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독의 출처는 알렌 데이비드 후작입니다…….]침대에 누워 무려 세 장이나 되는 서신을 다 읽자 생각이 많아졌다.스텔라가 보내온 서신에는 그간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다니엘 카터 남작, 새로 등장한 인물에 대해서는 도통 정보를 수집하는 게 어려운지 스텔라답지 않게 서신에서부터 울분이 느껴졌다.그렇다고 레토, 독을 취급하는 상단을 모두 역으로 추적했을 줄이야.시간과 돈과 정성의 결과물이었다.
알렌 데이비드 후작에게서 이 독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또 후작이 엮여 있다고?”
그러나 이 건은 의아하긴 했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지만, 도통 정치 쪽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는데.뭐, 허술하기 그지없는 방식을 보아 그럴듯하기도 했다.그러나 도무지 이 일로 후작이 취할 이득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황가에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제국과 왕국 사이를 이간질해서?”
뜻대로 왕세자가 제국에서 독을 먹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가는.이번에는 내가 독을 먹기도 했고, 왕국의 왕후가 배후에 있었기에 이야기가 좀 달라졌지만.게다가 겁은 또 어찌나 많은지 뭘, 어떻게 해도 도통 우리가 만들어낸 상단에 걸려들지를 않더라.
비오첼라 백작 때와 다르게 시간이 훨씬 더 걸렸네, 진짜.[후작의 수하인 한스 자작이 약재상에게 거래에 대해 묻기 시작했어요.]그간 살펴본 바로 한스 자작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인물은 못 되었다.
그러니 그가 움직였다는 것은 필시 그게 후작의 뜻이라는 건데.
- 해리스가 단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해주지 않는다더군.던컨 공자가 맡은 일은 잘 돼가나 넌지시 대공에게 물었을 때 진저리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그가 해준 답이었다.그 능글맞게 웃는 낯으로 매섭기가 엄청난 듯싶다.
“이걸 순조롭다고 봐야 하나.”
역시 독 관련해서는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는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는지 모두가 살펴보는 중이었다.대체 누가, 어떤 의도로, 무엇을 꾸민 것인지.침대 위에 내려놓은 서신을 다시 들어보았다.[대공 각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온통 일에 관련한 내용으로 빼곡히 채운 스텔라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한 문장.그랬다.
눈이 내리는 북부 대공령이 무척 잘 어울리는 디에고는 겨울에 태어났다.그전에야 대공령에 박혀 사는 대공 따위 안중에 없었으니 몰랐고.작년까지만 해도 생일 축하 연회도 열지 않는 대공에게 축하를 전할 만큼 어떤 관계를 성립하지 못했으니 넘어갔는데.지금은 아니었다.더군다나 내 봄 생일에 걔가 준비한 것들 좀 봐라.
심지어 생일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날 그가 내게 보내온 꽃마차는 또 어떻고.
“어설프게 할 수는 없어.”
이것은 기회이자 시험이었다.어떻게 봐도 난이도가 높기는 했다.
못 가진 것이 없고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없는 데다 가지고 싶은 것조차 없을 것 같은 상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만족시켜?”
애초에 불가능해 보였으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냥 내 처지가 그랬다.
“쉬운 것부터 하자…….”
우선 제일 값비싼 물건들을 한 스무 개쯤 구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디에고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엄청 기뻤던 편지도 쓰고.누구는 자수 놓은 손수건도 건네주고 그런다는데, 손재주가 없는 나는 안 되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혹시나 디에고가 필요로 하는 것은 없을까, 신중히 고민해 봐도 무엇 하나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뒹굴 몸을 뒤집어 모로 눕자 시야에 피아노가 잡혔다.그와 내 색으로 가득한 생일 목걸이도 물론 기뻤지만.그 어느 생일과도 다르게 특별한 날로 만들어준 것은, 제일 먼저 내게 축하를 건네던 디에고의 미소 그리고 우연히 그가 연주해 준 피아노 덕분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디에고도 누가 연주해 주는 건 못 들었겠지.”
그 곡을 그에게 연주해 주던 사람도 이제 곁에 없으니까.천천히 몸을 일으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이게 얼마 만에 건반에 손을 얹어보는 것인지.저번부터 연습해서 디에고에게 들려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조심스레 눌러본 건반에서 청명한 소리가 퍼져 나간다.
“너무 오랜만인데, 되려나.”
기억을 더듬어 망설이듯 시작한 연주는 뒤로 갈수록 물 흐르듯 이어졌다.
여전히 그리워하던 어머니가 연주해 주던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전처럼 슬퍼지지는 않았다.똑같은 걸 원해서 했던 연주였기에 다시는 같은 것을 들을 수 없음을 실감하며 슬퍼하는 일밖에 없었던 행위였는데.지금은 내가 내는 소리가 디에고에게 어떻게 들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것도 좀 더 연습하면 될 것 같긴 한데.”
그가 기뻐해 줄지는 모르겠다.이제 남은 게 뭐가 있을까.
아직도 부족한 것만 같다.
디에고의 생일까지 약 2주가량 남았는데도 벌써 초조했다.
“꽃마차, 꽃마차라.”
전에 꽃마차를 선물하겠다 했더니 소리 내 웃지 않았던가.어쩌면 언제 주나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냥 광산 하나를 줄까.”
광산 하나쯤 늘어난다고 해서 디에고가 기뻐할까, 과연.
생각하는 족족 자신이 없었다.왜인지 선물을 받은 그가 만족스럽게 웃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달칵―
“아가씨, 간식 드세요.”
작은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마리가 테이블 위로 디저트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마리, 곧 디에고 생일이래.”
“각하 생일이요?”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인 마리가 침대에 늘어져 있는 내 양 손목을 쥐곤 일으켜 세웠다.그녀가 이끄는 대로 소파에 안착한 나는 쪼로록 찻잔으로 흘러 들어간 주홍빛 물이 일렁이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왜 쉬세요?”
나는 양팔을 교차해 팔짱을 끼고 미간을 좁혔다.
“각하 생일 선물로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아~ 그거야 아가씨가 주시면 뭐든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모르는 소리.
기본적으로 그런 마음이야 들겠지만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은 좀 달랐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이었으면 좋겠고.”
내 비장한 목소리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마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이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데요, 아가씨?”
너도 그래?
“생각나는 대로 다 사 모아봐야겠어.”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는 게 문제기는 하다만.차에서 피어오르는 달짝지근한 향을 맡으며 디에고를 떠올려봤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정말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을 상상 속에서나마 구경해 본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생일 축하 연회는 여시나요?”
“아마 안 열 것 같은데.”
나서서 제 생일 축하 연회를 열 법한 성정은 아니었다.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도 참석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퍽이나.
“그럼 생일 당일에는 뭐 하시는 걸까요, 각하는?”
어?나야 생일 축하 연회를 열기도 했고.
디에고는 원래 아무 때나 내 방을 드나드는 인물이었으니 밤 12시가 지나자마자 제일 먼저 내게 축하를 건네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터였다.그런데 나는?나도 제일 먼저, 누구보다 빠르게 네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은데.난관이 예상되었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 비비안 윈데이너, 납치당하다 】
할 만큼 했다.
후회는 없었다.지난 며칠간 밤낮으로 피아노 연습도 했고.
시중에 값비싸고 좋다는 물건이 나오면 묻지도 않고 돈부터 내밀었다.
“쯧, 마차도 하나 맞추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제작은 못 하고, 크고 좋은 마차를 하나 샀다.하고 싶은 말이나 좋은 생각이 나면 그날의 기분에 따라 편지지를 골라 적어둔 것이 어쩌다 보니 일곱 통이나 되었다.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작은 광산도 하나 준비해 봤다.
크기는 좀 작지만 디에고의 눈동자 색을 닮은 푸른 보석을 채취할 수 있는 거라 선택해 봤다.오늘 입은 드레스마저 푸른색이다.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봐야 하는데.예상대로 디에고는 제 생일 관련한 그 어떤 연회도 허용치 않았다.
- 혹시 각하의 일정을 좀 알 수 있을까?은밀히 기별을 넣어 만난 디에고의 보좌관 콘라드.
그를 앉혀두고 나는 일을 도모했다.
- 얼마 안 있으면 각하 생일이라 제일 먼저 축하해 주고 싶어서.수줍게 웃자 잠시 내 말을 곱씹듯 생각에 잠기던 보좌관의 얼굴이 이내 환해졌었지.
- 좋은 생각이십니다! 뭐든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어찌나 적극적으로 계획에 동참해 주던지, 충심이 지극한 사내였다.그 덕에 지금 달빛만이 색을 잃지 않은 이 밤.나는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 본다.12시가 지나자마자 가장 먼저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디에고가 있는 대공저, 야밤에 그곳에 쳐들어간다.언제나 그가 그랬듯.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가씨.”
불안한 듯 연신 주위를 살피며 눈을 굴리는 마리.
“걱정 마.”
제가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냐며 발을 동동 구르는 마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겼다.
“대공저에 도착하면 콘라드가 다 도와주기로 했어.
걱정할 거 하나 없다니까?”
콘라드의 말에 따르면 지금 이 시간에 그는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거라고 했다.제 집무실에 앉아 지루한 서류에 사인이나 하고 있을 거라고.
- …집무실에 피아노는 없지?
- 피아노요? 피아노가 필요하십니까?
- 필요하기는 한데…….
-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준비해 두겠습니다.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내가 말하는 족족 흔쾌히 긍정을 표하던 콘라드.
정작 그가 어찌할지는 듣지 못했지만.믿는다, 콘라드 너.불안한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마차에 올라섰다.이 시간에 이렇게 나와보는 일이 흔치 않아 마차 창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다 낯설게 느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느려지고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어딘지 조금 들떠 보이는 콘라드가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이리 대공저의 문을 열어주어 고마워, 콘라드.”
저만 믿으라던 그답게 앞장서서 걷는 걸음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각하는 지금 집무실에 계셔?”
“예.
평소의 모습 그대로십니다.”
곧 생일인데, 아직도 일을 하고 있구나.콘라드의 뒤를 따르며 눈에 담은 대공저는 고즈넉하고 고요했다.
저택도 사람의 분위기를 닮은 것 같아 웃음이 났다.그리고 마침내 콘라드가 아련한 미소를 머금으며 어느 방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그 문의 크기가 범상치 않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래도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