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비밀 연애의 끝 】
황족들이 놓아주지를 않아서 꼬박 7일을 그 황궁 내 방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 영애, 황궁의 의원이 가장 뛰어나니 더 있다 가도록 하거라.
- 그대의 어미가 있었더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니 내 말을 들어주시게나.
- 비비안, 좀 더 나아지거든 그때 돌아가도 늦지 않아.
- …후작이 내가 윈데이너 저택에 머무는 것을 허락할지 모르겠군.간신히 저택으로 돌아왔나 했더니 여기서도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하게 될 줄이야!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이는데 의자까지 끌고 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버지가 부담스러워도 너무 부담스러웠다.
“저, 입궁 안 하셔도 괜찮으세요?”
“나 하나 없어도 되니 신경 쓰지 말거라.”
하루도 빠짐없이 입궁해서 그렇게 일만 하시던 분이 이러신다.
이쯤 되니 제발 아버지가 자리를 비워주었으면 했다.이렇게 내 방 안의 침대에만 누워 있을 거였으면 황궁이랑 다를 게 뭔가!
‘흐어엉, 너무 답답해.’
대체 좋은 약을 얼마나 많이 먹이라고 지시받은 것인지 내 몸을 시도 때도 없이 살피며 이것저것 챙겨주던 의원은 곧 죽게 생겼더라.잠은 좀 자는 것인지 의문일 정도로 몇 시간 꼴에 한 번씩 퀭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를 떠올리자 찝찝해졌다.의원에게 따로 감사 선물이라도 챙겨 보내야겠어.그리고 그전에 아버지를 좀 내보내자.
“가뜩이나 이 사건 때문에 황궁이 바쁠 텐데 아버지마저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되지 않을까요?”
어깨를 움찔, 떠는 것이 알 만했다.
황궁에 있을 때도 일은 하나 싶게 내가 머물던 방을 들락거리던 것을 보아 밀릴 대로 밀려 있을 일들이 눈에 선하다.
“전 이제 진짜 괜찮으니까 이따 저녁에 뵈어요.”
못마땅한지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이리 지켜보고 있으면 편히 쉬지 못하겠구나.”
그러곤 마디가 굵은 손으로 내 이마를 지그시 눌러보더니 인자하게 웃는다.
“아비가 불안해서 근래 네 곁을 떠나지 못한 것을 이해하려무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선잠이 들었을 때도 한 번씩 들어와 혹여 열은 안 나는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던 아버지 마음을.
“마리도 있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준 아버지가 그 위를 토닥토닥였다.어릴 때나 느껴봤던 그 손길을 받고 있자니 뭉클했다.
“감사해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하고…….”
“아비도 고맙구나.
이리 깨어나 줘서.
그럼 쉬거라.”
다정한 눈 맞춤을 끝으로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는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탁―문이 닫히고.내가 저택에 들어서기 전부터 오열하고 있던 마리.
저 구석에 몸을 말아 넣고 있는 그녀에게 시선이 향했다.
“마리.”
“…예.”
빤히 보며 이리 오라는 뜻으로 손을 까닥이자 입을 삐죽이며 그녀가 다가왔다.
“나한테 화났어?”
내 말에 왈칵 얼굴을 구긴 마리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 아가씨.
제가 얼마나, 얼마나! 허윽.
뵐 수도 없는데…….
소식을 전해온 자는 아가씨가 독을 먹고 쓰러졌다는데.
제, 제가.”
어린아이처럼 꺽꺽 우는 마리의 얼굴이 귀여웠다.그 모습에 씨익 웃자 그녀의 입이 황망하게 벌어졌다.
“나 괜찮잖아.”
“어, 어디가 괜찮으세요!”
“내가 황궁에서 귀하다는 것은 다 먹고 온 사람이야.”
황궁 깊숙이 존재하던 영약이란 영약은 다 가져다준 것 같다.
이국에서 선물 온 것부터 제국 내 소문으로만 듣던 약초들까지.이렇게 많은 걸 한 번에 다 먹어도 되나 걱정스러울 정도였건만.의원 수 명이 밤새 상충되지 않게끔 효능별로 섭취 일정을 짰다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을 때 얼마나 경악했는가.
“저, 정말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훌쩍이며 콧물까지 흘리는 마리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전보다 건강해질 판이야, 마리.”
가까스로 진정한 마리에게 디저트를 부탁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하도 누워 있어서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기분인데, 이거.천천히 발코니로 향했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다.
문을 열고 발을 내딛자 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좀 추운가?”
오랜만에 보는 정원 풍경을 느긋하게 보다가 시선을 내리자 눈이 마주친다.
“…….”
“거기서 뭐 하세요?”
“그대를 보고 있지.”
발코니 난간에 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 아래서 한껏 고개를 젖힌 채 나를 올려다보는 디에고.
“방금 전까지 저 여기 없었는데요.”
그의 입매가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창 너머 있을 비비안을 그리고 있었달까.”
“제가 오늘 여기 안 나왔으면요.
그대로 돌아가실 생각이셨어요?”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던 그가 흐드러지듯 웃었다.
“…참고 돌아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군.”
불과 어제 황궁에서 저택으로 향하던 마차에 함께 올라놓고선.이제 비밀은 없었다.
황제 내외와 황태자가 알고, 아버지가 아시는데 더 감출 의미가 없지.대공이 후작 영애의 곁을 내리 지킬 이유가 그것 말고는 없으니까.나도 그의 손을 놓을 자신이 없었다.
무섭고 아프고 힘들 때마다 디에고의 손이 필요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고자 그의 온기를 거부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내가.난간에 포갰던 팔을 풀어 아래로 뻗었다.
“이리 와요.”
웃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이내 환한 웃음을 머금은 디에고가 커다란 몸을 가졌음에도 재빠르게 나무를 올라타 발코니 난간을 넘어왔다.
“이렇게 불러주니 기쁜걸.”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 선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아, 밑에 둘 걸 그랬나.
나는 내려다보고 그는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는 것이 퍽 좋았는데.지금은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 꺾는 일이 다시 내 몫이 되었다.
“몸은 좀 괜찮아?”
“네, 좋아요.”
내 대답에도 안심이 안 되는 것인지 그가 내 몸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며 살폈다.
“그래서 말인데, 저랑 같이 나가요.”
내게 바짝 붙어 있던 너, 왜 한 걸음 멀어지니? 뒷걸음질 치는 그의 가슴팍 셔츠를 움켜잡았다.
워낙 팽팽해서 잘 잡히지도 않는구나.
“이러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겠어요.
너무 답답해.”
잔뜩 찌푸린 얼굴, 그러나 내 애절함이 어느 정도 통한 것인지 디에고의 동공이 흔들렸다.마리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바람이 차.”
미약한 반항을 시도하는 디에고에게 눈을 반짝였다.
“겨울옷 입을게요.”
지금은 아직 가을이었다.나 갈아입고 와요? 엄지로 방 안쪽을 가리키던 내가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지금이 딱이었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마리는 자리 비우고.
혼자였으면 정원이나 설렁설렁 걷는 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전부였겠지.그랬는데 무려 몰래 다니기 장인인 디에고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라면 나를 어디든 데려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가고 싶은데.”
어디 정한 곳은 없는데.
말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마음을 바꿀 것 같은 디에고의 얼굴에 마음이 초조해진다.
“그, 아! 우리 첫 뽀뽀한 데!”
손뼉을 치며 되는대로 지껄였는데, 실수한 것 같다.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비치더니 곧이어 짓궂은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나는 한껏 들고 있던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있었고.
“그대가 내 입술을 뺏어간 곳 말하는 건가.”
뺏어? 뭘 뺏어! 너야말로 좋다고 나 안 놔준 거 내가 다 기억하는데!
“…각하가 그전에 먼저 하셨잖아요.”
마차에서 내 이마에 먼저 입술 들이댄 건 너잖니.
“그 이전에 비비안 입술에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눈을 질끈 감았다.
꼭 이렇게 이런 걸 따지고 그래야겠니?점점 시간은 가고 촉박해진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어차피 고상하고 우아하고 그런 건 다 끝났어.
“아무튼! 저 옷 갈아입고 올게요.
금방이에요!”
그가 더 뭐라 말하기 전에 후다닥 방 안으로 달려갔다.
중간에 다리 힘이 풀려 삐거덕했는데 다행히 디에고의 시야에 잡히지는 않았다.방 안에 딸린 작은 드레스 룸을 뒤졌으나 혼자 입을 수 있는 드레스는 보이지 않았다.와, 혼자서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는 신세라니.망연히 시선을 돌리는데, 털 달린 새하얀 로브가 눈에 띄었다.
‘저걸……?’
혼자 입을 수도 있고, 어디를 가도 춥지는 않겠다.망설임은 잠시였다.
밖을 향한 내 갈망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으니까.덥석 로브를 집어 어깨에 둘렀다.
푸른색 공단으로 예쁘게 리본을 매자 누가 봐도 겨울을 맞이한 사람으로 보인다.탁자 위에 마리에게 남기는 쪽지를 써두고, 발코니로 달려 나가자 오늘 여러 번 놀라는 디에고와 눈을 맞췄다.
“…춥지는 않겠군.”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다.가자! 나 땀나기 전에 어서 여기를 벗어나자꾸나!마지막까지 갈등하는 듯 한숨을 쉬며 망설이던 그가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아주 잠깐 다녀오는 것으로 하지.”
“알았어요.”
훌쩍 뛰어내리는 디에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비명을 삼켰다.나를 안고도 가볍게 착지한 그가 내 무릎 뒤에 팔을 넣어 그대로 안아들었다.성큼성큼 잘도 후작가를 벗어나는 디에고와 함께하며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몰래 숨어드는 것에 재능이 탁월하시네요, 각하.”
“디에고라고 부르지.
지금 가는 곳에서 그리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
시원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에게서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금이라도 장소는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불안해졌다.
“디에고, 우리 다른 데 갈까요?”
“어째서?”
왜냐면 그냥 너무 부끄럽고 왜인지 내가 난감한 일만 있을 것 같고, 그렇다?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장소를 바꾸자는 말에 우뚝 멈춰 선 그가 금방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갈 것만 같아서 그냥 고개를 저었다.분명 말을 타고 혼자 온 것 같았던 디에고는 어디서 그새 구해온 것인지 마차를 대령했다.
“마차로 가지.”
말도 괜찮다고 했으나 극구 정색하는 그 때문에 얌전히 마차에 올라탔다.그래도 몰래 나가는 외출이라 생각하니 흥분이 더해서 신이 난다, 신이 나.장소만 그곳이 아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자 금방 마차가 멈춰 섰다.
“가볼까.
비비안이 가고 싶었던 곳.”
야살스럽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미는 디에고.
이번에도 나는 그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를 알지 못한다는 게 분했다.그 봄밤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아서 숲으로 들어서는 길이 낯설었다.그러나 그 낯섦도 잠시.눈앞에 탁 트인 호수와 보랏빛이었을 꽃들이 지고 난 자리를 보자 그날의 기억이 생생히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