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81화 (81/109)
  • 81화

    *고아원을 둘러싼 일정 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향이 넘실거린다.

    그것은 사람의 체취 같기도, 땅 내음 같기도 해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피워 올린 것일 거라고 알아챈 자는 없었다.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비비안 윈데이너 정도 되면 호위만 여럿 붙는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니 예리한 그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않을까 걱정할 때, 남자는 환히 웃어 보였다.

    - 향이 그들의 눈을 가려줄 겁니다.그리고 남자의 자신감 넘치던 미소가 거짓은 아니었는지 10년 넘게 그녀의 뒤를 지키던 황태자의 기사마저 비비안을 흉내 낸 라야 자작 영애를 구분하지 못했다.

    ‘절대 그들이 나와 영애를 구분할 수는 없을 거라고 했어.’

    그를 증명하듯 라야 자작 영애가 비비안 윈데이너의 옷을 입고 그녀의 머리칼 색을 훔쳐 후작가에 들어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몸이 좋지 않다 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면 어두운 사위 덕에 아무도 그녀를 막아서지 않았다.

    ‘애초에 후작 영애로 변장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언제나 비비안 윈데이너의 곁을 지키던 시녀는 고아원으로 가기 전에 이미 힘을 써둔 참이었다.

    반나절이 지나면 서서히 잠들어 다음 날까지 깰 수 없는 약이라 하였다.저택을 통과할 때는 바짝 긴장해 숨조차 쉬기 어려웠지만, 방에 들어선 이후에는 쉬웠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한 채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침대에 털썩 앉은 자작 영애의 손이 벌벌 떨렸다.

    “어, 어떻게 여기까지 오기는 왔는데.”

    비비안 윈데이너가 분명 저를 봤다.

    그 보랏빛 눈동자에 선명히 새겨진 제 모습을 보았다.

    ‘깨어나서 나를 기억하면 어떡하지?’

    잔뜩 긴장했던 좀 전까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막상 혼자가 되자 식은땀이 흘렀다.

    제가 정말 무서운 일을 벌인 것은 아닐까.바닥에 누워 있던 후작 영애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희게 질려 있었다.

    “그냥 잠드는 약이라고 했어.”

    남자에게 전해 받은 약병은 두 개였다.

    하나는 이 저택의 시녀 몫이었고, 하나는 고아원에서 비비안 윈데이너에게 쓸 것이라 하였다.고아원의 소녀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꼭 그 접시를 분홍 머리 영애에게 놓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그렇게 그녀가 제 눈앞에서 쓰러진 것으로 보아 아이가 시킨 일을 톡톡히 해냈음을 알겠다.

    “어, 얼마나 남았지.”

    아직 늦은 저녁을 먹는 이들이 많을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무려 기나긴 밤과 새벽을 지나 동이 틀 무렵에나 이 저택을 나갈 수 있는 자작 영애.이는 그녀가 보내야 할 지옥 같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했다.과연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괜스레 비오첼라 저택의 감옥에서 눈물로 시간을 죽이던 날들이 떠올랐다.침대의 끝으로 기어간 그녀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연신 심호흡을 반복했다.그 시각 고아원, 먼저 돌아간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 대신 방문 일정의 마무리를 지은 셀빈 자작 영애와 판델 남작 영애가 아이들과 인사를 했다.짧은 하루였지만 그새 정이 들어 헤어짐이 아쉬웠다.

    “얘는 언제까지 안 돌아올 예정이지?”

    셀빈 자작 영애의 퉁명스러운 말에 판델 남작 영애가 난감하게 웃는다.

    일찌감치 자리를 비운 라야 자작 영애는 돌아갈 때가 되어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매번 외출하고도 잘 돌아오시는 분이니 때가 되면 저택으로 오시겠지요.”

    침착한 판델 남작 영애의 말에 심드렁하니 고개를 끄덕인 셀빈 자작 영애가 마차에 올라탔다.

    “그나저나 몸도 약하신 분인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라야 자작 영애에 관해 이야기할 때와는 판이한 어조로 셀빈 자작 영애가 걱정했다.

    “그러게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긴 하던데.”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내내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낸 그녀들이 후작가에 당도했다.저택에 들어서며 후작 영애에 대해 묻자, 돌아오는 답은 자신들의 걱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과정밖에 되지 않았다.일찍 잘 터이니 그리 알라고 말하고 들어간 후작 영애.

    그 덕에 감히 그녀의 방 근처에조차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일 인사해야겠네.”

    “네, 내일 같이 찾아가 보도록 하죠.”

    익숙지 않은 하루가 피곤한 건 둘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들도 바로 각자 침실로 들어섰다.*고아원에 밤이 내리고 어두운 방 안, 푸근했던 얼굴은 어디 가고 탐욕이 가득한 눈을 번뜩이는 고아원 원장이 있다.

    “후후, 입은 줄이고 돈은 배로 생기고.”

    썩 좋은 거래였다.

    일은 많고 번잡스러운데 이렇다 할 수입원 없이 귀족의 후원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니, 돈을 모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한데 귀족 나리께서 선뜻 더 좋은 입양처를 알아봐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물론 입양에는 까다로운 절차, 원칙이 있으나 신뢰와 믿음으로 구축된 세상 아닌가.

    불쌍한 애들을 데리고 뭐 얼마나 나쁜 짓을 하려고.그저 서로 수고로운 일은 관두고 그 신뢰의 증표로 소정의 정을 주고받는 것이니 나쁠 것 하나 없다 여긴 원장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이제 제가 선발한 몇몇 아이가 이 고아원을 떠나게 된다.

    “훨씬 좋은 곳에 가는 것이니 슬퍼 말아야지.”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들도 돌아가고, 이제 일을 치를 시간이었다.

    “자, 가볼까.”

    그녀가 복도를 지나 초라한 문 앞에 섰다.자물쇠에 열쇠를 꽂은 원장이 문을 열자 언제 온 것인지 그녀 뒤편으로 사내들이 자리했다.아까 저녁을 먹고 특별히 상을 준다며 불러 모은 아이들에게 알록달록한 사탕을 하나씩 쥐여줬었다.

    그리고 한껏 기분이 좋아져 왁자지껄 각자의 사탕을 살피는 아이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말했었다.

    - 자, 다들 달콤한 시간을 가져보자꾸나.그 자리에서 모두가 사탕을 입에 넣는 것까지 확인한 후 어찌나 흡족한 미소를 지었던지.그 증거로 서로 엉켜 있는 아이들이 색색거리며 곤히 잠들어 있다.

    “들어, 시간 없어.”

    사내의 말이 떨어지자 원장을 지나쳐 간 자들이 아이를 하나둘 어깨에 걸쳤다.

    “행복하렴.”

    자신을 지나쳐 가는 아이들에게 인자한 미소로 안녕을 고하는 원장.그녀는 그것도 금세 질렸는지 그 간단한 작별의 인사마저 채 마무리 짓지 않고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난 자리, 방금 전까지 없던 한 사람이 자연스레 사내들 틈에 섞여들었다.찾는 자가 있는 듯 선 채로 한 명, 한 명 보던 남자가 이내 한 사내에게 향했다.

    “다 옮겼어?”

    “아마도.”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오는 게 좋지 않겠어?”

    그걸 왜 자기가 하냐며 따지고 들기 위해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사내의 눈동자에 힘이 풀린다.느슨해지는 신경 사이로 흙냄새가 난 것도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한 사내가 이내 마지막으로 방 안을 점검하고자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남았잖아.”

    아이가 아닌 여자였다.

    분홍 머리칼이 탐스러운 곱게 생긴 여자.그리고 그 분홍색을 보자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그가 인상을 쓴 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 분홍색 머리, 가진 계집 찾아봐.

    “아! 데이비드 후작이 전에 그랬던 것 같은데.”

    오래된 기억 속에 있었다, 분명.그 끈적한 욕망이 그대로 녹아 있던 목소리.아이는 아니지만, 데려가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한 사내가 비비안 윈데이너를 어깨에 둘러멨다.이 방으로 그 사내를 몰아넣었던 남자의 시선이 고아원을 빠져나가는 그들에게 향했다.

    사내의 어깨에 걸쳐진 탓에 고운 분홍빛 머리칼이 걸음에 따라 나풀거렸다.사내들이 향한 곳은 커다란 마차였다.

    그 안에 아이들을 차곡차곡 쌓은 그들이 어둠을 뒤로하고 달렸다.

    아이들 틈에서 마찬가지로 지독한 잠에 빠진 비비안의 몸이 마차와 함께 흔들린다.그렇게 새벽을 달리고 나서야 마차의 움직임이 멈췄다.

    처음 아이들을 싣던 그 모습 그대로 사내들이 아이를 한 명씩 어깨에 둘러멘 채 걸음을 재촉했다.

    “바다라서 확실히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은데.”

    투정을 부리던 사내가 커다란 배 위로 걸음을 옮겼다.

    마차로 실려온 모든 이들이 옮겨지자마자 쫓기듯 배가 바다로 향한다.

    “그런데 약 기운은 언제 빠지는 거야?”

    사내는 그렇게 거칠게 다루는데도 아무런 미동도 없고, 단 한 명도 잠에서 깨는 아이가 없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신경을 거슬리는 존재에게 알게 모르게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다.분명 고아원의 아이들을 왕국으로 옮겨가는 일이라 하였다.그런데 저 분홍 머리는 어떻게 봐줘도 아이가 아니었다.

    “어째서.”

    “누가 잘못 데려온 거야, 대체.”

    “딱 봐도 귀족 같지 않소.”

    그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내며 분홍 머리 여자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생각했다.이미 틀렸다고.

    육지는 저만치 멀어졌고, 배는 다시 돌릴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섣불리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도 이상했다.시간이 얼추 흐르고 나서야 저들끼리 고민한들 답도 없고, 움직임 하나 없는 여자를 내내 보고 있는 것도 지루할 때쯤 사내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거둬진 뒤에야 비비안의 눈썹이 꿈틀했다.온전히 잠이 깨지 않은 그녀의 몽롱한 시선이 소리 없이 주변을 훑는다.

    ‘…여기가 어디야?’

    혼란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과 다르게 비비안의 행동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제 주변에 흩어져 있는 아이들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상황 파악이 끝나기 전까지는 원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한 그녀가 숨죽인 채 주변 소음을 받아들였다.

    “우웩!”

    “뱃멀미를 하면 타지를 말았어야지.”

    ‘뱃멀미……?’

    뱃멀미란 배를 탄 뒤에나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넘기려던 그녀가 멈칫한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배라고? 배?! 바다 위에 떠 있는 그거?’

    평범하게 잠이 든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주변 환경과 의외로 입이 가벼운 사내들이 오며 가며 떠들어대는 통에 비비안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이것은 납치였다.제가 지금 납치를 당한 것임을 확신한 비비안이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왕세자 독 사건에 휘말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일에 연관되어 버린 거지?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앞으로가 걱정이라 막막하기도 하고.

    정말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으나 겉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왕국이라.

    허! 독에 이어 이번에는 납치라고?!’

    집 밖만 나오면 일이 벌어지는구나, 체념한 비비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