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66화 (66/109)
  • 66화

    *황태자의 탄신 축하 연회…….

    오긴 왔는데 마음이 너무 무겁다.그런 내 마음과 다르게 연회장의 화려함이 그 어느 때보다 더했다.

    사람도 그만큼 많고.그간은 비오첼라 사건으로 다들 자숙하는 분위기여서 연회가 열리지 않았던 데다 슈베른 왕국의 왕세자, 왕녀가 참석했으니 이럴 만도 했다.벌써부터 제 자식들을 앞세워 왕국에서 자리 하나 꿰차고 싶은 귀족들의 눈빛이 드글드글했다.

    “둘 다 약혼자도 없고, 외모도 뛰어나니 그럴 수밖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연회장 한구석으로 향했다.황태자와 함께 보낸 하루 이후 저택에 박혀 며칠을 보냈으나 여전히 어렵고 어려웠다.

    내가 받기엔 너무 과분한 진심이었다.나도 모르게 주먹 쥔 손으로 머리를 친 후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날 이후로 나는 대공도 마주하지 않았다.

    그를 보면 눈물부터 날 것 같아서.애꿎은 바닥을 치며 한숨만 폭폭 내쉬는데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영애, 여기서 혼자 뭐 하시나요.”

    이 목소리는! 이것은!

    “스텔라.”

    울상을 짓고 그녀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자 두 걸음 물러선다.

    여지없이 인상을 찌푸린 스텔라가 부채를 펴 제 입을 가렸다.

    “자리를 옮기죠.”

    고개를 끄덕이고 앞서 걷는 스텔라의 뒤를 따르는데 걸음마다 흔들리는 그녀의 붉은 머리가 탐스러웠다.탁―테라스에 들어서자 힘있게 부채를 접어 테이블에 던진 스텔라가 소파에 앉았다.

    “앉으세요.”

    내가 요즘 심신이 지쳐서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데 옆에 앉으면 안 되겠지.

    힐긋 옆자리에 시선을 주었지만 그녀는 가차 없이 앞자리를 가리켰다.터덜터덜 걸어 소파에 안착하자 메마른 음성이 들려온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실까요.

    아, 아닙니다.

    그냥 말씀하지 마세요.”

    “…어차피 말하기 어려운 일이긴 한데.”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그녀가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보나 마나 대공 각하와의 일 아니겠습니까.

    두 분 참, 요란하게 연애하십니다.”

    아닌데! 대공과 아예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진짜 아닌데.

    “그게 아니라.”

    물끄러미 나를 향한 주홍빛 눈동자에 황태자의 금안이 겹쳐 보였다.어릴 적부터 내 가족이라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이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니.

    게다가 얼마 되지도 않는 친우의 연모 상대가 하필!세상 참 좁기도 하지.가슴이 답답해졌다.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 내려놓자 스텔라가 쿠키가 든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이번에 방문한 왕녀 때문인가요?”

    왕녀? 은발의 푸른 눈을 한 미인을 떠올리자 절로 미간에 주름이 졌다.

    황태자와의 일이 있기 전에는 그게 가장 큰 고민이기는 했는데.내 표정을 뭐라 오해한 것인지 스텔라가 빠르게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왕녀는 계산이 빠른 자예요.

    가망이 없는 일에 힘을 낭비하는 자가 못 되죠.”

    그녀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자 검지로 제 술잔을 빙글 문지른 스텔라가 미소 지었다.

    “진심으로 대공에게 달려들지는 않을 거란 말이죠.”

    하지만 약혼자에 대해서 물었었다.

    저 또한 그 자리를 비워둔 채라고.

    디에고를 보며 눈을 빛내던 그 얼굴이 생생했다.

    “무엇보다 각하는 비비안 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남성이 아니랍니다.”

    뭐라? 스텔라가 항시 맞는 말만 하는 친우라지만 이것만큼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제가 알기로 각하를 흠모하는 이들이 꽤 된다고.”

    작은 목소리로 주장하자 비웃음이 돌아왔다.

    “그건 각하를 모를 때 이야기지요.”

    알면 더 좋은데…….

    무슨 말을 해도 받아줄 것 같지 않으니 말을 삼켰다.장난기가 남아 있던 스텔라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윈데이너가의 돈은 아주 잘 쓰고 있어요.

    원체 가져다 써도 티 하나 나지 않으니 마음 편하더군요.”

    레사 앞으로 광산 하나의 사용권을 쥐여주었다, 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임시이긴 하다만.지금 레사가 하는 일에 의뢰인은 없다.

    그에 반해 들어가는 비용은 천문학적이니 내가 지불하는 게 맞지.

    “양껏 쓰세요.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그 정도네요.”

    머쓱한 듯 희미하게 웃자 스텔라가 잔에 든 술을 털어 넣었다.

    그러고도 뭣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꼿꼿한 자세가 아주 멋져.

    “사실 지금 레사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고 있답니다.

    혹은 날개를 단 새처럼.

    모두 영애의 돈 덕분이죠.

    시간을 당기거나 효율을 높이는 데 돈만 한 것이 없다니까.”

    요염하게 웃으며 선심 쓰듯 하는 말에 온기가 느껴졌다.

    ‘너어는 정말!’

    내가 의기소침하지 않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스텔라가 고마웠다.

    “그것참, 기쁜 소식이네요.”

    “소식 하니 말인데, 준비하던 왕국 쪽 상단은 채비를 끝냈더군요.

    제국의 약재상도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아무래도 비오첼라가 망한 것에 벨리타 상단이 엮인 것이라 여겨서인지 후작은 쉽사리 다른 상단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았다.

    “결국 방법이 없으면 선택을 할 테죠.

    그리고 우린 후작에게 정해진 선택지만을 줄 예정이고.”

    썩은 상처를 도려내고 새순이 돋을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스텔라와 담소를 나누는 동안 잠시 멀어졌던 고민이 그녀가 볼일을 보기 위해 떠나자마자 다시 나를 찾아들었다.연회 주인공의 등장이 머지않았기에 테라스에 머물던 귀족들 또한 하나둘 연회장에 자리했다.시종이 슈베른 왕국 왕세자와 왕녀의 도착을 알려온다.크고 화려한 연회장 중앙의 문이 묵직하게 열리고 파랑이들이 미소로 띤 채 걸어 들어왔다.오늘도 둘 다 자신의 색으로 온통 무장한 것이 한결같은 취향이구나.그들의 등장과 함께 곳곳에서 감탄과 탄성이 터졌다.

    “왕세자 저하가 정말 어른이 다 되었군요.”

    나이 지긋한 귀부인이 감회에 젖어 말하는 것을 보아 왕자 시절 제국을 들락거리던 왕세자를 기억하는 듯했다.

    “왕녀가 아름답다고 제국에까지 소문이 자자하더니 거짓이 아니었네.”

    열에 들뜬 소년처럼 중얼거리는 귀족 영식도 보이고.친절한 미소를 곁들인 채 귀족들 사이를 유영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꽤 능숙했다.이런 일 되게 잘할 것 같기는 했지, 둘 다.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왕세자와 눈이 마주친다.

    눈웃음을 던진 그가 제게 다가온 귀족을 상대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얼굴 몇 번 봤다고 내가 친숙해서 그런가.그렇게 왕국의 파랑이들이 연회의 중심이 되어 충분히 시선을 끈 이후에나 황태자가 도착을 알려왔다.

    ‘축하드려요, 전하.

    이 짧은 말만 제대로 하자, 제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 곳, 거기 제국의 차기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옅은 미소를 머금은 리안이 천천히 연회장을 가로질러 단상으로 향했다.

    뒤이어 황제 내외가 들어서고, 그들의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진정한 연회가 시작되었다.작위순으로 단상에 오르는 거 누가 정한 거야.후작가 중에서도 명망 높은 윈데이너는 그 순서가 빨라도 너무 빨리 왔다.아버지와 함께 단상에 오르는 길,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아직 나는 리안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황제 내외와 덕담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들은 말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리안의 발끝에 시선을 두고 인사를 하는 내내 마음을 다잡았다.크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들자 평소와 같은 다정한 미소의 리안이 눈을 맞춰온다.

    “…전하, 축하드려요.”

    가늘게 목소리가 떨린 것 같지만 축하의 말을 건넬 수 있어 다행이었다.

    “고마워, 비비안.”

    짧은 눈인사를 뒤로하고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몸을 욱여넣었다.벽에 기대 가쁜 숨을 가다듬는다.

    아무렇지 않게 리안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래도 더는 그를 속일 수 없다.

    ‘생일이 지나고, 그러고 나면 그때.’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종이 내게 말을 전했다.

    믿을 수 없는 말을.아니야.

    내가 잘못 들었겠지.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전할 내용을 내게 잘못 전달한 것을 아닐까?

    “…정녕 윈데이너 후작 영애에게 전하라 한 게 맞는가.”

    내 간절한 희망을 시종은 단칼에 잘라내었다.

    네가 맞다고, 나는 제대로 일을 처리했노라 당당한 눈빛이 참.슬쩍 단상을 바라보자 하나둘 모습을 감추는 황족과 왕족이 보였다.

    일어서서 어딘가 간다.

    그런데 나도 거기 오란다.아니, 한 나라를 잇는 너희랑 나는 다르잖아.내 옆에 선 시종 또한 단상을 보더니 나를 종용했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제일 늦게 거기 도착하는 건 아닌 것 같지?

    “가시죠.”

    나는 행여 눈물이 흐르지는 않을까, 눈을 깜빡이곤 시종의 뒤를 따랐다.북적대는 연회장을 나와 복도를 걷는데 도망가고 싶다.열리는 문틈 사이로 제일 먼저 황후의 얼굴이 보였다.

    “어서 오게, 영애.”

    “폐하, 이런 귀한 자리에 저를 불러주시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 나가보라고 해주면 좋겠다.

    “영애가 왕국의 손님들께 어찌나 잘해주었는지 꼭 같이 자리를 하고 싶다 청하더군요.”

    파랑이 너희들 탓이었어?

    “영애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나보다 한발 빠르게 도착한 것인지 의자에 손을 대고 서 있던 왕세자가 내게 눈짓했다.그냥 너 앉지 그래.

    거두어지지 않는 그 시선에 어쩔 수 없이 왕세자가 빼주는 의자에 착석했다.맞은편에 이미 앉아 있던 왕녀가 새초롬하게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황후, 왕국 파랑이들과 함께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자 복도에서부터 소란함이 들려왔다.이 자리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황제와 황태자의 발걸음이 분명했다.

    그들이 들어서기 전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물잔을 쥐었다.

    ‘물 마실 틈이 날지 모르겠으니 지금 마셔둬야지.’

    긴장으로 인한 갈증에 물잔 가득 담겨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탁―빈 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응접실의 문이 열린다.예상대로 황제와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한 사람, 디에고의 눈썹이 위로 솟구친 채 내 쪽을 바라봤다.나도 내가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구나.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도로 의자에 앉으려는데 허리가 굽어졌다.

    무언가가 울컥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느낌에 손으로 다급하게 막았으나 손가락 사이로 주륵 흐른다.

    “…피?”

    붉은 피가 하얀 테이블보에 점점이 떨어지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갑작스러운 비명과 어수선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음.그리고.

    “비비안!”

    내 이름을 부르는 디에고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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