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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79화 (79/109)

79화

*데이비드 후작가에서 열린 작은 소모임.질펀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귀족 사내들이 소규모로 모여 제각각 쾌락을 향유하고 있다.

“하일 백작, 자네 이번에 벌인 사업이 아주 크게 됐다지?”

연기 가득한 응접실에서 카드놀이를 하던 이들이 저마다의 웃음을 보였다.

“보통이야, 보통.”

너스레를 떠는 그의 온몸에 딱 봐도 값나가 보이는 것들이 즐비했다.

“후작, 자네는 요새 어떤가.

듣자 하니 이렇다 할 뭔가가 없는 것 같던데.”

이립스 후작이 조소를 머금은 채 알렌 데이비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이렇게 모인 사람들 간에 의리랄 게 있을 리도 없고, 그다지 얻어낼 것이 없다 판단되면 오히려 물어뜯기 바쁜 관계.

그게 여기 모인 인간들의 실체였다.여기서 나이가 제일 어린 알렌 데이비드 후작의 얼굴에 치기 어린 분노가 스쳤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음에도 사방의 능구렁이들이 그를 놓칠 리 없었다.곁눈질로 살피고 비웃음을 삼키는 귀족들의 행태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데이비드 후작의 얼굴에 금이 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제 딴에는 아주 여유롭게 돌아 나왔다고 생각했으나 등 뒤로 들려오는 비웃음으로 인해 데이비드 후작의 기분이 진창에 쑤셔 박혔다.

‘젠장.’

사실 이 모임을 주최한 것도 도움이 될 만한 사업 정보는 없을지, 혹은 제가 은밀하게 거래하던 약물과 노예에 관심이 있는 자는 없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한데 정작 제 몫은 찾지도 못하고 비웃음만 사고 있는 꼴이라니.어두컴컴한 복도에 서 있는 그의 등 뒤로 즐거운 듯한 고함과 웃음소리가 만연했다.

‘나만.

왜 나만.’

후작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돈 없는 후작가는 이제 뭐 더 볼 게 있나.”

제가 여기 서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것인지, 혹은 제가 이 말을 듣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인 것인지.

“그보다 이번 왕세자 독 사건도, 데이비드 후작 쪽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이 정말인가.”

저를 깎아내리며 호쾌한 웃음을 주고받는 이들의 소리가 데이비드 후작의 귓가에 소용돌이쳤다.어느새 그의 눈에는 핏발마저 일었고, 입매는 더 기괴할 수 없을 정도로 비틀려 있었다.느리게 걸음을 옮긴 후작이 제 저택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다.때맞춰 후작을 기다리고 있던 한스 자작이 눈치를 살핀다.

분명 오늘 도덕을 모르는 자들이 돈을 가지고 모이는 자리라며, 거기서 무언가 길을 찾을 수 있지 않겠나 말하던 후작이었는데.들어서는 표정을 보아하니 글러도 제대로 글렀다는 판단이 든 한스 자작이다.

“자작, 뭐라도 좀 해결 방법을 찾았나.”

해결 방법이랄 게 있는 문제였던가.

장부를 코앞까지 들이밀어 줘도 난색을 표할 뿐 그 누구도 자신들과 거래를 트는 자가 없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궁에서 벌어진 왕세자 독 사건, 그 독의 출처가 데이비드 후작이었다.은연중에 이를 아는 자들은 더욱 후작을 기피할 수밖에 없으니.

아무도 자신의 욕망을 풀기 위해서건, 후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건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그 많은 자 중에 단 한 명도.

“…….”

“아직도? 대체 얼마나 시간을 더 줘야 뭔가 결과를 가져올 거지? 응?”

데이비드 후작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집기류를 내던지며 제 분을 삼키지 못한 그가 씩씩댄다.저 행패 속에서 제 몸을 사린 한스 자작이 후작의 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제국 귀족은 틀렸어.’

직접 귀족들을 상대해 온 자작은 알았다.

이 제국에서 후작의 편에 설 사람도, 그에게 돈을 쥐여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후우.”

깊게 숨을 들이마시던 후작이 소파에 앉았다.

어떻게 해도 화가 다 풀리지 않았다.

아직도 귓가에 저를 업신여기던 귀족들의 비아냥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후작님, 제가 혹시 몰라서 전에 말씀드린 그 약재상.

시간을 두고 지켜보았습니다만.”

차선책은 있어서 나쁠 것이 없다 여겨 당장은 후작의 심기를 건드릴 뿐인 방안이었으나 자작은 준비했다.약재상의 발자취를 좇고 어떻게 일을 진행시킬지 그림을 그려가며.그리고 무엇보다 아무 탈이 나지 않을 법한 상품까지 고심하면서.

“그래서.”

미간을 찌푸리지만 전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종용하는 후작에 힘입어 자작은 제 계획을 읊었다.

“약재상이 거래 중인 왕국의 상단을 알아보니 제대로 된 왕족의 허가까지 받은 큰 상단이더군요.

그런 상단이 알리지 않고 뒤로 배를 불리는 수단의 하나로 약재상을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왕족의 허가가 떨어진 큰 상단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후작이 더 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하나 약물만으로는 규모가 크지 않아 큰돈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주 잘하는 것.

한스 자작의 순수한 기쁨이자 노력 이상의 돈을 그들에게 안겨주던 일.

“노예를 파시지요.”

기대가 커지던 후작의 얼굴이 일순간에 일그러졌다.

“뭐라? 자작, 상황을 모르나.

가당치 않은 헛소리를 늘어놓을 거면 그 입 다물게.”

이리 나올 것은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후작님, 어차피 저희는 이대로라면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하더라도 잘하는 것을 해야지요.”

후작이 머뭇대는 사이 그가 더 듣지도 않고 이야기를 접을까 마음이 급해진 자작이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고아입니다.

언제, 어떻게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자들.

꼭 귀족이 아니더라도 어딜 가든 노예를 원하는 이들은 있는 법이죠.

인간이니까요.”

잔인함이 깃든 눈을 휘며 입매를 끌어올린 자작이 후작과 눈을 맞췄다.자작의 말을 찬찬히 곱씹던 후작도 이내 미간을 찌푸리곤 갈등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국 내에서는 이제 제가 시도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았다.

특히나 여태 제 손이 아닌 남의 손을 빌려 돈을 취했던 후작에게 비오첼라를 잃은 것은 생각 이상으로 치명타였던 터라 더 막막했다.

“아무 문제 없이 할 수 있겠나.”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장담할 수는 없었으나 어차피 답은 나왔다.

겁을 먹고 제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후작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조만간 준비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은 지 오래였다.*오늘도 어둠을 틈타 윈데이너 후작가를 나온 라야 자작 영애가 밤길을 걸었다.머리에 그가 선물해 준 장식을 달고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 그 자체였다.

게다가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더 특별하지 않은가.골목 한구석에서 아주 잠시의 시간을 갖고 나면 헤어지던 게 다반사였는데 오늘은 무려 찻집에서 만나기로 한 참이다.한껏 들뜬 자작 영애가 번화가의 불빛 사이로 몸을 내었다.그가 일러준 가게를 더듬더듬 찾아 도달한 곳은 낡아 보이는 외관의 찻집이었다.

아마 손님이 거의 없을 법한 모양새에 실망한 것도 잠깐.길바닥에서 보고 헤어지는 것보다야 낫다는 생각에 그녀가 웃는 얼굴로 가게 문을 열었다.딸랑―비교적 경쾌한 소리와 다르게 가게 안은 밖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텅 빈 가게 안을 훑던 자작 영애의 시선에 한쪽 구석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마주 앉자 남자의 무심한 시선이 닿는다.

“이렇게 찻집에서 보니까 더 좋네요.”

어딘가 신난 듯한 그녀의 음성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남자가 머리 장식을 한 번 바라보았다.그 찰나의 스쳐가는 시선도 놓치지 않은 자작 영애가 수줍게 웃는다.

“너무 예쁘죠.

아, 물론 머리 장식이요.”

무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조차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로 그가 좋았던 자작 영애의 표정이 밝았다.

“그대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고 했지.”

이번에는 자작 영애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된 것 같아.”

말이 많지 않던 그가 차분하게 늘어놓은 이야기는 평온한 어조와는 영 반대되는 것이었다.남자가 윈데이너 후작가에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저 또한 제 은인임에도 그들이 불편했고, 그래서 오히려 그와 나는 참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하나 제가 후작가에서 해줄 일이 있다고 했을 때에도 틈만 나면 그게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지만, 단연코 이런 걸 떠올린 적은 없었다.

“…제가 영애인 척 시간을 벌어달라고 하셨나요?”

“그전에 고아원 관련해서 이야기를 흘려주는 것도 잊으면 안 될 것 같군.”

어딘가 낯설었다.

남자가 하는 이야기가 온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까지 해서 영애를 빼돌린 그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지금 들은 이야기가 모두 꿈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영애를 어찌하시려고……?”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여준 적 없던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자리한다.자신은 살면서 고아원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해서 영애를 고아원까지 끌고 오라니.거기서 더 나아가 영애인 척 꾸며 시간을 벌라 하였나.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를 닮은 가발을 쓴 채.

‘그럼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는……?’

갑자기 두려움이 덮쳐왔다.

자작 영애가 맞잡은 양손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처음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 저택을 빠져나와 저와 함께하시면 되지요.”

자작 영애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반나절이 채 안 되는 시간일 터였다.

그 시간만 버티면 눈앞의 남자 곁에 머물 수 있다.

‘…영애는 나와 체격도 비슷하고 그의 말대로 따른다면 어쩌면 들키지 않을 것도 같아.’

처음 듣는 상냥한 어조와 제가 늘 꿈꾸던 제안을 넌지시 건네는 남자의 공세에 자작 영애의 이성과 두려움은 이미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의 안위를 걱정하던 마음, 그것이 제 양심을 찔러 왔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 후작 영애는 무사할 겁니다.남자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더는 후작 영애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믿었으니까.

“그래요.”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얹었다.

이내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이 마치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처럼 느껴진 자작 영애의 눈이 촉촉해진다.이윽고 눈매를 접은 채 웃어주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자작 영애에게 더 이상의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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