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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69화 (69/109)
  • 69화

    ‘…제가 앉으려는데, 아! 각하는 모르시겠지만 왕세자가 먼저 자리를 잡으려다 제가 들어온 거 보고는 의자를 빼주었거든요.’

    종알종알 기억나는 것을 최대한 조리 있게 생각해 보려고 노력 중인데 디에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그렇다면 내가 먹은 독이 나를 노린 게 아닐 수도 있나? 오호라, 왕세자 몫이었어?

    ‘아무튼 제가 머뭇거리는데 그걸 계속 보고 있더라고요.’

    사용인은 제 할 일을 끝내면 바로 모습을 감추는 것이 보통이고, 그 무엇에도 사적인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그러니 일이 없음에도 어딘가에 시선을 둔다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

    ‘적갈색, 어두운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어요.’

    그만하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디에고가 내 이마에 손을 뻗었다.

    “무리하지 마.”

    몰랐는데 디에고의 손이 닿자 열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그제야 내 몸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알겠고.정신없는 와중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말을 쏟아내고 나니 황태자도 눈에 들어온다.걱정이 넘치다 못해 초췌해진 그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렸다.

    고작 하루 지났다는데 며칠은 못 잔 사람 같은 몰골이었다, 둘 다.그리고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아버지는? 아세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마음이 초조했다.

    얼마나, 얼마나 걱정하고 그러셨을지.

    ‘…어디 계세요? 저 괜찮다고 꼭 전해줘요.’

    반대로 아버지가 독을 마셨다는 소식을 내가 전해 들었다? 나는 아마 바로 기절했을 거였다.

    “걱정 마.”

    디에고의 뒤편으로 아까부터 얼쩡얼쩡거리는 인영이 둘이나 보였다.

    내가 그에 시선을 두자 그제야 뒤를 돌아보는 그.

    “여, 영애가 깨어났다고 하셔서.”

    어딘가 낯이 익은 의원이 나보다 더 땀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구나.한 발짝 내게 다가온 의원이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의식을 되찾으신 것은 정말 다행이나 정확한 원인을 제거한 상태는 아니라 언제 또 정신을 잃으실지 모르십니다.”

    죄인이라도 되는 양 머리를 조아리며 내 상태를 읊조리는 게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니었다.

    하루가 지났다고 했나.그간 얼마나 시달렸을지 안 봐도 뻔했다.정확한 원인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건 내 몸에 퍼진 독을 다 못 잡았다는 거겠지.

    설마, 이대로 나 죽는 건가.진짜? 독 먹고 죽는 건 정말 그려본 적 없는 미래인데.

    덜컥 겁이 나서 머리가 아찔해지는데 디에고가 손을 잡아왔다.

    그의 손을 통해 고스란히 온기가 전해진다.

    “그럴 일 없어.

    그렇게 안 둬.”

    단호하게 말한 디에고의 얼굴에 고통이 서렸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듯 두려움에 사로잡힌 얼굴.독을 마신 게 그였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아팠을지도 모르겠다.누군가 이 꼴을 당해야만 했다면 그보다 내가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이성을 거치지 않고 스며들었다.

    ‘…사랑이네, 사랑이야.’

    망설임 없는 이 마음이 놀랍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되었나 싶어 우습기도 하고 그렇다.누구나 그렇기야 하겠지만.아픈 것도 싫어하고, 죽는 것도 싫고.

    심지어 남을 노렸을지 모를 독을 맹하게 대신 먹고 이렇게 간다는 것이 억울하고 허무하고 무서웠지만.

    ‘그래도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런 마음을 보았으면 벌컥 화를 냈을지도 모르는데, 손을 잡고 있어서 그것도 다행이었다.애써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여 보려 했지만 내 손에 움켜쥔 온기가 너무 따듯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비안.”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 아마 점점 눈을 뜨고 있기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러는 것 같았다.숨이 가빠왔다.

    너무 온갖 곳에서 통증이 느껴져 어디가 아픈지도 알 수가 없었다.내 숨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 디에고와 리안이 바짝 다가왔다.

    리안과 눈을 맞추고 웃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

    리안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을 끝으로 느리게 눈이 감겼다.*다시 정신을 잃은 비비안을 물끄러미 보던 디에고가 조심스레 잡았던 손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디에고의 말에 황태자의 눈이 가느스름해진다.무언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라도 있는지, 그의 눈에 일렁이는 분노를 발견한 황태자가 시선을 돌려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구나.’

    비비안이 깨어난 직후 둘을 가까이서 보고 있던 황태자는 이질감을 느꼈다.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비비안을 보며 마치 대화를 하는 듯싶던 대공.그도 비비안의 눈동자에 수많은 말과 감정이 담겼음은 느낄 수 있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것과는 다름을 알았다.

    “…예.”

    그저 지금 하는 모든 행동이 비비안을 위하는 것이라 믿는 황태자가 질문 대신 그를 보내주었다.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방을 나선 그가 거침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화려한 음각이 새겨진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선 그가 제 방문을 알렸다.

    곧이어 열리는 문 사이로 그늘이 가득한 황후의 얼굴이 비친다.

    “대공.”

    “비비안이 깨어났습니다.”

    자리에 앉아 서두부터 이야기를 꺼낼 시간이 그에겐 없었다.

    “괜찮은 겝니까!”

    괜찮지 않았다, 아직은.

    독의 종류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한시가 급했기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다시 정신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에 힘이 빠진 황후가 제 머리를 짚었으나 이어지는 대공의 이야기에 다시금 얼굴을 들었다.

    “수상한 사용인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적갈색 머리에 회색빛 눈을 한.

    황제 폐하와 제가 들기 전에 응접실에서 나갔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사용인은 공기처럼 존재했다.

    평생을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황후가 특정하게 사용인의 용모를 기억할 리 없었으니.

    “시녀장에게 가세요.

    응접실과 관련한 모든 사용인들을 따로 모아두었습니다.”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린 디에고가 빠르게 방을 나섰다.사용인은 꼬리의 꼬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 머리를 잡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둘 때였다.독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급선무였다.황후의 시녀가 등 뒤로 디에고의 살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종종걸음으로 시녀장에게 향했다.

    “여기입니다.”

    시녀장이 머무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대공이 들어섰다.

    “각하,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그간의 연륜이 있는 시녀장은 놀라움을 감추고 차분히 응대했다.

    “적갈색 머리, 그리고 회색빛 눈을 가진 사용인.”

    다짜고짜 디에고가 말을 던졌음에도 시녀장은 얼빠진 반응을 하는 대신 침착하게 생각했다.

    이내 사건에 얽힌 자라는 것을 깨우친 그녀가 더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지요.”

    이미 한차례 사건의 동선에 해당하는 사용인들을 한데 모아둔 상황이었다.

    그리고 대공이 던져준 것에 의하면 한 사람, 짐작 가는 이가 있었다.

    ‘기어이 일을 친 게 너로구나.’

    단순한 일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의 기세가 그랬고, 말을 내뱉을 때 보이던 눈동자가 그랬다.어제 비비안 윈데이너를 품에 안고 있던 것은 황태자가 아니라 대공이었다.

    세간에 도는 소문이야 시녀장도 알고 있었지만, 진실은 소문이랑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는 것을 그 순간 알았다.

    ‘죽을 수도 있겠어.’

    지금 끌려 나올 이의 생사를 고려해 보던 시녀장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문을 열자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용인들이 제각기 몸을 웅크리고 있다.

    “세라.”

    시녀장의 부름에 한쪽 구석, 벽에 기댄 채 졸고 있던 한 여인이 잠이 덜 깬 눈을 들어 올렸다.이름을 부르고 시선이 한데 모이는 곳을 확인한 디에고가 그 앞으로 걸어갔다.제 앞에 지는 어두운 그림자에 세라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다.

    칼날 같은 시선이 저를 향하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그녀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너인가.

    네가 독을 탔나.”

    디에고의 냉담한 목소리에 주변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연이었다.세라는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압박감을 느끼며 숙인 상체를 크게 들썩거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나친 제 욕심이 만들어낸 환상, 절대 들킬 일 없을 거라는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헉.”

    그리고 제 목에 드리운 검날이 붉은 실선을 만들어낼 때야 비로소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독의 이름이 무엇이지.”

    “모, 모릅니다.”

    정말 몰랐다.

    저는 그저 건네받은 것을 물잔에 흘려 넣었을 뿐.

    “…….”

    검날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감을 느낀 세라가 숨을 헐떡였다.

    “아, 아.

    벼, 병.

    그것이 들었던 병이 있습니다.”

    “어디 있지.”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잘 생각이 나지 않던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차려보려 노력했다.

    “정원! 라틸란 꽃이 있는 정원에 던졌습니다.”

    검을 거둔 디에고가 그대로 방을 나서며 시녀장에게 눈짓했다.그의 뒤편으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황궁의 널린 방 중에 한 곳.

    초조하게 방 안을 배회하는 데이비드 후작이 있었다.

    “대체 어떤 멍청한 놈이!”

    왕세자가 독을 먹었다.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그게 다였다.

    연회장 안의 귀족들에게 소식이 전해지고 모두를 묶어둔 황제.저 또한 방 하나를 배정받고 상황을 살펴보던 참이었다.사람은 드나들 수 없었지만 제가 심어놓은 세작을 통해 전해 들은 것, 그것은 더 이상 이 일에 후작 자신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하필이면 쓰인 독의 정체가 레토라니.레토를 취급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지만 죽을 것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독한 것.구하기 어려웠기에 희귀했지만 찾는 이들은 꽤 있다.액체에 섞이면 제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특유의 깨끗함.

    바로 증거가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값이 치솟았으니 애초에 다룰 수 있는 곳이 몇 없었다.그중 하나가 바로 데이비드 후작이었다.이제 황족이 쫓을 터였다.

    들쑤시다 괜히 저까지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닐지 화가 치솟는 데이비드였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곧이어 시종이 황제의 명을 전하러 왔다.

    “모두 돌아가셔도 좋다고 하십니다.”

    귀족들이 제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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