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비비안을 되찾은 디에고 】
후작가, 가장 해가 잘 드는 곳에 위치한 비비안 윈데이너의 방.깜깜하던 방 안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스미기 시작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라야 자작 영애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이제 나가야 해.”
밤새 상념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낸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다.비틀대며 문으로 향하던 자작 영애가 멈칫한다.
“로, 로브.”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더듬더듬 바닥을 훑던 손이 천 자락을 쥐었다.
그대로 집어 드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린다.
“후우―”
로브를 뒤집어쓴 자작 영애가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간신히 문손잡이 위에 손을 얹었지만, 쉬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두려웠다.
‘…들킬지도 몰라.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분홍 가발은 벗어 침대 밑에 쑤셔 넣은 지 오래였다.
이 문, 이곳만 아무도 모르게 벗어나면 그때부턴 라야 자작 영애로서 후작가를 나가면 되었다.문 가까이 귀를 댄 그녀가 바깥 소음을 살폈다.고요함을 곱씹던 자작 영애가 눈을 질끈 감고 살며시 문을 연다.
“…….”
살짝 고개만 내밀고 둘러보았지만, 아직 해가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른 시각이라서인지 복도엔 정적만이 흘렀다.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돌덩이가 매인 듯 무거운 발을 내디뎠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자신을 채찍질하듯 작게 읊조린 자작 영애가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잔뜩 움츠린 채 거의 끌다시피 옮기던 걸음걸이가 어느새 뛰듯이 빨라진다.비비안 윈데이너가 상주하는 저택의 층을 벗어나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게 느껴졌다.툭―턱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복도 카펫을 짙게 물들였다.
‘됐어.
아무도 못 봤어.’
지금부턴 라야 자작 영애의 신분으로 충분했다.
자신은 어제 늦게 후작가로 돌아와 피곤한 나머지 바로 잠자리에 든 것이다.그리고 새벽같이 볼일이 있어 저택을 나갈 예정인 거고.잔뜩 수그렸던 상체를 편 그녀가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그렇게 한 발짝 더 앞으로 내미는데.
“영애?”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제 목을 조여오는 듯해 입술을 짓씹은 자작 영애가 주먹을 말아쥐었다.느리게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인 판델 남작 영애가 서 있다.
“…지금 들어오시는 건가요?”
조심스레 자신을 살피며 바라보는 남작 영애를 보며 그녀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뇨.
지금 나가 보려던 참이에요.”
“아, 지금요?”
“예, 어제는 제가 중간에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평소보다 말이 빠르게 나갔음에도 자작 영애는 그 사실을 자각할 여유조차 없었다.자신과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로브 자락을 말아쥔 손마저 경직된 모습에 판델 남작 영애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이상한데…….’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자작 영애를 꼼꼼히 살피던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으나 이내 미소를 띤다.
“아니에요.
그저 안 보이셔서 걱정했을 뿐이랍니다.
그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디를…….”
남작 영애가 평소라면 묻지 않았을 것을 묻는다.
그만큼 지금의 그녀는 수상했다.
“아, 잠시.
그것이, 연인을 만나러.”
초조함과 불안함을 못 이겨 고개를 푹 숙인 자작 영애의 모습을 부끄러움에 의한 것이라 착각한 남작 영애가 그제야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그러셨군요.
제가 괜한 걸 여쭤봤네요.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영애.”
남작 영애가 생각한 자작 영애는 이랬다.
수줍음이 많고 비밀이 많으며, 무엇보다 그 연인이라는 자에 관련해서 맹목적인 사람, 그게 눈앞의 여인이라고.
‘어제도 연인을 만나고 온 것이 분명한데, 그리도 좋을까.’
지금껏 의문을 갖게 하던 자작 영애의 행동들이 더는 남작 영애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예, 그럼 저는 이만.”
황급히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던 남작 영애가 미련 없이 뒤돌아 제 방으로 향했다.*아침 새소리가 한바탕 합창을 하고도 한참 지난 시각, 그제야 잠에서 깬 마리가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친 게 분명해.”
기억이 없었다.
제가 언제 잠이 든 것인지 전혀.
“어떻게 아가씨 돌아오신 걸 안 보고 잘 수가 있어?”
길다면 길었던 지난 시녀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자신이 아가씨의 잠자리를 챙기지 않고 먼저 잠이 든 것은.급하게 제 모습을 정돈한 마리가 방을 나섰다.때마침 복도를 지나던 하녀 로아를 발견한 그녀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로아! 어제 아가씨 오셨으면 날 좀 깨우지.
왜 아무도 날 안 깨운 거야?”
애초에 이른 시간에 잠든 것 자체부터 믿을 수 없었지만, 혹여 그렇다 치더라도 누군가 자신을 깨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 마리가 인상을 찌푸렸다.이에 황당하다는 표정의 로아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제가 어제 열 번도 넘게 깨웠는데, 전혀 깰 기미가 없으셨다고요.”
마리의 눈과 입이 동시에 커졌다.
“말도 안 돼!”
“예, 저도 그랬어요.
그렇게까지 했는데 안 일어나시다니.
아무튼 아가씨께선 피곤하다고 바로 방으로 가시고 사용인들은 다 물리셨어요.”
“피곤?!”
비비안이 이번에도 무리해서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난 마리가 빠르게 그녀의 방으로 내달렸다.
“아가씨! 저 들어가요!”
씩씩하게 소리친 마리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방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가며 방 안 이곳저곳을 확인했지만 비비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내 침대 가로 향했다.
“아가씨?”
텅 빈 침대를 확인한 마리가 침대 위를 제 손으로 쓸었다.
‘온기가 없어…….’
그대로 굳어버린 그녀가 눈만 끔벅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든다.
“내가 너무 늦게 왔어.
어디 가셨나.”
햇빛만으로 방이 환한 것을 인지한 마리가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채 비비안을 찾아 나섰다.아가씨는 배려심도 많고, 사용인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니까.
분명 늦잠 자는 자신을 굳이 깨우기보다 기다렸을 거였다.그러다 지루해져 정원 산책을 나갔을 수도 있고.꼬르륵거리는 배를 잡고 식당을 찾아갔을지도 모르지.그렇게 비비안을 찾던 마리는 어느새 저택을 뛰어다녔다.
“대체 아가씨, 어디 가신 거예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울상을 지은 마리가 온 저택을 뒤졌으나 제 주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마리! 마침 잘 만났어요.
영애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데.”
그리고 그때 정원 산책을 나온 판델 남작 영애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마리를 붙잡았다.
“…어? 무슨 일 있어요?”
이마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을 정도로 땀을 흘린 마리, 그녀를 마주한 남작 영애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들어찼다.
“영애! 어제 아가씨랑 같이 저택으로 돌아오신 것 맞죠?”
꼭 그랬어야만 했다.
“아뇨.
저희보다 윈데이너 영애가 먼저 저택에 돌아왔는데…….”
“아가씨 혼자요? 정말인가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판델 남작 영애가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고아원에서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가 먼저 돌아간다고 한 것은 맞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뒤늦게 저택에 돌아왔을 때도 후작 영애는 방에서 쉬고 있다 들었고.하나 고아원 이후로 자신은 윈데이너 영애를 본 적이 없었다.
“예, 어제 몸이 좋지 않으시다 하여 저택에 와서도 영애를 보지는 못했어요.”
입술을 말아 문 마리의 턱이 덜덜 떨려왔다.
“왜요? 후작 영애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없어요.
아가씨가, 어디에도 안 계세요.”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정신을 잃은 채로 저택으로 들어오던 비비안의 파리한 모습이 자꾸 머릿속에 반복되는 탓에 마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선 저는 집사님과 기사님들께 알릴게요.”
판델 남작 영애의 단호한 음성에 마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다시 아가씨 방에 가볼게요.”
서로의 불안을 고스란히 느끼던 두 사람이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옮겼다.다시금 비비안의 방 앞에 멈춰 선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이 문을 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가 저를 맞아주기를.
‘어디 갔었어, 마리!’
그 고운 얼굴로 제게 핀잔을 주면서도 방싯 웃는 비비안이 환영과 환청으로 마리를 찾아왔다.꾹 눈을 감았다 뜨자 텅 빈 방만이 그녀를 맞이한다.
왈칵 일그러진 마리의 얼굴 위로 겁에 질린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아, 아가씨.”
불안했다.달칵―주저앉아 울던 그녀가 별안간 들려온 소리에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발코니 창을 열고 걸어오는 한 사람.무심하게 방 안을 스윽 둘러보던 대공이 느리게 마리의 앞까지 걸어왔다.
바닥에 앉은 채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는 비비안이 아끼는 시녀였다.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음성.
“비비안은 어디 있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하늘이 더 파란 것도 같았고, 모처럼 바람이 불지 않아 산책하기 좋을 것 같다는 게 조금 다르다면 달랐을까.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저 비비안을 만나러 가는 데 작은 명분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별다를 것 없는 하루.
“내가 지금 물었잖나.
비비안, 어디 있느냐고.”
공기부터 다른 방.그녀가 아끼고 항상 곁에 두는 시녀가 엉망으로 오열하고 있는 모습.네가 없는 이곳.
“…아, 아가씨가 없어졌어요.”
디에고가 눈을 감고 차분히 제 감정을 누르고자 노력했다.
도무지 갈무리되지 않아 끝내 한 손으로 얼굴을 꾹 누른 그가 짙은 한숨을 내뱉는다.
“비비안이 없다라.”
사납게 눈을 뜬 디에고가 발코니로 나가 어딘가를 응시했다.
“나와.”
그 서슬 퍼런 외침에 인기척 하나 없던 정원 곳곳에서 흔들림이 일었다.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기사들을 보던 디에고의 한쪽 입꼬리가 치솟았다.
“말해, 지금 비비안 어딨어.”
자신이 붙여둔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싸늘했다.
사실 듣지 않아도 알았다.비비안이 여기 없다면 저들도 여기 없어야 마땅하니까.
“너도 모르는 건가.”
고개를 들어 나무 위 한곳을 빤히 보며 디에고가 물었다.
하나 황태자가 심어둔 자에게도 기대하는 바는 없었다.
“…….”
결국 지금 그녀의 행방을 아는 자가 없다는 뜻, 이 모든 것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비비안 윈데이너가 사라졌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군.”
디에고가 헛웃음을 짓고는 머리를 젖혔다.
그의 잇새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오더니 턱에 힘이 들어간다.이내 디에고 브라이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