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어느덧 불어오는 바람에 찬 기운이 섞였다.
완연한 겨울을 맞이하기 전, 황태자에게 답을 돌려줘야 했다.전처럼 그 순간이 두렵지는 않았다.
“아가씨, 정말 오늘 입궁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응, 나 멀쩡해.”
이러다 겨울 내내 저택 밖으로 못 나가는 거 아닌가 싶게 모두가 나를 과보호하는 중이었다.
거의 다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안색이 흐려지면 온통 독 때문이라며 성화였다.저번에 발 좀 삐끗했을 때, 하필 그 모습을 목격한 마리는 저러다 호흡곤란이 오는 것은 아닌가 싶게 숨을 몰아쉬더라.근처에 있던 사용인은 쟁반을 놓쳐 컵 깨지는 소리가 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돌이켜보면 그전에도 내 몸은 이 정도 부실함은 늘 지니고 있었는데 말이다.그렇게 어쩔 수 없이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아버지가 허락해 준 그날이 왔다.
‘어쩌다 외출을 허락받는 지경까지 왔는가.’
아직 리안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황궁에서 저택으로 돌아갈 때 만나고 처음 보니 벌써 날이 꽤 지나 있었다.
그동안 꾸준히 후작저로 황궁에서 온갖 물건을 보내오기는 했다만.최근에는 심지어 왕세자까지 선물을 보내왔었다.저 대신 독을 먹은 것도 있고, 심지어 그 독을 사주한 자가 그의 모후이기도 하고.
뭐라도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그의 입장은 이해가 갔다.
“…그래도 좀 지나치지 않나.”
어디 제 금고 하나를 털기라도 한 것인지 선물을 가득 실은 마차만 서넛 들어왔다고 들었다.갖가지 보석과 디저트는 또 왜 그렇게 많이 보낸 것인지.콕―테이블 위에 놓인 쫀득쫀득한 초콜릿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어.’
보내준 것이 하나같이 새롭고 맛도 있었다.나중에 왕국으로 제국 특산물이라도 보내주든가 해야겠다.
왕녀 것도 같이 보내야지.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디저트를 보며 마리를 불렀다.
“영애들은 요새 뭐 하고 지내?”
“셀빈 자작 영애랑 판델 남작 영애는 항상 무언가 하느라 바쁘고, 라야 자작 영애는 음… 쉬시는 것 같고요.”
비오첼라 사건 때, 구해낸 영애는 모두 다섯.
처음 가면무도회에서 만났던 셀빈 자작 영애는 그 총명하던 눈빛대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다.판델 남작 영애는 아직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라 고민한다고 들었고, 그때 같이 구해낸 씩씩한 영애는 금세 기운을 차리더니 일을 찾아 떠났다.유독 유약해 보이던 두 영애 중 한 명은 다시 제집으로 돌아갔고, 한 명은 후작가에 남았는데.딱히 무언가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고, 그냥 시간을 허비한다고 셀빈 자작 영애가 와서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워낙 큰일이었으니 쉴 만도 하지.”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도, 회복하는 속도도 제각각인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그녀가 좀 느슨하게 일상을 보내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디저트를 좀 나눠 먹을까.’
오랜만에 영애들에게 티타임을 청해볼까 고민하던 찰나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라야 자작 영애가 보였다.
“오, 영애!”
조금 크게 소리치면 닿을 거리에서 그녀가 내 쪽을 돌아봤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인사를 하는 자작 영애를 향해 머리 위로 크게 손을 흔들어 답했다.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멈칫한 그녀가 느린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나 저 걸음 알아.
상대와의 만남이 내키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그를 향해 걸어갈 때 저렇게 걷더라, 스텔라도.셀빈 자작 영애와 판델 남작 영애, 둘은 종종 나와 티타임을 하며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확실히 이 영애랑은 그런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간신히 맞은편 의자에 앉기는 앉았는데 도통 시선을 맞춰주지 않는구나.
“지내는 데 불편한 것은 없나요?”
“…없습니다.”
제가 답해놓고도 어조가 이상했는지 자작 영애가 입을 달싹이며 말을 이었다.
“워낙 잘해주셔서요.”
괜히 나까지 어색해져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그냥 가던 길 가라고 보내줘야겠다, 이 친구.찻잔을 내려놓고 시선을 들자 자작 영애의 머리에 곱게 자리한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 장식이 무척 예쁘네요, 영애.”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가 제 손으로 머리 장식을 감싸 쥐었다.그 격한 반응에 나까지 당황해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예, 선물 받은 것입니다.”
그냥 할 말도 없고, 마침 눈에 들어오기도 해서.
그래서 넌지시 칭찬을 해본 것인데, 반응이 좋지 않았다.내가 뺏어갈까 봐 그러니? 나 그런 애 아닌데.
“그러셨구나.
영애랑 무척 잘 어울려요!”
잿빛 머리칼에 얹어진 붉은 새가 퍽 눈에 띈다.
머뭇거리며 머리에서 손을 뗀 영애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연인에게 선물이라도 받은 것인지 기쁨과 부끄러움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나 이 누그러지던 분위기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또다시 할 말이 없어진 우리.
끝내 내가 그녀에게 자유를 선사하니 올 때와 다르게 재빠르게 멀어졌다.
“내가 불편한 걸까, 아니면.”
손에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였다.
라야 자작 영애가 숨기지 못하던 순간순간의 표정들.
“내가 싫은 걸까.”
*황태자궁 집무실.문 앞에 도착하고도 내 방문을 알리지 않은 채 한참 서성이는 중이다.
“후우.
괜찮아.
괜찮아.”
울지 않을 거였다.
오는 동안 내내 다짐했다.눈을 감고 큰 숨을 내쉬고 나서야 나는 황태자를 만나기 위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언제쯤 들어오려나 했는데.”
소파에 앉은 채 나를 맞이한 리안이 환하게 웃었다.
그의 등 뒤로 창 가득 들이치는 햇살이 리안의 금빛을 더 찬란하게 만들었다.
“알고 계셨어요?”
대답 대신 제 앞자리를 권한 리안의 시선이 내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몸은 이제 괜찮은 건가.”
“네.
전하 덕분에요.
황궁에서 어찌나 극진히 저를 돌봐주던지요.”
“그대를 아끼는 자가 너무 많아서, 이 황궁에.”
그건 나도 의외였다.
생각 이상으로 내 걱정을 해주던 황제 내외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 따스함이 좋았다.
한 가문의 영애라기보다 비비안이라는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었던 것 같아 더 기꺼웠다.
“예, 두 분께 방금 인사드리고 온 참이에요.”
긴장한 탓에 목이 말라 찻잔을 들었다.
천천히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내려놓는데 마음이 이래서일까, 손바닥만 한 찻잔이 무겁게 느껴진다.
“생일이 지났으니, 이제 더는 내게 시간이 없군.”
장난스레 말하는 리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자리했다.
“전하.”
황태자가 말없이 웃음으로 기다리고 있음을 전해왔다.
“꽤 오랜 시간 제 곁에서 저를 봐주시고, 아껴주신 거.
정말 감사해요.”
그가 얼마나 나를 돌봐왔는지 안다.
“그리고 제 무심함이 전하를 상처 입혔을 텐데, 미안해요.”
내 사과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어요.”
네 마음을 알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준다는 건 기쁜 일임이 틀림없었다.과분하다고도 생각했고, 왜 좀 더 일찍 알아채지 못하고 너를 외롭게 만들었을까 후회도 많이 했다.고백을 받고 리안과 그 마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고 싶은 말도 늘었지만, 정작 마지막에는 그 어떤 말도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어려운 일을 하게 해서.”
여전히 다정한 너의 목소리.
“미안해, 비비안.”
이래서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런 순간마저 네가 나를 다독여야 할까 봐.리안이 그런 사람이라서.나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네가 사과할 일은 없다고, 끝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돌려주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이라고.
“너를 좋아해서 다행이야.”
가슴이 아팠다.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말아 물고 눈에 힘을 줬다.
“저도, 제 곁에 있어준 사람이 전하라서 다행이에요.”
내 삶이 너를 떼어놓고 설명이 될까.
언제나 황태자비 내정자 자리를 거부했지만, 한 번도 리안의 곁을 벗어나고 싶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그럼 그대가 간신히 눈물을 참는 것 같으니 이만 보내줄까.”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왔다.손을 내밀고 나와 눈을 맞춘 너.
그의 눈동자 안에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넘실대고 있었다.그 손 위에 내 손을 포개고 소파에서 일어섰다.고작 소파에서 집무실 문까지 향하는 길이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길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 안은 온통 둘에게서 넘쳐 나온 애틋하고도 서러운 감정들로 가득했다.
“끝까지 배웅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어려울 것 같군.”
그가 내 손을 한 번 꼭 잡더니 느리게 놓아주었다.
“고마웠어, 비비안.”
“…저도 감사했어요, 전하.”
닫힌 문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걸었을지 모르는 황태자궁 복도를 지나는 내내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차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잔뜩 흐려진다.행여 누구라도 마주칠까 싶어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흐윽, 미안.
정말, 흑, 미안해요.”
닿지 못할 사과를 연이어 허공에 뱉어내며 걸어가던 중, 구두가 꺾여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고개를 숙이자 드레스 치마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이윽고 내 울음소리만 번져가던 조용한 정원에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
가만히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디에고.
그가 상체를 숙여 나를 안아 들었다.왜 여기 있는 걸까, 정말.
어째서 딱 지금 이 시간, 정원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기어코 찾아내고 마는 건지.그는 아무런 질문도,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나를 안아든 손에 힘을 줄 뿐이다.그렇게 디에고의 셔츠가 흠뻑 젖을 때까지 나는 그 품에서 오열했다.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걸까.
눈을 뜨니 내 방 침대였다.
힘없이 밖을 살피자 이미 밤이 되어 있었다.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귓가에 피아노 소리가 흘렀다.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익숙한 뒷모습이 피아노 앞을 차지하고 있다.
“…디에고?”
잔잔하게 흐르던 피아노 소리가 우뚝 멈추고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네가 이렇게 쓰러질 때마다 너를 가두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들어.”
이내 눈꼬리를 내리며 기운 없이 웃는 모습이 처연해 보였다.
“…제발, 비비안.”
고통스럽다는 듯 제 얼굴을 한 번 문지른 디에고가 느리게 걸어왔다.그대로 내 위에 올라탄 그가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네 몸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나랑 약속해 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얼마간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디에고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약속, 해줄 수 있지?”
나는 그저 그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