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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74화 (74/109)
  • 74화

    *황태자의 집무실.

    그가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를 일정한 속도로 쳐내고 있었다.그런 반듯한 황태자의 모습과 너무나 상반된 분위기를 풍기며 소파에 늘어져 있는 한 사람.

    “전하, 일이 좋으십니까.”

    왕세자 에녹의 느릿한 말투에도 황태자는 손을 움직이며 눈만 슬쩍 들어 보였을 뿐이다.

    “그대는 매번 일이 좋아서 하는가 보군.”

    그 무감한 목소리에 잠시 생각하는 듯 동공을 굴리던 왕세자가 피식 웃었다.

    “일 자체는 싫어도 그 덕에 바뀌는 왕국의 모습은 꽤 좋아합니다.”

    제 나라를 그려보는 듯 눈매를 휘고 웃던 그의 시선이 황태자를 향한다.한 번을 멈추지 않던 펜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에녹.

    “…그대에게 제법 왕세자라는 자리가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혀 뜻밖의 말을 들은 왕세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벌어진 입마저 다물지 못한 채 황태자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평온한 펜 놀림만이 서류를 넘나들고 있었다.더는 제게 관심을 주지 않는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가 벽 한쪽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그림을 감상했다.나무의 분홍 꽃잎이 바람에 잔뜩 휘날리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는 뭘 좋아해?”

    그의 물음과 동시에 뒤편에서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펜 소리가 크게 났다.왕세자가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듯한 황태자의 얼굴이 저를 향해 있다.수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왕세자의 의문이 풀렸다.제가 갑자기 비비안 윈데이너를 떠올린 이유.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금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저 어여쁜 분홍이 누구의 분홍인지.

    왜 자신이 지금 비비안 윈데이너를 떠올리고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나 대신 독을 먹은 거라.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어서 물어본 것인데.”

    한쪽 입꼬리를 늘어뜨린 왕세자가 황태자의 흔들리는 금안을 쳐다보았다.

    “전하가 퍽 놀라셨나 봅니다.”

    그사이 제 표정을 가다듬은 황태자가 별말 없이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대답하지 않는 그를 보며 미소 지은 에녹이 본격적으로 소파에 드러누워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비비안 윈데이너가 후작가로 돌아간 지 꽤 시일이 지났다.무사히 회복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태자의 상태만 봐도 충분히 짐작 가능할 정도였으니.황궁에 내내 머물던 대공은 영애의 귀가 후 모습을 감췄다.

    ‘이번엔 후작가 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또 한 사람.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황태자와 대공 그리고 붉은 머리칼의 영애.말을 마치고 돌아가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히 인사하고 멀어져가는 모습이 레사의 수장다웠다.

    “저도 이만 돌아갈 때가 되었지 싶습니다.”

    왕세자의 말에 황태자가 펜을 내려놓았다.

    “아직 왕국에서의 일이 다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왕녀가 돌아가 일의 전말을 전하고 개중 어느 누가 왕후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는지, 과연 누가 왕세자의 불운에 기뻐하는지 조사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제가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말이지요.”

    쉴 만큼 쉬었다 생각했다.

    더불어 제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알아냈다 싶었고.

    “왕후의 꼬리는 제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허해주실 건지요.”

    사용인에게 독과 지령을 건넨 자는 왕국민이 맞았다.

    그 외에는 죄다 명확하지 않았지만.

    “제국에서 죄를 지었으니, 제국에서 벌하는 것이 맞지만.”

    제 어미의 사주에 의해 독을 먹을 뻔한 왕세자가, 이번만큼은 조금 안타깝다 여긴 황태자가 선뜻 말했다.

    “데려가시지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은 에녹이 평소의 능청스러운 그로 돌아왔다.

    “전하, 외로우시면 언제 한번 왕국으로 놀러오세요.

    제가 극진히 모시도록 하지요.”

    “사양하겠습니다.”

    거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왕세자가 자기도 모르게 분홍빛이 가득한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기 드문 사람이기는 합니다.”

    “…….”

    “꽤 사랑받는 것 같길래 어떤 이인가 궁금했는데.”

    왕세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그림 가까이 다가갔다.

    “딱 이런 느낌이더군.

    사랑하고 싶게.”

    가만히 왕세자의 말을 들어주고 있던 황태자가 그와 눈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그대는 모르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잘 웃지 않는 리안이 지어 보이는 웃음에 짐짓 놀라던 에녹이 끝내 소리 내 웃었다.*

    - …비비안은 값비싼 보석과 구하기 어려운 디저트를 좋아하지.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서던 제 뒤로 들려온 리안의 목소리.쳐다보지도 않으며 무심히 내뱉은 말은 어떻게 봐도 의도가 다분했다.

    네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런다고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최고급으로 준비해서 드려라, 이거군.”

    왕국에 돌아가기 전 제국의 보석이나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거닐던 그의 눈에 검고 커다란 형체가 잡혔다.

    “오호.”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뒤를 쫓던 왕세자가 이름을 불렀다.

    “디에고.”

    우뚝 멈춰 선 디에고가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부른 것이 왕세자 에녹임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기서 다 보는군.”

    “…갈 길 가지 그래.”

    다시 걸음을 옮기는 디에고의 보폭에 맞춰 곁에서 걷던 왕세자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왕국으로 이만 돌아갈까 하는데.”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대공의 팔을 붙잡아 멈춰 세운 왕세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가기 전에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게 무엇이든 필요 없다는 뜻을 디에고가 온 얼굴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를 다 알아듣고도 모른 척 에녹이 제 할 일을 한다.

    “자.”

    왕세자가 꺼내 디에고의 손바닥에 올려둔 것은 작은 명패 같은 것이었다.

    왕궁의 상징이 새겨진.

    “왕국의 그 어디든 다닐 수 있는, 내가 신분을 보장한다는 표식이지.”

    “필요 없는데.”

    디에고의 차디찬 반응에도 한 번 비웃을 뿐 흔들리지 않던 왕세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공이 억지로 제 손에 돌려줄까 싶어 거리를 확보한 것이었다.

    “가지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언제 한번 비비안과 함께 왕국에 놀러오라며 소리친 에녹이 재빠르게 제 모습을 감췄다.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디에고가 제 손 위에 놓인 것을 잠깐 보고 한숨을 쉬었다.예나 지금이나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에녹의 성정을 잠시 탓한 그는 이내 제 갈 길을 갔다.*어둠을 틈타 로브의 후드를 코끝까지 뒤집어쓴 여인이 거리를 걸었다.

    깜깜한 거리를 더듬더듬 걷던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사내가 입을 틀어막았다.

    “잘 지냈나.”

    한없이 확장되었던 눈이 목소리를 듣고는 안정을 찾아갔다.그런 그녀의 변화를 알아챈 사내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우자마자 여인이 뒤를 돌아 품에 안겨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애절한 여인의 목소리와 다르게 사내는 감정 하나 없는 몸짓으로 그녀를 품에서 떼어냈다.어둠 속에서 잘 구별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이목구비가 퍽 수려함을 아는 여인이 미소 지었다.

    큰 키와 너른 가슴 또한 만족스러웠다.

    “조만간 해줄 일이 있어.”

    고저 없는 목소리에도 세상 달콤한 말을 들은 듯 기쁨에 찬 얼굴의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하세요.

    무엇이든 제가 할 수 있어요.”

    남자는 제가 지금의 처지가 되기 전부터 저를 알아준 이였다.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부유한 데다 외모까지 출중한 그와 저는 지금쯤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

    아직도 가끔 그런 꿈을 꾸며 잠들고는 했다.

    “때가 되면 다시 일러줄 테니 기다려.”

    말은 다정하게 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제가 전과 달라졌음에도 한결같이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한창 공포와 외로움에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에도 제 품을 내어주고 토닥여준 사람.남자가 몇 번이고 그녀를 위로한 그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무언가요?”

    “선물.”

    선물이라는 단어에 화색이 돈 여인이 상자를 꼭 쥐었다.

    “지금 열어봐도 되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확인한 여인이 재빨리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어도 기뻐할 자신이 있을 만큼 이미 선물을 받았단 자체로 행복했다.

    “어머!”

    붉은 보석으로 이뤄진 앙증맞은 새 모양의 머리 장식이 빛 하나 없는 밤하늘 아래서도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귀한 것을.”

    감동에 벅차오른 여인이 대뜸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만 돌아가지.”

    짧은 만남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남자를 귀찮게 할 수 없었던 여인이 몸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금방 또 만날 수 있는 거지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남자가 말했었다.그녀가 그 저택에 남아 해줄 일이 있다고.

    저를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그 할 일을 하고 나면 함께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다시 한번 사내를 꼭 껴안았다 놓는 그녀였다.그를 뒤로하고 돌아가면서도 몇 번을 진득한 시선을 보내던 그녀가 마차에 올라탔다.지금 제가 돌아가는 곳은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곳이었으나, 거기서 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쯤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은인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대저택의 주인이 누렸을 모든 것들을 아주 조금씩 나눠 받을 때마다 그 격차를 여실히 느끼곤 했다.처음에는 놀라웠고 즐거웠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부러워졌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기댈 곳도, 가진 것도 없는 마음은 자꾸만 삐뚤어지곤 했다.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그렇게 다 가졌는데, 이런 시기, 질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며 합리화한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끝이 안 보일 정도로 광대한 저택을 한 번 본 그녀가 욕망 어린 한숨을 크게 내쉰다.이내 여인이 품 안에 상자를 꼭 껴안은 채 윈데이너 저택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오늘만큼은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온통 남의 것만 있는 곳에서 이제야 진정 온전히 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손에 쥐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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