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비비안.”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황태자가 뛰어 들어와선 나와 눈을 맞췄다.
얘도 얼굴이 많이 상했네.분명 이제 이틀인가 지난 거 같던데.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 대신 눈이라도 초롱초롱 떠보았다.
“…….”
차마 말이 안 나오는지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인 황태자가 끝내 입을 꾹 다물었다.이럴 땐 디에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내 생각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쾅―
“영애는!”
“비비안!”
황제 내외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방으로 들어선 듯싶었다.
저런 목소리 처음 듣는다.
“깨어났구려.”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구긴 황제와 그 곁에서 내 얼굴을 쓸던 황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얼굴이 이게 뭐란 말입니까.”
형식적인 걱정이 아닌 진심이 느껴져서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한참을 내 곁에 머물던 황족들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내 얼굴을 보곤 금방 또 오겠다며, 잘 쉬라며 떠났다.나도 거울은 못 봤지만, 시시각각 내 안색이 나빠지고 있음은 알았다.
피곤과 고통이 점점 더 커졌으니까.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겨워질 때쯤 디에고의 따듯한 손이 내 눈가를 덮었다.
“푹 자.”
누군가 방으로 들어서면 한 발자국 옆으로 비껴났지만, 그 어느 때도 내 곁을 벗어나지 않는 그였다.분명 내가 잠들어 있는 내내 그랬겠지.
“…디, 에고.”
다 쉰 목소리를 아주 작게 내보았지만 내가 들어도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응.”
그런데도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답해왔다.
“미…안해.”
“…….”
“…고, 마워, 요.”
띄엄띄엄 한 자, 한 자 내뱉을 동안 디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미동도 하지 않던 그가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숭고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리고 간절하고 애절한 입맞춤이었다.
“자둬.”
무척 안심이 되는 그 목소리에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갈 때쯤 어렴풋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해.”
*어제 비비안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 그를 확인하러 가고 싶은 왕세자였으나 그 짧은 시간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비비안 윈데이너의 가족과 황족들이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던 시간.더불어 저를 노린 일이 애꿎게 비비안에게 향한 것임을 다 알고 있어 더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을 거라네.
후유증도 없는 독이라니 회복만 잘하면 된다더라고.”
역시나 소식을 전해 들은 왕녀 또한 비비안을 만나러 갈 수 있을 위치가 못 됨을 알았기에 제 오라버니와 차를 나눠 마실 뿐이었다.
“다행이군.”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영애가 깨어난 것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회복할 수 있음에도.
“그대로 죽었다면 똑같은 꼴을 면하지 못했을지도, 많은 사람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를 내었음에도 온전히 거짓이 될 수 없는 진실에 왕녀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그것을 확인한 그녀가 미소를 지우고 미간을 찌푸렸다.
“…제국의 어떤 자식이 이 일을 꾸몄는지 모르겠지만.”
왕녀가 이를 으득, 갈았다.
피해를 본 것이 왕국임에도, 이용당한 것이 자기들임에도 지금 그들은 어찌하면 제국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을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해야 했다.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는 이유 하나로.
“너는 먼저 왕국으로 돌아가.
그리고 제국이 원하는 대로 협조하되 최대한,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몰고 가도록 해.”
왕세자의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서로의 푸른 눈이 교차했다.
“그게 왕국도, 너도 나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왕세자와 왕녀가 닮은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생을 살아온 것일지도 몰랐다.신분으로는 꼭대기 층에 자리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생존하는 이들의 절박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성이 없는 것 같던데.”
그랬다.
비비안 윈데이너 곁을 지키는 자들이 그녀 관련해서는 말이 안 통했다.두 남매가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자 그 옆에서 차를 우려 그들에게 건네던 아론이 무심히 말했다.
“사랑이잖습니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던 왕녀가 차를 삼키지 못하고 뿜었다.그래도 한 번 경험했다고 왕세자는 질색하기는 했으나 차를 뿜어대는 일을 두 번 저지르지는 않았다.
“아론, 지금 뭐랬어?”
차분히 손수건을 건넨 그가 심드렁하니 또 한 번 사랑을 입에 담는다.황당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제 오라비를 바라본 클라라에게 에녹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다는군.”
이후 아론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을 때, 그는 남매가 기다렸음에도 오지 않기를 바라던 소식을 전해왔다.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저하께서도 방문을 요청하셔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바로 비비안 윈데이너를 만나는 일.
“대공은 자리 안 비켜주겠지?”
“제가 알기로 저하를 만나뵙고 돌아간 이후로 한 번도 그 방을 나오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만.”
왕세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물어본 말은 아니었다.
그 디에고가 저와 영애를 단둘이 둘 턱이 있나.
“같이 가볼 건가.”
왕세자의 물음에 왕녀가 미간을 좁힌 채 고심했다.
그녀는 내일 제국을 떠나 왕국으로 향할 터였다.오늘이 아니라면 비비안 윈데이너와 마주할 일은 없겠지 싶어서.
“작별 인사라도 해보죠.”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둔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크게 숨을 내쉰 왕세자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 방을 나섰다.비비안 윈데이너가 머무는 방 앞에는 무려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을 비롯해 정식 기사만 다섯이 지키고 있었다.그 기세에 기가 찬 왕국 남매가 혀를 찼다.
‘이렇게 꽁꽁 안에 감춰두고, 이 안에는 제국의 늑대를 넣어놓고도 이렇게 많은 기사라.’
황제에게 딸이 있었다면 이런 대우를 받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황녀쯤은 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고.기사가 저들의 방문을 알리고도 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한 번 더 알려야 하나 싶을 때 굳건하던 문이 열리고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비안은 더 환자답게 굴 필요가 있어.”
“…좀! 이미 문 열렸거든요?”
안 봐도 알 것 같은 상황에 왕세자에게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영애, 무례인 줄 알면서 이리 찾아온 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왕세자의 나긋한 말투에 비비안이 힘겹게 손을 들어 저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요, 저하.
저야말로 감히 이리 누운 채로…….”
“무슨 말씀을.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하군요.”
진심이었다.
그녀가 눈을 뜰지, 말지에 따라 왕국의 상황이 크게 달라질 예정이었으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핏기가 없는 얼굴에 그간 몸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 며칠 새 잔뜩 야위어 있었다.
그 얼굴로 애써 웃으며 인사를 전하는 맑은 모습에 왕세자의 말문이 막혔다.그녀 자체를 걱정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 대신 마신 독이라 하니 죄책감이 든 것도 사실이고.그러나 한 나라를 이끌고 가는 자리임에 비비안의 안위를 올려놓고 저울질을 하기도 하였다.그러다 막상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그것이 못내 제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정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영애.
그리고 미안합니다.”
왕세자가 사과를 건네자 비비안이 허둥대기 시작했다.그녀가 왕세자와 그 옆에 선 대공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디에고가 비비안의 손을 다독인다.
“아니에요! 저하가 독을 안 드셔서 다행이지요.”
해맑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 비비안을 다독이던 디에고의 손이 멈칫했다.그 모습을 슬쩍 눈에 담은 왕세자가 입매를 가득 휘며 말을 이었다.
“모두가 영애가 아닌 제가 마셨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비꼬는 투가 아닌 진심 같은 농담에 비비안의 입이 벌어졌다.
차마 말도 나오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를 보던 왕세자의 눈에 온기가 담겼다.
“그편이 저도 수습하기 편했을 것 같군요.”
그 옆에 얌전히 서 있던 왕녀의 다정한 어투에 비비안의 시선이 향했다.
“영애, 저는 내일 왕국으로 돌아가요.”
“아…….”
비비안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왕녀와 제가 퍽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는 바람에 얼마 안 되었을 그녀의 자유가 일찍 파한 것만 같아서.돌아가는 길이 환호와 기쁨이 아닐 거라서 괜히 제가 더 쓸쓸해진 탓이다.
“다음에 볼 때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요.”
처음으로 왕녀의 진짜 미소를 본 것 같은 비비안 또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
또 제국에 놀러오세요.
기다릴게요.”
그렇게 왕국 남매의 병문안을 끝마친 비비안이 긴장했던 탓인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그 옆에서 능숙하게 물잔에 물을 담고 약을 준비한 디에고가 비비안을 바라봤다.
“먹던 대로 먹을 텐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가늠하던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짓궂은 미소를 지은 디에고가 검지로 제 입술을 툭툭, 두드리곤 그녀의 입술을 톡, 지그시 눌렀다.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비비안이 소스라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거짓말.”
웅얼대는 그 목소리가 퍽 기꺼운 디에고가 싱긋 웃으며 살짝 이불을 끌어 내렸다.
“정말인데.”
잔뜩 울상을 지은 비비안이 느리게 제 손을 내밀었다.
“…제가 먹을 수 있어요.”
침대 밖으로 나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그녀는 팔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진통제도 같이 먹고 있었기에 한 번씩 찾아오는 통증 외에는 견딜 만했고.맑은 수프 정도는 먹어도 될 정도로 회복한 상태였다.
“자.”
비비안의 손 위에 약을 얹어준 디에고가 그녀가 약을 먹을 수 있도록 등을 감싸 안아 상체를 들어주었다.
“후우.”
약과 물을 마신 비비안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던 디에고가 천천히 그녀를 뉘었다.
“…좀 쉬어요.
잠은 자는 거예요?”
그녀의 걱정 어린 물음에 희미한 미소를 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 잘 때 자고 있어.”
“거짓말.”
한 번도 디에고가 자는 순간을 본 적이 없다 생각한 그녀가 입을 삐죽였다.
“걱정돼요.
정말로.”
“그럼 같이 잘까.”
말과 동시에 디에고가 침대 위로 올라와 비비안의 머리를 제 팔에 올려두었다.
“어……?”
당혹감에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무리했어.
그만 자.”
온몸으로 전해지는 따듯한 온기가 비비안을 그 안에 온전히 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