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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80화 (80/109)
  • 80화

    *디에고의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호기롭게 간 그곳에서 결국 또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들었다.

    안락한 침대, 지독한 안정감을 주는 마성의 토닥임.동이 틀 무렵 잠에서 깬 나는 민망함에 온몸을 배배 꼬았더랬지.그리고 디에고의 손을 이끌고 야심 차게 준비한 꽃마차에 도착했을 때,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많이 웃더라.소리 내며 한바탕 웃어놓고도 멈출 수 없었는지 나중에는 웃음을 참느라 온몸을 떠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행복해 보였으니까 됐다.”

    “각하께서 무척 좋아하셨죠?”

    내 머리를 빗기며 마리가 물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온 내게 어찌나 음흉한 눈초리를 쏘아대던지.그냥 정말 푹 자고 왔단 말이다.

    침대가 너무 푹신하더라, 진짜.

    “응.

    내 생각보다 기뻐했던 것 같아.”

    그간 내가 얼마나 그를 위해서 고심하고 고심했는지 아는 마리가 빙긋 웃었다.

    “아, 그리고 영애들이 아가씨께 티타임을 청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오늘 오후 시간이 괜찮을 것 같네.”

    오전에는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았다.그렇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향한 티타임 자리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영애들이라길래 당연히 셀빈 자작 영애와 판델 남작 영애를 말하는 줄 알았는데, 웬일로 라야 자작 영애까지 동석하고 있다.

    “잘 지내셨나요?”

    자리에 앉으며 살갑게 묻자 미소가 돌아왔다.

    같은 저택 안에 살고 있다지만 워낙 저택이 넓기도 했고, 영애들이 참 바빴다.나랑 다니는 동선도, 시간도 너무 달랐기에 이렇게 일부러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보기 힘든 수준.그럼에도 한 번씩 차를 나눠왔던 두 사람과 다르게 라야 자작 영애는 몇 주 전 정원에서의 우연한 만남 말고는 딱히 나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영애 덕분에 정말 잘 지내고 있지요.”

    좀 더 오래 나를 본 셀빈 자작 영애가 정답게 웃어준다.

    그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던 판델 남작 영애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해왔다.

    “오늘 영애께 티타임을 청한 것은 다름 아니라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거요?”

    셀빈 자작 영애가 라야 자작 영애에게 시선을 주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라야 자작 영애께서 말씀하시길 고아원을 후원하고 계신다고.”

    너무 예상 밖의 이야기가 나와서 절로 라야 자작 영애에게 시선이 쏠렸다.

    “예, 제가 하고 있기는 한데.

    그걸 어찌 아셨을까요?”

    머뭇대던 라야 자작 영애가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했다.

    “…우연히 알게 됐어요.

    전에 아버지께서 후원하던 고아원이 윈데이너 영애께서 후원하는 곳과 같은 곳이라.”

    아하, 세상에 이런 우연이.한데 그런 일에는 윈데이너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데.내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제가 가끔 직접 봉사하러 가기도 했는데, 그때 우연히 영애를 보았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만나니 생각이 나서…….”

    지금은 일이 많고 몸이 안 좋을 때가 많았어서 직접 가본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주 들여다보고는 했었다.아주 가끔 다른 이들의 방문과 겹치기도 했으니 충분히 마주쳤을지도 모르지.

    “그랬군요.

    신기한 우연이네요.”

    반가운 우연을 설명하고자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닌 것 같다.

    셀빈 자작 영애가 우물쭈물하며 웃는 게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것과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걸까요?”

    “제가 사실 고아원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요.

    막연히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그 아이들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고 말하는 셀빈 자작 영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새삼 그날 비오첼라가 정원에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때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그녀는 생기발랄했고,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저도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도 좋아요.”

    아니지.

    아이들 얼굴 본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참에 함께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괜찮으시다면 조만간 고아원에 갈 때 같이 가시지 않겠어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단번에 두 영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뭐든 도움이 될 테니까.

    꼭 데려가 주세요.”

    “저도요.”

    소심하게 말을 보탠 판델 남작 영애가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같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라야 자작 영애도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표정은 지극히 어두웠지만, 원래도 후원을 해왔다고 하니 분명 어색해서 나온 표정이겠지.

    “그럼 모두 함께 가는 것으로 알고 준비할게요.”

    이것저것 선물을 준비해 아이들을 만나러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일은 금방 성사되었다.

    비비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아원 방문 일정을 영애들과 공유했다.비비안이 후원하는 곳은 수도 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라야 자작 영애와 함께 가는 것이니만큼 그녀와 우연히 스쳤다는 그 고아원에 가는 것으로 정했다.두 대의 마차 앞에 선 영애들은 각자 나름의 이유로 들떠 있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잘할 거예요.

    영애만큼 상냥한 이도 드문걸요.”

    서로 기운을 북돋아 주는 셀빈 자작 영애와 판델 남작 영애.

    그에 반해 멀찍이 서 있는 라야 자작 영애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영애, 몸이 안 좋은가요? 어딘가 불편해 보여서.”

    걱정 어린 비비안의 물음에 화들짝 놀란 라야 자작 영애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긴장해서요.”

    원체 소심한 사람인가 싶어 고개를 끄덕인 비비안이 마차에 올라탔다.영애 넷의 방문으로 고아원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푸근한 인상의 고아원 원장이 비비안에게 여러 번 감사 인사를 전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바라봤다.셀빈 자작 영애는 아이들과 직접 대화도 하고 놀이도 하면서 인기인이 다 되어 있었고, 판델 남작 영애는 비교적 큰 아이들이 고아원을 위해 일하는 것을 곁에서 도왔다.비비안 또한 아이들 속에 섞여들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저를 붙잡고 있는 원장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중이었다.

    “라야 자작 영애는 어디 있지?”

    그때 기운 넘치는 아이들을 피해 숨 돌릴 틈을 찾아 비비안 곁으로 온 셀빈 자작 영애가 답했다.

    “글쎄요.

    저택을 나온 김에 애인이라도 만나러 간 것은 아닐지.”

    “애인?”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반문하는 비비안의 모습이 퍽 귀여워 미소 지은 셀빈 자작 영애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종종 밤에 저택을 빠져나가 애인을 만난다는 얘기가 있어요.”

    “어머.”

    “실제로 본인 입으로 애인에게 선물 받은 것이라며 머리 장식을 보이기도 했고요.”

    머리 장식 하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헛소문만은 아니구나 생각한 비비안의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했다.할 말을 끝낸 자작 영애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제게는 지금이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며 라야 자작 영애의 부재에 대해 애써 합리화를 하던 그녀가 아이들에게 끌려갔다.노을이 다 지고 밤이 내리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영애들은 잠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쉬운 일이 아니네요.”

    큰일을 당하고, 남의 집에 얹혀 지내는 처지였어도 그들은 날 때부터 귀족의 영애였다.

    일을 하기 위해 구조화된 몸은 절대 아니니 잠깐의 노동에도 에구구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간신히 원장에게서 벗어난 비비안도 후에는 아이들의 놀이에 참여했었다.

    그녀 역시 그새 지친 몰골로 두 영애 옆에 털썩 앉아 있는 중이다.

    “힘드시죠.

    저녁 드세요!”

    고아원을 돌봐주는 안나의 부름에 허기가 진 셋은 재빠르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리고 그런 영애들의 뒤편으로 벽에 기댄 한 인영의 한숨이 짙게 흘렀다.

    “하아, 안 들킬 수 있을까.”

    이내 손톱을 물어뜯는 여인이 슬쩍 옆으로 몸을 숙이자 분홍빛 머리칼이 스륵 흘러내렸다.영애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벽에 기댔던 여인 또한 모습을 감추었다.아이들이 모여 있어 왁자지껄한 식당으로 들어서자 그 분위기와 음식 냄새로 인해 비비안의 눈이 똘망똘망해졌다.

    “영애, 앉으세요.”

    “아, 네.”

    식탁 한쪽을 차지한 셋에게 열넷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혹시 우리가 받아와야 했던 거 아니니?”

    비비안의 물음에 새침하게 고개를 저은 소녀가 아직 앳된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제가 식사를 나눠주는 역할이라 괜찮아요.”

    그제야 안심한 비비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따듯한 감자 수프와 샐러드 그리고 자신들의 방문 덕에 특별히 얹어진 작은 고깃덩어리가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는 접시를 앞에 두고 비비안이 포크를 쥐었다.모처럼 화려한 식단에 아이들마저 먹는 일에만 집중한 것인지 식당은 금세 조용한 식기 소리만이 가득했다.

    “맛있네요.”

    “예, 정말 맛있어요!”

    영애들의 말에 동의하며 비비안마저 제게 주어진 몫을 싹싹 비워냈다.

    ‘배가 불러서 그런가.’

    “…왜 이렇게 졸리지?”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한 비비안이 눈에 힘을 주었으나 속절없이 감기기를 수 번.

    “안 되겠어요.

    저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이러다 여기서 잠들어버리면 민폐라 생각한 비비안은 아쉽지만 먼저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네, 그러세요.

    저희는 조금 더 정리하고 들어가 볼게요.”

    영애들을 뒤로하고 마차로 향하던 비비안이 휘청거리며 벽에 기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건, 그냥 졸린 게 아닌 것 같은데.’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어느새 제 앞에 드러난 드레스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가늘어진 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을 확인한 순간, 비비안의 몸이 허물어졌다.제 앞으로 쓰러진 비비안을 내려다보는 여인 뒤로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그 후 그대로 근처 방으로 들려간 비비안의 옷이 갈아입혀진다.

    비비안에게서 벗겨낸 옷을 옆에 선 여인에게 내미는 중년 여성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헐렁한 옷에 비비안을 꿰어 넣은 중년 여성이 제 할 일은 이제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그리고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서 있는 한 여인.곤히 잠든 채 누워 있는 비비안을 한 번 내려다본 여인이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손수건을 쥐었다.

    그대로 입가를 가리고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또각또각.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여인의 분홍 머리칼이 걸음에 따라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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