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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67화 (67/109)
  • 67화

    【 독의 주인 】

    “의원! 의원을 들여라!”

    황제의 고함에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다급하게 달려 나갔다.비비안이 울컥 피를 토해내는 순간 뛰어 들어온 디에고가 그녀를 받쳐 안았다.이미 정신을 잃었음에도 간헐적으로 피가 흐르는 비비안의 입가에 그가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고도 차마 닿지 못한다.

    “…비비안.”

    목이 메는 듯 낮고 애절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비비안의 희미한 숨 끄트머리라도 확인하기 위해 디에고는 제 숨마저 멈추고 그녀를 살폈다.확연한 어둠이 제 온몸을 잠식해 나가는 것 같았다.

    주위의 모든 소음마저 그 어둠 속에 잡아먹혔다.디에고는 비비안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

    가늘게 박동하는 가슴.

    살아 있는 자의 온기.

    “안 돼…….

    안 돼, 비비안.”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황태자의 눈동자에도 공포가 가득했다.

    어릴 적 비비안의 마차 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그녀를 잃을 것이라는 실감은 나지 않았었다.그런데 지금 이렇게 허무하게 눈앞에서 비비안의 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 밀려왔다.쾅―그 순간 헐레벌떡 시종장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선 의원이 동시에 쏟아지는 칼날 같은 시선들을 맞닥뜨리고 기겁했다.

    “뭣 하느냐! 얼른 영애를 살피지 않고!”

    황후의 서릿발 같은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거의 뛰다시피 비비안에게 향했다.크림색 드레스가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은 채 대공의 품에 안겨 있는 후작 영애.제가 살펴야 할 대상을 확인한 의원의 얼굴에 순간 낭패가 스쳤다.

    작년 호숫가 뱃놀이 때에도 저를 퍽 식은땀 흘리게 하던 이가 이번에는 아예 피 칠갑을 하고 제 목을 조여왔다.이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몸을 살피는 의원의 이마 위로 땀이 흥건했다.

    “독…….

    독을 마신 것 같습니다.”

    의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응접실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우, 우선 몸을 따듯하게 하고 해독제를 복용해야 합니다.

    아직 어떤 독인지 알 수 없으니 가장 넓게 효용 되는 약부터 준비하겠습니다.”

    숨통을 조여오는 공기로 인해 겁에 질렸음에도 환자의 위중한 상태를 확인한 의원이 목소리를 냈다.

    “저, 저는 약을 준비하러 갈 터이니 영애를 방으로 모시는 것이…….”

    벌떡 일어나 눈치를 보는 그에게 황후의 허락이 떨어졌다.

    “황궁을 봉쇄하라.”

    이어진 황제의 엄명에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제1 기사단장이 명을 받았다.그사이 차분하게 상황을 살피던 클라라가 에녹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슬쩍 왕세자 곁으로 자리를 이동한 왕녀가 속삭였다.

    “이건 오라버니를 노린 것 같기도 한데.”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비비안을 품에 안고 있는 디에고를 본 에녹이 손으로 제 이마를 쓸었다.

    ‘여차하면 나도 썰어버리겠군.’

    의원의 말을 되새긴 디에고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일어섰다.

    제 품에 안긴 비비안의 미약한 숨을 찰나라도 놓칠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운 그가 응접실을 등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흔들리던 분홍빛 머리칼에 시선을 두었던 황태자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독이라…….

    응접실에 놓인 모든 물건의 출처와 출입했던 명단, 그 외 관련한 모든 걸 조사해.”

    리안의 억눌린 목소리에 이어 황태자 휘하 제2 기사단장이 몸을 움직였다.에녹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비안 윈데이너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이가 아니었다.그녀가 앉은 자리, 원래라면 슈베른 왕국의 왕세자가 앉았을 터였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어렵게 입을 떼었다.

    “송구하오나 정황상 그 독은, 제가 마실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녹의 담담한 발언에 황제와 황태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왕세자.”

    “영애가 앉은 자리, 예정대로라면 제가 앉았을 자리입니다.”

    그제야 상황을 읽어내기 시작한 황족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여기서 일어난 모든 일을 함구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고, 에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에서 독을 마시고 쓰러진 것은 저여야만 했다.이 일을 사주한 사람의 귀에 들어가야 할 결과.

    “그럼 누군가의 계획대로 제가 쓰러진 것으로 하지요.”

    “황궁 복도와 사용인들을 단속하도록 하게.”

    황후의 명에 그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시녀장이 응접실을 나서 복도의 사용인들을 모두 물리고, 왕세자가 머물 방을 마련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황태자는 나와 상황을 정리하도록 하지.”

    “…예, 폐하.”

    지금이라도 당장 비비안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른 리안이 주먹을 말아쥔 채 황제의 뒤를 따랐다.황후가 사건의 현장인 응접실을 통제하는 동안 왕세자와 왕녀는 서로의 시선 속에서 걱정을 읽어냈다.

    “시녀장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옮기시지요.”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세자와 왕녀마저 보내고 난 황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손으로 제 머리를 짚은 그녀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비비안 윈데이너는 무사해야 했다.제 친우의 딸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황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제발…….”

    간절한 음성이 그녀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황궁 복도 한구석, 한 여인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위를 살피고 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미 일어났을 시간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잘근잘근 씹던 손톱을 내팽개친 그녀가 초조하게 맴돈다.

    “예정에 없던 건 왜 나타난 거야!”

    마지막에 제가 응접실을 나설 때 분명 왕세자가 비비안 윈데이너에게 제 자리를 청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설마…….

    정말 거기 앉은 건 아니겠지?”

    “세라, 여기서 뭐 해?”

    고개를 털던 여인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어깨를 움찔하곤 뒤를 돌아봤다.

    “잠깐 쉬고 있었어.”

    얼굴이 굳어진 세라를 보던 여인이 못마땅하다는 듯 샐쭉하니 말을 이었다.

    “시녀장님이 찾으셔.”

    “…나를?”

    세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벌써 다 들킨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세라 너만 콕 집어서 찾으실 이유가 있으시겠니.

    그냥 오늘 근무한 이들은 다 모이라고 하셨다고.”

    한심하다는 듯 핀잔을 준 여인의 뒤를 따르면서도 세라의 등은 식은땀으로 젖기 시작했다.아무래도 이상했다.한창 연회가 열리고 있는 와중에 궁의 사용인들을 불러 모으다니.

    지은 죄가 있기에 모든 상황이 다 의심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그러나 연회가 열리는 날의 궁이다.사용인들은 넘쳐났고 모두가 바빴으며 일이 일어난 응접실만 해도 손을 보탠 사용인의 숫자가 수십을 넘어갔다.

    ‘절대, 절대 나인 줄 모를 거야.’

    개중에 저를 골라낼 수는 없으리라.

    애써 마음을 추스른 그녀가 후일을 도모했다.그 많은 사용인들을 다 수용하기 위해서인지 비어 있는 홀로 모두를 소집한 시녀장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수가 많군.”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홀을 맡은 최소한의 사용인들 외, 오늘 이 궁을 들락거린 이들만을 불러 모았으나 그 수가 상당했다.세라 역시 홀을 가득 메운 이들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오늘만 무사히 지나가면 삶이 바뀌리라, 날 때부터 욕심과 허영을 타고났으니 궁내 하녀 생활은 지긋지긋했다.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과 영애들이 궁에 머물 때면 솟아나는 시기에 밤잠을 이루기 힘들었다.타고난 신분은 어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하면 저들처럼 자신을 한껏 꾸미고, 일하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 아주 쉬운 일입니다.

    바로 그날 궁을 떠나는 이들에 섞여 원하던 삶을 사시면 되는 거지요.그리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연회가 끝나면 저 하나쯤 섞여 나간들 누가 알겠는가.

    궁내 머무는 하녀만도 수백인데.제 빈자리를 눈치챘을 땐 이미 수도를 떠났을 거였다.

    일이 고되 도망간 걸로 치부하겠지.

    “이 바쁜 와중에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은 것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잔뜩 가라앉은 시녀장의 목소리가 홀 내에 울려 퍼졌다.

    “황후 폐하의 보석이 사라졌으니, 그것을 찾을 때까지 아무도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음을 아세요.”

    세라의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한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보석?! 지금 보석 따위가 중한 게 아닐 터인데! 왕세자는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세라가 다시금 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주변의 웅성거림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제국에 방문한 왕세자가 독을 먹었다.

    이는 곧 나라 간의 전쟁이 되고도 남을 문제였다.

    그렇게 민감한 사안을 곧이곧대로 외부에 노출할 것이라 여길 만큼 세라는 무지했다.자기가 무슨 짓에 가담한 것인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 것인지 그녀는 몰랐다.

    “어떻게 나가지……?”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이곳 홀에만 머물면서 출입을 통제받아야 한다는 것에 충격을 먹은 세라는 당황했다.그리고 그런 엄청난 일을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행할 만큼 생각이 없는 그녀는 이번에도 쉽게 결정을 내렸다.

    ‘내일, 내일이면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런 세라를 비롯해 홀 내 사용인들을 매의 눈을 살피던 시녀장은 제 옆에 선 기사와 함께 최대한 용의자를 추려내고 있었다.

    “우선 영애께서 물을 드시고 그렇게 되셨으니, 물잔에 손을 댄 이들부터 추려내도록 하지요.”

    사실 회의적이었다.

    공식적인 동선 안에서 거론되는 이들을 걸러냈어도 그사이 어떤 자가 몰래 일을 꾸몄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꼼꼼하게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시녀장이었다.

    “누가 감히 황후 폐하의 물건에 손을 댔다는 걸까.”

    “설마, 그렇게 생각 없고 미련한 짓을 하는 자가 있다니.”

    제 옆에서 황당하다는 듯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들은 세라가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너희는 지금도, 앞으로도 고작 하녀 일이나 하다 죽게 될 거라고.남자가 제게 이 일을 맡기며 약속했다.

    대가로 평생 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돈을 쥐여주겠다고.

    게다가 황궁만 제힘으로 빠져나가면 그 뒤 도망길마저 마련해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이제 이 거지 같은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희망에 부푼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리고 그 순간, 사건이 벌어진 응접실과 관련된 이들을 솎아내던 시녀장이.

    “세라.”

    그녀의 이름을 호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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