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70화 (70/109)
  • 70화

    *비비안이 마신 독의 정체, 레토.정원 수색 끝에 발견한 작은 유리병, 그 안에 남은 방울을 조사해 독의 정체를 파악한 이후 빠르게 해독제를 만들었다.비비안에게 해독제를 먹이고 꼬박 반나절이 지나도록 디에고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목숨을 잃을 만큼 치명적인 독과 양은 아니었다.

    하나 곱게 자란 영애에게 독에 대한 내성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해독제를 먹었다고 해서 곧바로 비비안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레토라…….

    하고 많은 것 중에 왜 이것이었을까.’

    흔히 통용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희귀할수록 주도자의 범위가 줄어들 터인데 굳이 별다른 효능이 있는 것도 아닌 이것을 쓴 이유가 무얼지, 지독한 정적 속에서 디에고는 생각했다.증거가 남지 않는다는 장점을 살리려면 이 황궁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해서는 안 됐다.

    제대로 생각을 하는 자라면.

    “…….”

    그나마 그가 차분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따금 통증에 찌푸려지던 그녀의 얼굴이 고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약 먹고 나서는 한결 편안해 보이는군.’

    한참 비비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디에고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쾅―비비안 윈데이너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

    왕세자가 있는 그 안으로 디에고가 거침없이 들어섰다.

    “대공……?”

    왕세자가 앉아 있던 책상까지 단숨에 도달한 디에고가 손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그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댔다.

    “에녹, 널 노린 거라더군.”

    짓씹듯이 말을 내뱉는 대공을 보며 왕세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 그것참.”

    이미 독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사용인이 제가 아는 것은 다 털어놨다고, 왕세자도 들은 참이었다.

    “짐작 가는 이는?”

    난감한 미소와 함께 에녹의 눈썹이 곤란한 듯 일그러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황상, 그리고 무엇보다 제 직감이 강하게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왕후, 라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입을 떼지 못하는 왕세자를 물끄러미 보던 디에고가 몸을 일으키곤 고개를 기울였다.

    “네 못난 형들인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헛웃음을 흘린 에녹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치들은 그마저도 해낼 능력이 없어.”

    자신들의 원초적이고 천박한 욕망을 채우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그들만 있었더라면 제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플 일은 없었을 터인데.

    “그럼 왕후인가.”

    끝내 디에고의 입에서 흘러나온 존재에 왕세자가 깊고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하녀가 그랬다는군.

    왕세자에게 독이 든 잔을 넘기면 왕국에서 편히 살 수 있게 해준다 했다고.”

    멍청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발언에 그 말을 옮긴 디에고나 들은 왕세자나 어이없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지끈대는 머리를 짚고 있던 왕세자가 고개를 들고 디에고와 눈을 맞췄다.

    “마치 길을 터주는 것 같지 않나.

    따라오라고.”

    디에고의 말에 가만히 생각에 잠긴 왕세자.왕후의 평소 성정이 워낙 침착하지 못하고 감정적이라, 허술한 방식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임이 드러날 때마다 확신했다.제 어미의 소행이라고.

    “누군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이 네 목숨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군.”

    왕세자의 목은 목표가 아니라 단지 수단일 뿐이다.

    “허, 제국의 크기가 새삼 와닿는걸.”

    화사하게 웃으며 장난기를 담은 목소리에 미처 가려지지 않은 녹진한 분노와 서늘함이 서렸다.왕세자의 안위를 두고 왕후를 움직여 무언가를 이루려는 자.그러니까 왕국을 수단 정도로 여겨 일을 도모한 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왕세자의 이성이 차갑게 굳었다.

    ‘내가 그간 잠시 착각을 했었나 보군.’

    제국의 황족이 자신에게 우호적이라, 어쩌면 제국과 왕국의 격차라는 게 그다지 큰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그런데 눈앞의 황족들은 범인이 아닌 것 같으니 높아봐야 제국의 귀족일 어느 놈이 이렇듯 왕국을 업신여겼다, 이것인데.

    “뜻대로 보여주지.

    어디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기에 왕국을 수단으로 썼는지, 나도 궁금해지는군.”

    왕세자의 해사한 미소를 빤히 보던 디에고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러게.

    그놈이 일을 제대로 했더라면 비비안이 다치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일을 제대로 했더라면, 제가 독을 마셨어야 한다고 단언하는 디에고의 말에 떨떠름해진 왕세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 알고 처신하도록 하십시오, 왕세자 저하.”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돌아서는 그에게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닿았다.

    “그보다 네가 영애 곁을 잠시나마 비웠다는 건, 좀 괜찮아졌다는 건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왕세자를 돌아본 디에고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눌러 담은 목소리로 답했다.

    “…비비안이 괜찮기를, 다들 빌어야 할 거야.”

    *의식은 돌아왔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눈을 뜰 수가 없네.

    “…비비안.”

    디에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푹 잠긴 목소리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육체적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 아닌데,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단했으면 저럴까 싶고.눈 뜨고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구석구석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해도.”

    아니, 설마 나 지금 반쯤은 몽롱한 상태인데.

    이럴 때도 내 생각이 다 보이는 거니?

    “…보여.”

    맙소사.

    자면서 꿈이라도 꾸면 그것도 보이는 건가, 설마?

    “…….”

    대답이 없었다.

    그래, 쟤가 나 자는 걸 언제 봤겠나.

    심지어 지금은 너무 아파서 기절한 건데.꿈도 안 꿨다, 진짜.쾅―

    “각하.”

    이 목소리는! 아버지? 아, 눈 뜨고 얼른 아버지가 불안하지 않도록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괜찮은 건가, 후작.”

    “…예.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는 손이 조심스레 내 볼을 감쌌다.

    “…비비안.”

    목소리에서 물기와 불안이 잔뜩 묻어났다.

    얕은 한숨에 한탄이 스며 있다.

    눈을 뜨려고 힘을 주자 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그걸 뭔가 불편하다 오해했는지 닿아 있던 손이 재빨리 멀어진다.있는 힘껏 이마를 들어 올리는 심정으로 눈을 떠봤다.

    “따, 딸아.

    정신이 드는 게야?”

    눈이 부셔서 반쯤 도로 눈을 감자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그리고 온전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곳에 디에고가 햇볕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운 채였다.내가 눈부시다고 해서 그런가.

    “괜찮은 게야?”

    눈동자를 굴려 아버지를 보자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얼굴 왜 이러세요? 무슨 일이야, 정말.그새 10년은 늙은 듯한 얼굴에 평소 주름 하나 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성격으로 단정하기 그지없던 옷차림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었다.괜찮다고 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입만 뻐끔대는 꼴이다.

    목구멍에 구멍이 없는 기분인데.

    꽉 막힌 답답함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힘을 내봤다.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을 보자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서러움과 미안함이 한데 뒤엉켜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오르자 숨마저 가빠졌다.

    “그러다 또 쓰러지겠어.”

    쓰러져? 저번에 눈 떴을 때 아버지가 없었던 건 그 이유였나.

    이러지 말고 가서 좀 쉬시지.

    오히려 아버지가 걱정되었다.눈동자에 한가득 담긴 걱정을 읽었던 것일까.

    아버지가 자기는 괜찮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긴장감이 풀린 것인지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디에고가 부축한다.

    “…가서 좀 쉬지.”

    “아닙니다.

    각하야말로 가서 쉬시지요.”

    내가 보기에 둘 다 쉬어야 마땅한 얼굴인데.몇 번이고 제대로 서보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인지 끝내 체념 섞인 한숨이 들려왔다.차마 내 곁을 비울 수는 없었는지 소파에 가 앉은 아버지.

    디에고는 침대 곁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괜찮아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나와 마주한 그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진다.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냐는 타박이 귀에 들린 것 같은데?

    “…안 괜찮아.

    그대가 다 낫기 전까지, 내가 괜찮을 리가 없잖아.”

    아, 가슴이 찡하기는 한데! 그게 아니라 정말 몇 날 며칠 잠 안 자고 말을 몰았다고 할 때보다 더 얼굴이 상해 보였다.그새 더 날렵하진 턱선 하며 얼굴에 드리운 음울한 기운이 예민한 미남이라 할 만큼 잘생긴 건 여전했지만.

    ‘저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 아니에요?’

    알고 싶었다.

    온몸이 미친 듯이 아픈 것은 여전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지만, 확실히 달랐다.나 안 죽을 수 있는 걸까.괴로운 듯 미간을 좁힌 디에고가 말을 이었다.

    “…고마워.

    살아줘서.”

    정말 내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저도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둥 무서운 말을 하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내가 다급히 생각을 전했다.

    ‘…저 죽을지도 몰라요?’

    “…안 죽어.

    비비안 덕에 독의 정체는 알아냈어.

    그에 맞는 해독제도 먹었고.

    시간을 들여서 회복하기만 하면 돼.”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나 살았구나! 가슴이 벅찼다.

    솔직히 아까 가물가물 다시 눈이 감길 때는 이대로 다시 눈 못 뜨는 건 아닐까 무서웠는데.

    ‘괜찮다니까 막 서러워지네.’

    또다시 차오르는 울음에 목이 아팠다.

    독의 정체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으면 나는 정말 죽었을까.디에고의 손이 닿으면 사라지는 것이라도 만지듯 천천히 내게 뻗어졌다.

    가만히 내 이마에 얹었던 손을 내려 뺨을 스친 그 손이 떨어져 나갔다.

    “많이 아프지.

    미안해.”

    디에고가 무척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내가 지금 저런 사람을 두고 죽어버릴 뻔했단 말이야? 그것도 이렇게 허무하게?’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만약 그랬다면 너무 억울하고 비통해서 편히 죽지도 못했을 거였다.이렇게 죽을 거였으면 그렇게 살았겠나!슬펐는데 점점 울분이 차오른다.그나저나 그 사용인이 독을 탄 것일까.

    그럼 그게 정말 왕세자를 노린 일이야, 진짜?

    “…사용인이 물잔에 독을 탔더군.

    왕세자를 노리고.”

    그렇지! 대답하라고 일부러 또박또박 질문해 봤다.인생 참.

    남의 독을 대신 먹을 줄이야.

    생글 웃으며 친히 나를 위해 의자를 빼주던 왕세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악의는 없었어.’

    물은 또 왜 그렇게 벌컥벌컥 한 잔을 다 마셨을까.

    한 모금만 마셨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덜 아팠을지도 모르는데.그 순간을 더듬어 보고 있는데 뭔가 싸했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어두침침해 보이는 곳을 보자 무표정의 디에고가 거기 있었다.왜 저럴까.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분위긴데.

    “글쎄.

    누가 좋겠나, 왕세자?”

    눈매를 곱게 휘며 내게 다정하게 묻는 디에고.

    이 방에 지금 아버지 말고 아무도 없는 거 맞지?소파 쪽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는 기절하듯 잠든 것 같았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내 생각을 빤히 보던 그가 한숨을 쉬며 얼굴을 풀었다.

    “…잡아올게.

    널 아프게 한 자.”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부탁한다고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소음이 일었다.쾅―진정한 시달림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