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비비안 윈데이너가 독을 먹고 쓰러진 지 하루가 지났다.그녀가 머무는 3층은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왕세자가 독을 먹은 것이었기에 왕국 남매 또한 자연스레 그 층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과연 얼마나 묶어둘 수 있으려나.”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늘어뜨린 클라라의 목소리가 차분했다.일이 있은 직후 황궁의 모든 문은 봉쇄되었다.
궁 밖을 둘러싼 기사들의 엄중한 감시 아래 단 한 명도 제집으로 돌아가기는커녕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는 중인데.
“길어야 이틀이겠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찻잔을 내려놓던 에녹이 답했다.때마침 황태자의 탄신 축하 연회가 벌어지던 중이니 제국 내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이곳 궁에 머무른 참이었다.무려 제국의 황궁에서 타 왕국의 왕세자가 독을 먹었으니, 일의 경중을 따져 황제의 권한으로 그들 모두를 붙잡아 두었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늦어도 내일이면 보내줘야겠지.”
제국의 어떤 귀족이 이런 허무맹랑한 일을 꾸몄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두 남매가 걱정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왕후 전하가 엮여 있지는 않겠지.”
머뭇거리던 클라라가 작게 속삭이며 미간을 찌푸렸다.아무리 자식 중에 왕세자로 세우고 싶던 이가 따로 있는 어머니라지만, 설마하니 제 자식에게 독을 먹이랴 싶으면서도 온전히 의심을 놓을 수 없었다.깊게 가라앉은 에녹의 눈동자가 싸늘히 식어갔다.
“죽지 않을 만한 독을 쓴 것으로 보아 확률이 더 올라가는군.”
조소를 띤 왕세자가 누이를 바라보았다.
“너도 그리 생각하고 있잖나.”
제국에서 왕세자가 독에 당했을 때, 가장 이득을 볼 법한 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실제로 실현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가장 유력한 자가 제 어머니, 왕후라는 것이 못내 기가 막힌 왕세자였다.
“독을 사주한 것이 제국민으로 밝혀지면 이 제국이 나를, 더 나아가 왕국을 상대로 척을 지겠다는 의미가 되는 것인데.”
이를 왕국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왕후 측에서는 왕국이 아닌 왕세자의 탓으로 몰고.
제국에겐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요구하면서 저하의 능력과 자격에 대한 논란을 빌미 삼아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어머니가 퍽 신이 나겠지요.”
내용과 다르게 마치 노래하듯 말을 전한 클라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눈썹을 들어 올린 에녹이 한숨을 쉬었다.정말 왕후가 이 일을 주도한 자라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라 생각한 왕세자가 손을 들어 제 미간을 문질렀다.
“이걸 제국이 안다면.”
동시에 두 사람 모두가 끔찍한 결말로 향하는 그림을 그려보고는 인상을 썼다.
“…차라리 오라버니가 마시는 게 나았겠군요.”
거짓 하나 담지 않은 진심을 툭 내뱉은 클라라의 말에도 에녹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두 남매는 응접실에 있던 그 누구보다 침착했고 그랬기에 거기 있는 모두를 다 눈에 담았다.황제의 고함 속에 섞인 누를 수 없던 감정, 황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던 것.황태자의 핏기 없는 얼굴에 비친 절망.무엇보다 감히 쳐다보기조차 어려웠던 디에고 브라이트.
“기사단을 이끌고 왕국으로 쳐들어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비비안 윈데이너가 혹여라도 잘못된다면, 어쩌면 슈베른 왕국이 대공령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한 에녹이 머리를 털었다.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부디 영애가 무사히 깨어나 주면 고맙겠군.”
*고요한 방 안, 창백하게 질린 비비안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디에고.침대에 고이 누워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비비안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이마를 맞붙였다.
“…….”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났다.아무도 나갈 수 없는 지금의 황궁에서 유일하게 마이어 백작 영애만이 예외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는 재빨리 황태자에게 허락을 구하고 레사를 움직이기 위해 나섰다.그 길에 브라이트가의 기사와 콘라드를 딸려 보낸 디에고는 비비안이 있는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중이다.의원 서넛이 붙어 그녀의 상태를 면밀히 확인하였고, 가장 가능성 있는 해독제를 지속적으로 준비했다.힘겹게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비비안의 얼굴로 향했다.붙잡은 그녀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불안해진 디에고가 가만히 그녀의 숨을 확인한다.벌써 몇 번째일지 모르는 일련의 행동들.비비안의 숨을 찾고 심장의 박동을 확인하지 않고는 디에고의 숨통이 트이지 않았다.
“…각하, 잠시 영애께서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긴장감에 침을 삼킨 의원이 고개를 조아리며 디에고에게 약을 내밀었다.
“나가봐.”
약을 채 삼키지 못하고 흘려내던 그녀를 보며 조급해하던 디에고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비비안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묽은 노란빛의 액체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의원이 나가는 소리와 함께 한 모금 입에 담았다.한 손은 비비안의 등을 감싸고, 다른 손으론 그녀의 입을 벌린 채 그대로 몸을 내린 디에고가 입을 맞췄다.맞닿은 입술 사이로 그녀의 무사를 간절히 비는 디에고의 애틋한 기도 끝에 빈 병이 탁자 위에 놓였다.그리고 의자에 앉은 그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발, 비비안.”
검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몸은 반사적으로 비비안에게 향했지만 자신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그렇게 많은 피를 토해내고 쓰러진 작은 몸을 껴안은 저는 죽음의 공포에 잠식되었었다.제 험난했던 어린 시절에도 이토록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언제나 살아남겠다는 의지와 방법이 있었으니까.그런데 지금 이 순간.디에고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회생할 방법 하나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탁―문이 열리고 침착하지 못한 발걸음이 침대 가로 향했다.
“…아직, 아직입니까.”
잔뜩 가라앉은 황태자의 물음에 디에고가 고개를 저었다.
둘 사이로 비명에 가까운 정적이 돌았다.
“무슨 독인지부터 알아내야 한다더군.”
“지금 비비안의 손이 닿았을 법한 것을 다 조사 중인데, 독의 흔적이 없습니다.”
비비안이 피를 토하기 직전 마셨던 물, 가장 의심이 가는 것이기에 바로 조사에 들어갔지만 독으로 추정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지금은 당장 몸에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독으로 인한 증상을 약화하는 약만이 들 뿐이었다.
“…이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라 합니다.”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이었음에 억눌린 음성이 디에고에게서 간신히 뱉어졌다.주먹을 말아 쥔 황태자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무려 제국의 황태자와 대공이건만, 이 순간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두 사람이 한없이 무력하게 침대에 누운 비비안을 간절히 바라봤다.
“찾아, 오겠습니다.”
목이 메어 애끓는 목소리를 낸 황태자가 뒤를 돌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데.탁―벌떡 일어선 디에고로 인해 그가 앉았던 의자가 소음을 내며 뒤로 넘어갔다.그가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비비안에게 몸을 숙인다.
‘분명.’
손가락이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제가 힘을 주지 않으면 어느 한 곳 미동도 하지 않던 비비안의 몸.다급하게 그녀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감싼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비안.
비비안.”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눈가가 움찔한다.어느새 돌아온 황태자가 디에고의 옆에서 숨죽이고 그를 응시했다.
말아쥔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가 떨리고 있었다.아주 작은 신음을 흘린 비비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윽.”
멍하니 두어 번 눈을 깜빡인 그녀에게서 신음이 터졌다.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는 비비안을 멍하니 보던 두 사람의 숨이 순간 멎었다.
“…의원.
의원!”
황태자의 외침에 문밖이 부산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비비안의 얼굴 위로 톡, 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그에 볼을 움찔, 떤 비비안이 흐릿한 시야에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보았다.제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내려다보는 이.
물방울의 정체가 디에고의 눈에서 흐른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비비안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지금 울어?’
너무 놀라 그를 보았으나 착각이었나 싶게 눈물의 흔적은 없었다.
“…….”
운 게 맞냐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고 싶은 비비안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비비안이 얼굴에 놓인 그의 손을 잡으려 제 손을 들었으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목도 타들어가는 것 같고, 온몸 구석구석 돌덩이가 누르고 있는 것처럼 압박감이 느껴졌다.
‘몸 안이 다 쑤시는 것 같은데.’
인상을 찌푸린 그녀 탓에 디에고가 움찔, 떨었다.
비비안이 눈동자를 움직여 뺨에 닿은 디에고의 손을 가리켰다.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손을 떼자 바로 비비안의 속마음이 눈앞에 펼쳐진다.[지금 목소리가 안 나와요! 보이세요? 보이죠, 이제?]마른침을 삼킨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요? 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고요.]고요한 겉과 달리 우수수 쏟아내는 비비안의 속마음을 확인하던 디에고가 다른 질문을 한다.
“…괜찮은 거야? 아픈 데는?”
푹 잠긴 목소리에 짓눌린 감정이 담겨 있었다.[…괜찮아요.
아니, 사실은 온몸이 다 아프기는 한데.]그녀에게서 아프다는 말을 전해 듣자 디에고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아픈 것이 당연한 상황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직접 듣자 가슴이 답답해졌다.저 연약한 몸으로 대체 얼마나 고통을 참아내고 있을지.
대신 아파줄 수 없음에 그야말로 미치기 직전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비비안.”
[각하가 왜 미안해요? 그보다 우셨어요? 제 볼에 이거 물기, 이거 각하 눈물이에요? 진짜?]왜인지 호들갑스러운 글자들을 보며 디에고가 한숨을 삼켰다.
“마음대로 생각해.”
“…대공, 아까부터 계속 무엇을 그리 혼자 말씀하십니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비비안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던 황태자마저 계속 이어지는 디에고의 혼잣말에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앗!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네요!]
“아닙니다.”
황태자를 향해 답한 디에고가 다시금 비비안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서일까, 여전히 창백한 상태인데도 그녀의 눈동자가 빛을 발하니 한결 생기가 돌았다.*
“…독을 마셨어.
하루가 지났고.”
‘와, 독? 제가 독을 마셨다고요? 왜?’
그간 온갖 시기, 질투를 받으며 살아왔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독을 사주받은 적은 없었건만.놀라움도 잠시, 그날의 일들을 되돌아 생각하던 나는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 제가 자리에 앉기 전에 한 사용인하고 눈이 마주쳤었어요.’
“사용인?”
‘네.
좀 이상해서 기억이 나요!’
디에고의 눈이 한없이 어두워지며 내 귀 가까이 얼굴을 내렸다.나가려던 것처럼 보였는데, 한참 내 쪽을 응시했었다.
그게 의아해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고 바로 다급하게 응접실을 나가던 사용인.
“특징이나 어디가 이상했는지 알려줄 수 있겠어?”
좀 떨어져서 말하면 안 되겠니? 나는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데, 이렇게 숨이 느껴질 정도로 귓가에 속삭이면 정말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