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콘라드가 내게 열어 보인 곳은 무려 디에고의 방 같았다.얘 이래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걱정이었다.
주인이 없는 방을 허락도 없이 타인에게 열어 보이다니.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제국 대공의 방을.
“콘라드, 설마 목숨 걸고 날 도운 것은 아니겠지?”
누군가의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그럴 리가요.”
어깨를 으쓱여 보인 그를 한 번 보고 디에고의 방에 다시 시선을 두었다.가슴이 콩닥거렸다.
언제나 내 방을 보여주기나 했지, 이렇게 그가 생활하는 곳에 와보기는 처음이라서.커다란 피아노도 보였다.
“피아노!”
“오늘 몰래 들여놓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콘라드 너, 노력했구나?그것 말고도 평소 디에고의 모습과는 다른 것들이 준비되어 있기도 했다.
앙증맞은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에 놓인 형형색색의 디저트 하며.내가 하나하나 눈길을 줄 때마다 콘라드의 얼굴에 뿌듯함이 증가했다.애 많이 썼구나, 콘라드.그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이자 감격에 겨운 얼굴로 콘라드 또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하가 침실에 드실 거예요.”
침실……? 아니, 침실이 맞는데.
갑자기 그 단어를 듣자 머리가 멍해졌다.왜 야하게 들리는 건데.쾅―콘라드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디에고의 침실에 혼자 남은 나.
“침착하자, 침착해.”
내 침실에도 툭하면 그가 자리하고 있지 않았나.
이번에는 그저 장소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내내 되뇌어 봤다.그래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 가슴께에 손을 대고 이리저리 방을 배회했다.그러기를 한참, 저택이 너무 조용한 탓일까.
복도를 걸어오는 듯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내가 있는 방 너머까지 들려왔다.
‘아, 온다.
오나 봐.
어떡해.’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순간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분명 문이 열리는 것까지 보았는데, 그 뒤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뭐야, 뭐지.살며시 눈을 떠보자 문 앞에 서 있는 디에고와 눈이 마주쳤다.
“…….”
쾅―그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또 나 혼자가 되었다.
“…아니, 왜 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전과 다르게 성큼성큼 내게 걸어온 그가 갑자기 두 손으로 내 양 볼을 감싼다.
“이게 무승 짓…….”
내 양 볼을 꾸욱 눌러본 디에고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비비안……?”
꿈이라도 꾸는 듯 몽롱한 눈을 한 그가 의문 섞인 어조로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손에서 힘을 푼 그가 나를 놓아주었다.
“…네가 왜?”
“내일, 아니지.
조금 있으면 각하 생일이잖아요.”
“생일?”
자기 생일인 줄도 모르는 눈치다.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벌써부터 험난함이 예상되었다.
“축하해 주러 왔어요.”
설마 쫓아내지는 않겠거니, 환하게 웃어 보았다.정말 예상도 못 한 일인지 동그랗게 눈을 뜬 디에고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아직 선물도 주지 않았는데, 이미 너무 많이 놀란 것은 아닌가 싶다.분명 하루가 지나기 한 시간 전쯤 후작가에서 출발했으니 그의 생일이 정말 머지않았을 터였다.
“제가 선물을 아주 많이 가지고 왔거든요.”
디에고의 손을 붙잡고 소파로 향했다.
착한 아이처럼 그가 순순히 내 뒤를 따랐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선물 드릴게요.”
생일 전야부터 선물을 건네기 시작해도 생일 당일까지 선물을 건네주고 있을 자신이 있었다.양이 많았다.그렇게 나의 선물 증정식이 시작되었다.엄청 유명한 화가의 그림부터 시작해 푸른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희귀한 보석을 경매에서 낙찰받아 만든 커프스까지.디에고는 매 물건을 건네받을 때마다 놀라워했지만, 물건 자체에 감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 이런 반응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12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일 축하해요, 디에고.”
이렇게 올해 생일은 서로가 가장 먼저 축하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뿌듯했다.
“저도 가장 먼저 축하해 주고 싶었거든요.”
나는 용기를 내 그의 얼굴 가까이 내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끝이 맞닿을 만큼 다가선 후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떼본다.아직은 이게 내 최선이었다.재빨리 멀어지고 나서도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아 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실은 이것 말고도 들이지 못한 선물들이 마차에 가득 실려 있어요.”
밖에 꽃마차 준비해 뒀다.그리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어선 내 얼굴을 따라 디에고가 고개를 젖힌 채 눈을 맞췄다.아까부터 모든 게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것인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 보이는 디에고.그 정신없음을 틈타 해치워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제일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했다.연습 많이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고 제가 생일 때 받아서 엄청 기뻤던 걸 돌려 드릴게요.”
피아노로 향하면서 때마침 그의 머리가 보여 툭 쓰다듬었다.
좀처럼 없는 기회였다.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디에고의 머릿결을 스치며 느껴진 부드러움이 한결 긴장을 완화시켜 주었다.피아노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아까부터 너무 뛰어서 도통 진정되지를 않는다.그 어떤 값비싼 물건을 선보일 때보다 놀라움과 기대가 스민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자 미소가 지어진다.기왕이면 디에고에게도 듣기 좋은 소리이기를 바라며 천천히 선율을 짚어 나갔다.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서툴지 모르는 연주를 한 음, 한 음 정성껏 표현했다.그가 듣던 그것과는 많이 다를 테지만 하물며 디에고가 연주하는 것과도 현저히 다른 듯한 연주였지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마지막 건반을 누르고 나자 창피함이 밀려왔다.
디에고가 해준 연주보다 못했던 거 같고.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서 애꿎은 피아노 건반만 하나하나 노려보고 있는데 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생일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군.”
옆에 털썩 앉은 그가 고개를 틀어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나른한 미소와 곱게 휘어진 눈매가 행복해하는 것 같아서 기쁘다.
“고마워, 비비안.”
허물어지듯 웃는 디에고의 모습에 내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인사는 아직 이르다.
“아직 안 끝났어요.”
비장하게 말한 나는 피아노 위에 올려둔 리본 묶인 종이를 손에 쥐었다.두 손으로 종이를 내밀자 그가 받았다.
“아직 남았어?”
리본을 풀고 찬찬히 살펴보던 디에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크기가 좀 작아서 그건 불만인데, 그래도 여기서 나오는 보석의 색이 디에고의 눈 색을 닮았어요.”
“이건 과분한데.”
전혀 과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대공이 가진 부의 크기를 내가 다 아는데!
“받아주세요.
사실 너무 주고 싶어서 그래요, 내가.”
두 손을 꼭 쥐고 가슴 앞에 모은 내가 간절히 그를 보았다.
선물 주면서 또 이렇게 애걸복걸해 보기는 처음이네.그런데 사실이었다.생일이라는 명분을 이용해 세상 좋은 것은 다 디에고의 품에 안겨주고 싶은 기분이었다.잠시 골똘히 뭔가를 떠올리는 듯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아봐도 될까.”
내 쪽으로 온전히 몸을 튼 디에고가 양팔을 벌려 그 안에 나를 가두었다.나도 손을 들어 그의 품 안으로 한껏 파고들었다.한 손은 허리를, 다른 한 손은 내 머리를 감싼 그가 토닥였다.
“…준비하느라 고생했겠다.”
고생은 없었다.
어느 순간엔 꽤 즐겁기까지 했던 것 같고.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그 말을 입에 담기에는 또 남은 것이 있었다.
이거 선물 받는 거에 질리는 거 아니야? 너무 많이 싸 들고 왔나, 나?마차는 그냥 도로 돌릴까? 후작가로?심히 고민이 되었다.
“네가 준 모든 게 다 좋지만, 비비안의 연주.
가능하면 계속 듣고 싶은데.”
“…어설픈데도?”
어떻게 봐도 잘하는 연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응.
좋아.”
“나도 각하가 피아노 연주해 주는 거 정말 좋아해요.”
그날 이후로 내 방에 있을 때면 종종 피아노 연주를 해주는 그였다.
아마 내 생각이 다 보여서겠지.네 연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살짝 제게서 나를 떼어낸 디에고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자고 갈래?”
얘 지금 뭐래니.
자고 가? 어디서.
여기 대공의 침실에서? 내가 디에고의 생일을 제일 먼저 축하한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 뒤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슬금슬금 그의 눈을 피했다.
잠은 집에서 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그럼 지금 갈까?”
“네?”
지금?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가야 한다고?아쉬웠다.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너와 함께이고 싶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안 되나요?”
최대한 간절함을 표현해 보고자 눈썹도 내려봤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아직 보내고 싶지 않아.”
이내 내게서 몸을 물린 디에고가 나를 들어 안았다.
어느덧 너무 익숙해져 버린 자세에 반항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그리고 그가 커다란 침대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이거, 네 침대 아니니? 갑자기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침대에 왜 누워?아니, 그보다 매번 디에고에게 나던 청량한 향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내 살갗이 닿은 곳에서 그가 누워 잠을 이뤘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비안은 이 시간에 항상 자거든.”
내 옆에 제 몸을 뉘인 그가 한쪽 팔을 세워 머리를 댔다.
나긋한 손길로 이불까지 야무지게 덮어준다.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금 자겠니, 여기서?말똥말똥 디에고를 바라보자 남은 손으로 나를 토닥이기까지 한다.
“비비안, 사랑해 줘서 고마워.”
다정한 목소리가 연신 내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다.내가 디에고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좋아한다고는 했지만.내 마음을 보는 그는 어쩌면 끝없이 이어지는 내 사랑 고백을 듣고 있을지 몰랐다.
나는 종종, 디에고를 볼 때면 특히나.항상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각하.”
내 부름에 마주한 푸른 눈동자에 애정이 가득했다.
분명 내 눈동자에도 그와 같은 것이 넘쳐나겠지.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 어린 목소리로 디에고에게 전했다.
“디에고, 사랑해요.”
부디 이 마음의 10분의 1이라도 네게 닿을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