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른 아침, 바로 출항할 수 있는 배를 구하느라 진땀을 뺀 한스 자작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처음 노예 거래를 계획할 당시에는 제게 접근한 약재상을 통해 약물 거래 시 병행하려 했으나, 그에 다른 의견을 낸 것이 후작의 그림자였다.
- 약재상은 아직 믿을 수 없으니 노예 거래는 따로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게 처음인 것처럼 놀란 자작이었다.
저와 후작의 그림자가 서로 대화란 것을 한 적이 있었던가.그 생소한 경험에 조금 흥미가 생긴 그는 좀 더 남자가 하는 말을 들어봤었다.
- 약물을 거래할 것처럼 정보를 캐내고, 노예 거래는 왕국에 도착한 후 저희가 직접 왕국의 상단을 만나보는 것입니다.듣자 하니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이미 왕국의 상단이 어디인지도 들어둔 참이고, 굳이 노예 거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반가운 일은 아니었기에.더군다나 직접 거래를 터두면 추후에도 훨씬 좋을 터였다.
아직 어떨지 모르는 약재상과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보다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여기까지는 좋았다.
후작도 이편을 더 달가워했으니까.문제는 데이비드 후작에게 일을 치를 날짜와 방법에 대해 설명한 날, 일어났다.
“이 새끼는 왜 꼭 당일 아침에 배를 구하라 말아 해 가지고.”
제가 후작 대신 더러운 일을 하는 그의 손발이라면 그 옆에 선 남자는 후작의 개였다.
- 만약을 위해 이동할 배는 당일 새벽에 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평소에는 입 딱 붙이고 후작이 묻는 것에만 답하던 인간이 그날따라 입을 놀렸다.
- 그렇게 하도록 하지.
뭐든 조심할 수 있는 건 다 조심해.데이비드 후작이 남자의 손을 들어줬기에 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개고생을 시켜?”
덕분에 새벽같이 나와 배를 구하느라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가.
마땅한 배를 구하지 못하면 일이 틀어질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다행히 만족스러운 배를 선점한 한스 자작이 미소 지었다.
“마침 딱 적당한 것이 있어서 망정이었지.
하여간 천한 것들은 그리 제멋대로라니까.”
후작의 그림자를 욕하고 있자 마차 몇 대가 연이어 도착한다.
“왔군.”
계획은 완벽했다.돈 밝히는 고아원 원장 하나를 물색하고, 정확한 내막은 둘러댄 채 아이들을 내놓으라 하면 그만이었다.
“입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고아원 원장도 뻔히 알면서 그 얕은 거짓을 진실인 양 떠들어댔다.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진 한스 자작 입장에서는 나쁠 일도 아니긴 했다.그렇게 구한 아이들을 육지로 데려가기엔 위험 부담이 있어 선택한 것이 바닷길이었다.일이 순조로웠다.
왕국에 도착해서 할 일이 많았지만 원래 물건을 조달하는 과정까지를 맡아왔던 그에게는 아이들을 배에 태우고 나면 이미 제 몫은 다한 셈이었다.매번 물건을 구하기까지가 제 몫이었으니까.
“왕국 상단과 접촉하는 것은 후작의 그림자가 맡기로 했으니, 나는 간 김에 좀 쉬다 오면 되겠지.”
한스 자작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자리했다.
처참하고 고통스러울 아이들의 미래를 그리는 것만으로 짜릿했다.새벽의 고생이 지워질 정도의 희열이었다.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움에 혀를 차던 그가 마차에서 배로 옮겨지는 아이들을 멀찍이서 바라보았다.제 계획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사방이 막힌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찝찝했다.지은 죄가 많아서일까.
항상 누군가의 눈을 피해 도망갈 궁리를 하는 삶이라 그런 것일까.바다 위에서는 꼼짝할 수 없다는 그 두려움 때문에 그는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에는 회의적이었다.물론 자신에게만.저를 제외한 그 외 누군가 배를 타는 것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기에 믿을 만한 수하를 배에 남겨둔 채 자신은 육지를 통해 왕국까지 이동할 참이었다.가느스름한 눈으로 옮겨지는 아이들을 보던 자작의 앞으로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뭐지?”
오늘 제 고생의 원흉, 남자가 한스 자작의 앞에 서 있다.
“바로 출발하시지요.”
큰 키 덕에 한스 자작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무감한 시선.그 시선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더러워진 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왜 자꾸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원래 하던 대로 하라고.
입 꾹 다물고 후작의 발이나 닦으란 말이다.”
제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모르는지, 남자를 저보다 못한 이로 취급한 자작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다.그렇게 자작이 추잡한 말을 남자에게 던지며 자신의 짜증을 풀어내고 있을 때.남자의 등 너머에서는 비비안 윈데이너가 들려진 채 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세상이 내게 너무 가혹하다.납치라니, 납치라니, 납치라니!!이젠 하다 하다 납치까지 경험을 한다, 내가.
그것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왕국을 향해가는 것 같았다.
‘허, 참!’
약 기운에 쓰러지기 전, 라야 자작 영애를 보았다.
본인의 본 머리 색이 아닌 분홍색 머리칼을 두른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을.그건 대체 뭘 하려던 모습일까.
설마 내 대역이라도 서는 것일까.아무튼 그녀가 이 일에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마주한 눈빛이 무언가를 알고 있었고, 또 나를 향한 죄책감마저 담고 있었으니까.
‘하아.’
우선 상황을 차분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아직까지 잠든 척하고 있기는 한데.
슬쩍 본 풍경에 고아원 아이들이 비쳤다.저처럼 약 기운에 취한 듯 미묘하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아이들이 자고 있었다.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빼돌려 배를 통해 왕국으로 나른다.무엇 때문일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자꾸만 한 가지로 좁혀졌다.노예, 이 어린아이들을 타국의 노예로 팔아넘긴다.누가? 대체 또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분명 레사가 알렌 데이비드 후작과 그의 수하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래 그 어떤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잔뜩 겁이 난 것인지 레사가 만든 약재상을 통해 조심스레 약물 거래만을 꾀한다고 했다.이런 일을 꾸미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그렇다면 후작이 아니라 이런 미친 발상을 하는 놈이 더 있다는 말인가? 정신이 아찔해졌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작은 창으로 빛이 드는 것을 보아 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약 먹고 쓰러진 게 어젯밤일까.
지금쯤 내가 사라진 것을 모두가 알았을지.독 먹고 걱정 끼친 게 불과 얼마 전, 이젠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다.
‘난리 났겠지?’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눈을 뜨고 보자 따로 사내들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고, 더 용기를 내 고개를 이리저리 틀자 하나둘 움찔대는 아이들이 보였다.조금 전 저도 일어난 것으로 보아 약 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어쩐다.
이 아이들하고 내가 한편, 건장한 사내 여럿이 한편.
무력했다.
심지어 바다 한가운데에서 도망갈 곳도 없었다.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지금.곧이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울음과 혼란, 공포는 삽시간에 공기를 타고 옮겨간다.
훌쩍이는 소리가 번져가는 것을 들으며 눈을 떴다.
‘여기서 어른은 나 하나야.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비비안 윈데이너.’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자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우리 고아원에서 봤지?”
상냥하게 웃으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묻자 몇몇은 눈물을 대롱 매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여기가 어디예요?”
글쎄, 나도 모르겠단다.
“음, 배?”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이부터 뭐에 서러움이 터진 것인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 아이까지 반응도 다양했다.그 소란을 밖에서도 인지한 것인지 문이 발칵 열린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소리를 치며 들어오는 험악하게 생긴 사내를 보자 울음소리가 두 배로 커진다.귓가에 들이치는 소음에 인상을 쓴 사내가 고개를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너, 넌?”
내가 자는 척하면서 너희 수다를 좀 들었는데.아무래도 이 배에는 그럴싸한 우두머리가 없는 것 같았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를 지휘하는 자는 따로 육지를 통해 왕국으로 간다고 하는 것 같고.게다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배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내가 훔쳐 들은 대화들이 생각보다 순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애는 너무 어리지 않아?
- 대체 우리 같은 말단한테 왜 이런 일까지 맡겼는지 모르겠군.
- 나는 이번 일은 그닥 내키지 않았다네.
- …정말 이 어린것들이 왕국 놈들의 노예가 된다는 말인가?
- 아까 먹은 사과가 맛있던데, 어디 영지 것인지 아는 사람 있나?하나같이 물렀다.
내가 납치당한 상황을 파악하고도 그다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다 쟤들 탓이다.평범한 사람들, 선하면서도 자기 욕심이 중요하고 악하면서도 양심은 있는 그런 보통의 범주에 드는 이들의 대화였다.물론 이런 일인 줄 알면서도 가담했다는 것에서부터 글러 먹기는 했다만.그래도 적어도 이유 없이 아이들을 해칠 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문 앞에 얼어붙은 채로 나를 보며 눈을 확장시킨 저 사내만 봐도 그랬다.아이만 있는 이곳에 내가 섞여 있는 것도 쟤들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한 것 같았다.
우연히 어느 멍청이가 구분 못 하고 배에 태웠다는 의견에 저들끼리 무게를 싣더라.
‘내가 여기 있는 건 절대 우연일 리가 없지…….’
누군가의 계획의 한 일부분일 게 뻔하지만.그를 모를 만큼 사내들은 이 일에 무지했고, 무언가를 짐작해 볼 만큼 머리가 트인 자도 없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당장은 너희랑 잘 지내보는 방향으로 가봐야겠으니까.
우리 잘 지내보자? 응?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맹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사내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내 해맑은 물음에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방황하던 사내가 혼자서는 벅차다 여겼는지 그대로 뒤돌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