 있을 따름이었지만.마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영애들이 있는 응접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한 분은 아침 일찍 볼일이 있으시다고 외출하셨다고 들었어요.”

    “외출이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를 보며 사라가 생각에 잠겼다.

    “그분도 어제 윈데이너 영애와 함께 고아원에 갔었나요?”

    “예, 그런데 고아원에서는 한참 자리를 비우시다 따로 돌아오셨다는 것 같아요.”

    수상했다.

    사건의 앞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꽤 오랜 세월 수많은 정보를 캐내 왔던 사라의 감이 예민하게 발동했다.곧이어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걱정이 가득한 두 영애를 마주한 사라에게서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영애의 이름이 어떻게 되죠?”

    그 물음에 의아한 듯 돌아본 마리.

    “앤 라야 자작 영애요.”

    뒤이어 이 자리에 없는 여인의 이름이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로브를 머리까지 깊게 눌러쓴 라야 자작 영애가 떠오른 아침 해를 한 번 보고 잰걸음을 옮긴다.

    ‘그가 마차를 준비해 두었다고 했어.’

    약속한 장소에 다다르자 작은 마차 한 대가 보였다.

    단번에 얼굴을 밝힌 그녀가 빠르게 마차로 달려갔다.

    “라야 자작 영애십니까.”

    마부석에 앉은 사내가 퉁명하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사내가 마차에 오르라는 듯 턱짓을 하자 자작 영애가 인상을 찌푸린다.그러나 그보다 급한 볼일이 있던 그녀는 사내를 무시한 채 마차의 문을 열었다.

    “…….”

    마차 내부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기대했던 이가 보이지 않자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남작님은…….”

    “일이 있으셔서 나중에 찾아뵙겠다, 그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그녀가 마차 안에 자리했다.

    ‘금방 나를 보러오실 거야.’

    남작의 바람대로 자신이 맡은 일을 잘 처리했다는 안도감에 방금까지 치밀어 오르던 불안과 죄책감이 사그라들었다.한시름 놓은 그녀가 로브를 벗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멀거니 보던 그녀의 눈이 별안간 커진다.

    “머리 장식!”

    선물 받은 이후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던 귀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제, 오늘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를 흉내 내느라 후작가, 자신이 머무는 방에 고이 모셔두었던 건데.저택을 빠져나오기 전에 챙기려고 했으나 판델 남작 영애를 만나는 바람에 잊어버린 터였다.

    “어쩌지…….”

    지금 다시 머리 장식을 챙기기 위해 후작가로 돌아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그녀가 제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했다.

    분명 앞으로 얼마든지 그 이상의 것들을 남작이 선물해 주리라.

    그러니 지금은 마차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모르더라도 얌전히 따라가는 것이 좋겠지.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음을 알면서도.

    ‘처음, 처음이었어.

    그가 내게 선물을 한 것도.

    온전히 내 것이었던 물건도.’

    “잠깐이면 돼.”

    도저히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그녀가 마부를 불러 세웠다.

    “윈데이너 후작가로 가지.

    놓고 온 물건이 있어.”

    초조함이 깃든 자신의 말에 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가 재차 마부를 종용했다.

    “…알겠습니다.”

    마부의 답을 듣자 다시금 두려움이 밀려든 자작 영애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괜찮아.

    난 단지 놓고 간 게 있어서 다시 돌아가는 거야.’

    얼마 안 가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후작가로 돌아온 그녀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떨리는 음성이 자작 영애가 지금 얼마나 불안정한지 대변해 줬다.

    몇 번이고 침을 삼키며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그런 영애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마부의 눈에 미약한 동정이 스친다.

    “어리석기는.”

    낮게 읊조린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힐긋 보더니 이내 천천히 마차를 이끌고 그곳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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