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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73화 (73/109)

73화

간신히 덮었던 기억인데.이렇게 현장으로 돌아온다고? 그것도 당사자하고 같이?

‘그냥 저택에 있는 편이 나았던 거 아닐까.’

분명 저택을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기쁨이 넘쳤는데 막상 여기 오니까 기분이 가라앉는다.창피했다.

“이렇게 생겼었군.”

생경한 풍경을 보듯 디에고가 여기저기 시선을 두었다.

왜 그럴까.

너는 그날의 기억이 온전할 텐데 말이야.

“밤이었고.

비비안을 신경 쓰느라 주위가 안 보였거든.”

내 생각에 일일이 답해주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비밀 아니에요.”

호수를 바라보던 디에고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가늠하듯 오래도록.

“그래서 곤란해?”

곤란한가.

사실 이제 더 이상 황태자에게 이 사실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무엇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니 알겠더라.

“각하랑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싶어요.”

겨우 만나서 운이 좋게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마음껏 사랑해 줄 수 없는 건 이상했다.어느새 다가온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이제는 습관이 된 것은 아닐까 싶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매번 일일이 부끄러워하는 내가 너무 이상한 걸까.여지없이 달아오르는 뺨에 손을 대고 있자 한 걸음 더 다가온 그가 웃었다.

“이런 거 말인가.”

다분히 놀리는 투로 말하는 디에고를 한 번 흘겨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술 먹고 열 올라서 뛰어들었던 호수.

물이 참 맑구나.

내 드레스가 흠뻑 젖자 물기를 짜주던 그가 떠오른다.참 자상하기도 하지.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고요함 속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이것마저 새삼스레 감동스럽다.

‘사람이 죽다 살아나니 감성적이 되는구나.’

아마 이번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실감하기 어려웠을지 모를 내 진심도 깨달았다.나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디에고를 좋아하고 있었다.멈춰서 바람을 맞고 있는 내가 걱정인지 고개를 틀어 들여다보던 그가 벌어지는 로브 자락을 여몄다.

“그만 돌아갈까.”

가을을 지나는 바람이 생각보다 차다 싶었는지 귀가를 종용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그의 두 손이 내 양 볼을 감쌌다.

“걱정돼.”

그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눈빛에 까치발을 들어 디에고의 입술을 향해 솟구쳤다.

이건 본능에 가까웠다.입술이 저렇게 탐스러울 일인가.쪽―내 갑작스러운 돌진은 예상 못 했던 일인지 얼굴을 붙들고 있는 그의 손이 굳었다.느리게 눈을 깜빡인 그가 손에 힘을 줘 내 얼굴을 고정했다.

이내 맞닿은 입술이 전보다 깊숙이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는다.한참 머물러 있던 그가 틈을 내어주어 숨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준다.

하나 다시금 갈급하게 내 입술을 찾은 디에고로 인해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제 등을 두드리고 나서야 그가 몸을 물렸다.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몰아쉬는 날 보는 디에고의 얼굴에 나른한 만족감이 가득했다.내 눈꼬리에 손을 갖다 댄 그가 눈물을 담아간다.

그 느릿한 손짓을 따라가는데, 투명한 눈물방울이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

“그간 아파서 울던 모습은 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꽤 기껍군.”

생각났다.그때도 자그마한 도발을 한 대가로 얼마나 그에게 내 입술이 시달렸었는지.

“…집에 갈래요.”

귀까지 열이 오른 것을 느끼며 나는 항복했다.*디에고와의 외출 후, 마리의 대성통곡을 반나절 경험하고 난 후 나는 칩거했다.모두가 나의 건강을 의심치 않을 때 자유를 누리리라.

“아직인가.”

그리고 오늘, 그 지루하고 지루한 칩거 생활 중 나를 만나러 와주기로 한 사람.

“아직 한 시간 남으셨어요, 아가씨.”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시간이 더 안 갔다.

과연 저녁까지 먹고 가주려나.

차만 마시고 돌아가려나.그렇게 정원에 천 깔고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사용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왜, 무슨 일이야.”

“아가씨, 마이어 백작 영애 오셨어요.”

“뭐?”

스텔라가 벌써? 한 시간 남았다며! 마리를 돌아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럴 리가 없는데…….”

걔가 막 한 시간이나 빨리 오고 그럴 애가 아닌데.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응접실로 가자.”

달려왔던 사용인은 다시 스텔라를 맞이하러 가고 나는 여태 누워서 뒹굴뒹굴한 덕분에 망가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빠르게 걸음을 옮겨 응접실에 들자 어느새 우아하게 소파에 앉은 스텔라가 나를 반겼다.

“영애, 전보다 얼굴이 좋아지신 것 같네요.”

“스텔라! 내가 약속 시간을 잘못 알았던 걸까요……?”

눈치를 보며 그녀 앞에 자리하자 특유의 진한 미소를 머금은 스텔라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시간 일찍 온 것이 맞습니다.”

“어, 어째서?”

디에고라면 약속 시간을 정하지도 않겠지만, 정한들 몇 시간이고 제멋대로 일찍 들이닥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다만 지금 상대는 스텔라 마이어 백작 영애 아닌가!얘는 만날 시간도 엄격하게 지키지만 떠나는 시간도 정확한 애였다.

“영애가 반겨주실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아니! 아니요! 저야 너무 기쁜데 혹시 무슨 다른 일이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랍니다.”

내가 얘 앞에만 서면 이렇게 비굴해진다.

“황궁에서 그리 누워 계신 것을 마지막으로 본 참이라.

걱정이 되어서 이리 일찍 와봤습니다.”

걱정……? 스텔라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듯 반복되었다.

“스텔라…….”

감격에 찬 내가 아련하게 이름을 불러보자 방금까지 다정하던 그녀의 눈초리가 단번에 무심해진다.

“괜찮으신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뭐라고? 너 지금 왔는데 어딜 가!

“무슨 말씀이세요! 좀 더 담소를 나누지 않고!”

일어나려는 듯 몸을 틀던 스텔라의 한쪽 입꼬리가 유려하게 올라갔다.

“농입니다.”

도로 자세를 정돈한 그녀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내가 사람이 그립고 그리워서 이렇게 놀아나는구나.

“궁금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스텔라와의 만남을 고대한 것은 그녀가 내 친우라 그저 반가운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가장 쓸 만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해서였다.

“글쎄요.

그대가 알고 있는 거 다, 라고 하면 오늘 저와 밤까지 함께 있어주실 건가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으나 콧방귀가 날아왔다.

“저녁을 들고 갈 정도로는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저녁이라고 했니.

“…오늘 왜 그러세요?”

스텔라가 아닌 것은 아닐까.

아름다운 그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다른 구석이 발견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영애가 살아난 것이.”

무언가 말을 고르듯 말을 멈춘 그녀가 온전히 제 마음에 드는 표현을 찾지 못했는지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그편이 제게 더 이익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조금은 축하를 하는 의미라고 덧붙인 스텔라의 얼굴에 처음 보는 표정이 걸렸다.마치 수줍은 듯한 표정.

“그거 감동이네요.

살아나길 잘한 것 같아요.

스텔라랑 저녁도 먹고.”

기뻤다.

내가 누군가에게 살아줬으면 하는 사람이라는 게.

그것도 저 스텔라가 말이다.그런 나를 빤히 보던 그녀가 금세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선 왕세자에게 독을 사주한 자는 카터 남작이예요.”

카터 남작? 그건 또 누구인가.

“저도 처음 들어본 자예요.”

그 뒤로 이어진 스텔라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레토라는 독은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아 처음 그 내용을 전달받았을 때 쉬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고 했다.황궁의 사용인에게 전달되기까지 무려 열세 번의 사람 손을 탔다는데.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그저 사고팔았을 뿐이라고요?”

“마지막으로 사용인에게 지령을 내린 자만이 지정된 자에게서 독을 구매했다고 하더군요.”

“그자가 누군데요?”

지령을 내린 자만 알아낸다면 답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

“왕후의 사람입니다.”

왕후……? 분명 왕세자를 노린 독이라고 하지 않았어?

“왕세자의 어머니 되시는 분 아닌가요?”

“그분이 지지하는 자식이 지금의 왕세자가 아니니까요.”

알고 있다.

그런 것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했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그럼 이 모든 일이 왕후 전하가 꾸민 일이라는 말씀이세요?”

순간 스텔라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한데 왕후의 사람에게 독을 판매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더군요.

그래서 출처를 타고 올라갔죠.”

지정된 자에게 독을 구매했다고 했었다.

그럼 그것은 미리 준비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무것도 몰랐다라.

“한데 산 사람도, 판 사람도 어떤 경위로 서로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더군요.

모든 것이 다 우연, 우연이라는 겁니다.”

레사는 그 우연의 사다리마저 타고 올라갔다는 얘긴가.

“그렇지만 그건 정말 우연일 수 있지 않나요.

마지막 판매자가 그 독을 소유하고 있다는 정보만을 알았다던가.”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번졌다.

약간의 분함이 함께 담긴.

“다니엘 카터.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자 더 나오는 것이 없더군요.”

겨우 알아낸 것이 남작이라는 작위 하나라던 말을 할 때는 스텔라가 이를 갈았다.

“수상하지 않습니까.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존재.”

그러고 보니 디에고가 했던 말이 있었다.왕세자를 노렸으나 정말 노리는 것은 다른 것일 수 있다던.

“레사가 찾을 수 없는 게 있다니.”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헛웃음을 뱉었다.

“찾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찾고 있는 것입니다.”

승부욕에 불타는 스텔라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항상 여유롭고 어른스럽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달까.

“예예.

아무렴요.

믿고 있습니다.

레사가 알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없지요!”

내 능청스러움에 샐쭉이 눈을 흘긴 그녀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보다 영애, 비밀 연애도 끝난 것 같습니다?”

주제가 곤란한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난 할 말이 없다.

이젠 디에고의 탓만 할 수도 없었다.

“…비밀 연애라는 게, 참 쉽지 않더군요.”

어색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려봤다.

괜히 민망했다.

황궁의 방에서 내내 곁에 붙어 있었고, 심지어 나중에는 디에고가 침대로 올라와 함께 잠들기도 하지 않았던가!

“예.

두 분 다 자질이 없으신 것 같더군요.”

나는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를 음악 삼아 스텔라와 즐거운 저녁 시간을 함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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