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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76화 (76/109)

76화

*수도 내 대공저.해가 떠오르고 나서야 제 집무실로 들어선 디에고의 옷차림이 어제와 같았다.비비안이 독을 마셨던 그때 이후로 생긴 그의 습관 중 하나.

바로 그녀가 잠이 들고 나면 한참을 그 곁을 지키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되었다.그 사건 이후 매일 밤 비비안의 방 발코니로 숨어 들어가는 그였다.

때로는 그녀가 깨어 있을 때부터 함께했고, 때로는 이미 잠든 그녀의 곁을 지키다 돌아오곤 했다.디에고가 소파에 길게 몸을 뉘었다.팔을 들어 제 눈가를 가린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비비안은 감춘다고 애썼지만,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제가 그녀의 생각을 보는 한.

“쓰러질 정도로 울지는 말지.”

황태자의 마음을 거절하는 길이라 제 존재를 반기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냥 걱정이 되어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다.비비안이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가기까지만.이내 황태자궁 정원에 주저앉아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우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둘 수 없었다.결국 탈진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낸 탓에 툭 떨궈진 고개를 받쳐 들었던 순간.비비안을 안은 채 그대로 대공령까지 가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대공령 내 저택의 문이란 문은 다 닫아건 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아야겠다고.그녀가 더는 그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안락한 새장을 주고 싶다는 허튼 생각.비비안을 위하는 척 제 욕심을 가득 채워보겠다는 음험한 마음이 저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 마음의 작은 조각을 그녀에게 보였을 때마저 저를 신뢰한다는 맑은 눈빛을 보내던 비비안.

- 그럴까요? 어디가 좋아요?너무 울어 붉게 물든 눈가가 저를 얼마나 흔드는지 모르는 비비안은 그 어여쁜 얼굴로 웃었다.

“욕심대로 굴면, 분명 울겠지.”

제 뜻대로 그녀를 휘두르는 모습을 상상했으나 웃지 않는 비비안만 남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절대 제가 보고 싶지 않은 미래기도 했다.쾅.힘차게 열린 문으로 들어선 콘라드가 디에고가 누운 소파 앞에 멈춰 섰다.

“각하, 또 윈데이너 후작가에 계시다 오신 겁니까.”

대체 멀쩡한 제집 놔두고 매일 왜 저러나 모르겠다 생각한 콘라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 상관을 훑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결혼을 하세요, 결혼을.”

“비비안이 대공비 하기 싫어하는데.”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심하게 답한 디에고가 몸을 일으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내가 대공을 그만두면 그땐 결혼해 주려나.”

기가 막힌 제 상관의 발언에 잔뜩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저은 콘라드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비비안 윈데이너 영애 관련해서는 그 어떤 대화도 되지 않음을 상기한 그는 관심을 끄고 제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레사 측에서 인원을 요청해 왔습니다.”

얼마 전 받은 보고에서 독의 출처를 좇아 올라간 곳에 낯선 이름이 하나 등장했다 들었다.

그 레사가 쓸 만한 정보를 하나도 캐지 못하고 애먹고 있다는 인물.

“다니엘 카터 남작이라고 했나.”

“예.

남작을 캐는 대신 레토를 취급하는 모든 상단의 판매 기록을 다 뒤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사람이 더 필요한 거군.

“이렇게까지 흔적도 뭣도 없어서, 더 수상하다고 눈에 불을 켜더군요.

조만간 레사가 뭐라도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간 레사와 일을 진행해 와서 그런지 콘라드 나름의 존경과 신뢰가 자리 잡았다.

“필요하다는 만큼 내줘.”

시간을 확인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한숨도 못 주무신 거 아니세요?”

“리안이 나를 찾아서.”

황태자가 붙여 놓은 비비안의 그림자, 한 번도 제게 말을 걸지 않던 그가 제 주군이 보냈다며 말을 전했다.

- 황태자 전하께서 날이 밝거든 찾아와 주시기를 청한다 하셨습니다.제가 비비안의 곁에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행동이었다.지금 나가면 또 언제 마주칠까 싶어 콘라드가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각하, 생일이 얼마 안 남으신 거는 알고 계세요?”

“생일?”

뒤를 돌아본 디에고의 눈썹이 찌푸려져 있다.

비비안과 황태자의 생일은 지났는데, 제가 신경 써야 할 생일이 또 뭐가 남았는지 의문스럽단 표정이었다.

“각하요, 각하 생일.

모처럼 수도에 머물고 계신데 생일 축하 연회 안 여세요? 어떻게 할까요?”

작년에도 이맘때쯤엔 영지로 돌아가 있었기에 아주 오랜만에 수도에서 맞는 생일이었다.매번 제 생일이면 대공령에 있었으니 이런 고민은 해본 적이 없었다.

황궁에서 선물이 오고 콘라드를 비롯한 수하들의 축하를 받기는 했어도.이번에도 새삼 연회 따위를 열 생각은 없었다.

“필요 없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답을 받은 콘라드가 샐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하니까 다른 귀족들도 그러려니 하시겠죠.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콘라드의 말을 끝으로 디에고가 집무실을 나섰다.저택을 나와 말에 올라탄 그가 빠르게 황궁으로 향했다.

사실 그 어느 때보다 리안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울면서 복도를 걷던 비비안에게서 새어 나오던 이야기.그간 얼마나 황태자가 그녀를 아껴주었는지.

그런 그를 비비안이 얼마큼 의지하고 따랐는지 그 역사가 뒤죽박죽 범람했었다.어제의 기억을 되새기며 들어선 황태자의 집무실.이름 아침부터 집무실 책상에 단정히 앉아 있는 리안을 보며 디에고는 차마 그 어떤 말도 쉬이 꺼낼 수 없었다.

“오셨습니까.”

서류에서 눈을 떼고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이 분명한 몰골이다.

“…비비안은, 괜찮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해줄 답이 마땅치 않았다.자리에서 일어난 황태자가 디에고를 스쳐 소파로 향했다.

제 앞을 가리킨 리안이 디에고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두었다.사촌 형이자 저와는 전혀 다른 성향 덕에 동경하기도 했고, 제국의 한 기둥으로서 충실히 임해주는 믿을 수 있는 협력자이기도 했던 디에고 브라이트 대공.그런데 지금은 그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여겨졌다.

‘…사랑하는 이의 연인이라.’

물끄러미 디에고를 바라보던 리안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비비안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디에고 또한 무엇을 원하는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못했다.받아들이기엔 그녀를 향한 제 마음이 너무 컸다.

“알고 계시겠지만.”

“…….”

“대공, 간단히 접어지는 마음은 아니라.”

리안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한 손을 들어 제 미간을 꾹 누르던 그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눈을 감은 리안의 목이 메었다.

시간이 지나면 편하게 두 사람을 보는 날이 정말 올까 싶었다.아직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데.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제가 대답을 해놓고도 남의 마음을 가지고 왈가왈부한 꼴이 된 것 같아 디에고의 미간이 좁혀졌다.이어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황태자가 앉은 쪽에서 들려왔다.

“그러다 혹여 비비안이 마음을 바꾸는 날이 오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때까지 저가 변치 않고 이 마음을 가진 채 그녀 곁에 머물고 있다가 그 자리를 꿰차기라도 하면.달콤한 만큼 허망한 상상이었다.디에고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제 어떤 것도 내던져줄 의향이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쥔 것은 그 무엇도 없었으니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비안만큼은 아니었다.디에고에게 비비안은 생애 처음으로 제가 갈망한 사람이었다.

제 세상에 빛을 선사해 준 이.

그에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비비안을 통해서만 만들어졌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지요.”

부드럽게 대꾸한 리안이 디에고와 눈을 맞추고 화사하게 웃었다.물론 정말로 마음을 접지 않은 채 비비안 곁을 맴돌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마음을 품은 채로 비비안이 불편하지 않게 대할 자신이 없었으니까.좋아하는 이를 위해 제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 욕심을 버리고 곁에 남는 것임을 잘 아는 리안이었다.리안의 주변에 흐르는 슬픔과 체념을 한참 응시하던 디에고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상황에서도 황태자의 기운에는 칙칙한 구석이 없었다.여전히 맑아서 더 안타까운 진심이 디에고의 눈에 보였다.

“…비비안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테이블로 향했던 시선을 들어 의아해하는 황태자와 시선을 교환한 디에고.

“네가 좋아한다고 해줘서 기뻤다더군.”

말을 전하는 것이 못내 마뜩잖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디에고의 말이 느리게 이어졌다.

“…네가 원하는 방식은 아닐지 몰라도 너를 많이 좋아한다고, 비비안이 그리 생각하고 있어.”

비비안이 말해주지 않았는데 알 수 있을 법한 내용은 아니었다.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혹은 그 누구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한 리안이 미소 지었다.대공이 제게 전해준 비비안의 마음이 퍽 기꺼워서.제 고백에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안함만을 보이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답임이 틀림없었다.

“전하고 싶지 않았을 터인데, 이리 저를 많이 생각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형님.”

어느새 장난기를 담은 리안이 눈매를 휘자 디에고 또한 찌푸렸던 인상을 지우고 고개를 기울였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비비안이 전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한 것 같길래.”

그마저도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는 디에고의 말에 리안이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가 됐든.

한결 기운이 나네요.”

어딘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을 확인한 디에고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으나 정작 본인은 알지 못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디에고가 일어서자 리안 또한 제 집무를 마저 보기 위해 책상으로 돌아갔다.

“생일 연회는 따로 여실 것 같지 않으니, 대공저로 선물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생긋 웃는 얼굴로 덧붙인 리안에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디에고가 빠른 걸음으로 황태자궁을 벗어났다.채 아침이 지나지 않은 이른 시각.이제는 너무 익숙한, 어쩌면 수도 내 대공저보다도 머문 시간이 많을 듯한 비비안의 방 발코니 아래.

“지금쯤 자고 있겠군.”

커다란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오른 그가 나무 기둥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비비안을 눈앞에 두지 않은 상황에서도, 가까운 곳에 잠들어 있을 그녀의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 디에고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었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까.”

제 앞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먹을 비비안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의 입가가 절로 호선을 그린다.황태자 일로 마음이 불편할 테니 제대로 식사하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디에고가 비비안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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