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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65화 (65/109)

65화

*어색한 기운이 감돌던 보석 상점을 나오고도 쭈뼛대는 나와 달리 눈앞의 황태자는 느긋했다.낮은 묘목과 넝쿨이 테이블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어 서로를 들여다보지 못하게끔 마련된 식사 자리.하긴, 천은 벗어두고 식사를 해야 하니까.

넓은 정원을 이용해 사적인 공간을 그려낸 장소가 탁월한 선택이기는 했다.

“식사는 얼굴을 가리고 하기 힘들 것 같아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게 평소의 황태자 같으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다르다.그런 리안을 살며시 살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날씨 덕인지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그러나 내게는 이 좋은 날씨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여느 때처럼 궁에서 잠시 산책 정도 하려니 가볍게 생각했는데.

‘…뭔가 두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만 뚫어져라 바라보다 슬쩍 고개를 들자 리안이 미소로 반겨준다.오늘따라 다양한 미소를 선보이는구나, 너.

“비비안, 이제 언제 어디서든 잘 먹고 다녀.”

한 손에 턱을 괸 리안에게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음성이 날 다독였다.

“더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모든 것을 네가 모르고 있을 거라 여기지는 않았다.다만 저를 속였다는 괘씸함보다는 나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컸을 거라는 건 짐작하지 못했다.

“…화가 나지는 않으세요?”

이유를 떠나서, 너에게 거짓말을 하던 내게.차마 눈을 보지 못하고 애꿎은 찻잔을 어루만지자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접시가 놓였다.

“화났지.”

리안이 건네준 접시 위에는 어느새 정갈하게 썰린 스테이크가 있었다.

“너를 그렇게 만든 나한테.”

무슨 소리인가.

네가 아니다.

지난 그 어떤 괴로움에도 그의 탓이었던 건 하나도 없었다.

“전―”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리안이 제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대었다.솔직히 테이블 간 거리가 꽤 되어서 우리 이야기가 들릴 것 같지도 않은데, 호칭이 대수인가!

“…리안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래도 이 말은 지금 꼭 해야만 했다.처음 발끈해서 튀어나온 외침보다 현저히 작아진 목소리 덕에 거의 웅얼거리는 것과 같았지만.

“미안.

소리가 작아서 못 들었는데.”

네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힐긋 보이는 리안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못해 넘쳤다.

“들으신 거 다 알아요.”

턱을 괴었던 손을 떼어낸 리안이 몸을 바로 했다.

“진심으로 비비안을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꽤 오랫동안 네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어.”

씁쓸하게 웃은 리안이 제 잘못이 맞다며 다시 한번 고했다.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데 그가 사과가 든 샌드위치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비비안하고 같이 제대로 식사하고 싶어.”

“이것도 하고 싶었던 일이세요?”

장난스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의 목소리가 산뜻했다.

“응.

이것도 내게 생일 선물로 주었으면 좋겠는데.”

애써 무거운 분위기를 지우려는 리안의 노력이 느껴졌다.

마음은 혼란스럽고 아렸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함께하는 정도라.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포크를 손에 쥐었다.이 분위기에 과연 음식이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겠는가.

반쯤 체념한 채 감흥 없는 포크질로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는데, 맛이 좋았다…….오늘 만남에 앞서 황제를 알현하느라 어제부터 지금까지 굶었더니 이성보다 본능이 앞섰다.

“매일이 생일이었으면 좋겠군.”

나는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든 채, 방싯대는 리안을 흘겨보았다.

“욕심이 많으시네요.”

그렇게 노을을 배경 삼아 이어지던 식사가 마무리되었을 땐 이미 해가 다 진 후였다.정원을 나서면서 알았다.

보석 상점 이후 계속 잔존하던 불편함이 어느새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디저트로 케이크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다니.

사람 이성이라는 게 참 우습기도 하지.’

배는 불렀으나 그만큼 허탈했다.

먹어댄 음식들을 곱씹으며 푸르스름하게 물든 번화가 거리를 걸었다.

“한 군데 더 들를 곳이 있는데, 괜찮아?”

예.

갑시다, 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내가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준다.긍정의 고갯짓을 리안에게 선사하자 또 웃는다.

그의 기분이 몹시도 좋아 보였다.

궁 밖으로 좀 나왔다고 사람이 저렇게 밝아질 수 있나.

“그럼 가지.”

마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내가 아는 곳이었다.봄에 리안과 산책을 나와 푹신한 천 위에서 달콤한 낮잠을 잤던 그 작은 숲.그때와 다르게 밤이 내리고, 은은하게 노란빛을 자아내는 등이 길을 따라 펼쳐졌다.멍하니 동화 같은 풍경을 보고 있자 나를 지나쳐 앞으로 간 리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같이 걷자.”

그렇게 밤 산책이 시작되었다.발치에서 은근한 빛을 내는 등들이 숲의 전경을 한층 더 아름답게 꾸몄다.

조금은 몽롱하고 신비한 그 분위기가 오늘의 리안과 닮아 있다.

“잠깐 앉을까.”

역시나 저번 봄 산책 때와 마찬가지로 도톰한 천이 깔려 있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구두를 벗어 던지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아서 다행이다.천 위에 자리를 잡은 리안이 가발을 끌어 내렸다.

붉은 머리가 사라진 자리에 그의 금발이 찰랑인다.익숙한 금발의 황태자를 마주하자 괜스레 안도감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뜸을 들인다.

곁눈질로 바라본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내 리안의 눈동자 안에 내가 비치자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비안을 닮았더라고, 이 숲이.”

다른 사람이 되겠다던 그는 정말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네게 주려고.”

“네?”

“그러려고 내 소유가 된 숲이거든.”

마치 초콜릿 하나 산 것처럼 가벼이 말하는 투가 기가 막힌다.개인이 소유하지 않은 모든 땅은 제국에 속했다.

즉,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은 땅을 소유하려면 그만한 금액을 지불하고 얻어야 한다는 뜻인데.수도 중앙에, 그것도 황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땅.

작다지만 엄연히 숲이라 칭할 만큼 광활함을 지닌 이곳의 값이 그리 쉬이 취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을 거다.그걸 사? 얼마 주고? 샀으면 저나 잘 가지고 있을 일이지.

그걸 왜 날 주겠다는 건가!

“…전하, 부디 물러주세요.

저는 여태 받은 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이걸 받을 수는 없었다.두 손을 뒤로 짚은 채 하늘을 향한 리안의 눈동자에 달이 들어차 있다.

나를 보지 않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그나마 비비안이 받아줄 것 같은 게 이 정도라서.”

“…….”

“여기서 보낸 시간이 내게는 소중한 기억이라 네게 남겨두고 싶었어.”

그 안에 옅은 체념이 느껴져 말문이 막혔다.

“물론 종종 나와 함께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좋고.”

나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그의 말에도 웃을 수가 없었다.

제 생일까지 유보하자 했던 것이 정말 고백에 대한 내 답이었나.리안이 가지려던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지.그저 황태자라는, 제 발에 달린 추를 내려놓고 싶었던 하루라 여겼다.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눈을 감았다.그 오랜 세월 제 안에 담아뒀던 마음을, 그가 내게 전하고 있었다.*왕국에서보다 하는 일이 없으니 자연히 잠이 없어진 왕세자가 달밤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띈 황태자.

“여기서 뭐 하나.”

어둠 속에서 홀로 달빛을 머금은 그 자태에 저도 모르게 감탄한 에녹이 그를 살폈다.

“그러는 그대는 이 밤에 뭘 하는 거지.”

무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은 리안이 이내 에녹에게서 시선을 돌린다.제 궁을 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한 채 처연을 떨고 있는 꼴이 신선하기도, 우습기도 했던 에녹이 그 옆에 자리했다.

“왜 못 들어가고 있는 건가, 제 궁에.”

이 시간에 만날 것이라 생각지도 않았고, 달갑지도 않은 상대를 보며 리안이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게.”

평소 예를 넘어 아무런 일말의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말을 내뱉던 황태자를 상기한 에녹이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지금의 황태자는 무방비하다.

“나도 그런 날들이 있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

툭 산뜻하게 말을 건넨 그가 턱을 괴고는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곁눈질한 리안이 의자에 더 깊숙이 몸을 묻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

어떻게 마련한 하루던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오래 비비안과 둘만의 시간을 가져본 것은.좀 더 일찍 이런 나날을 삶에 선사했더라면 조금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종국에 비비안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늘처럼 좀 더 그녀를 웃게 해줄 수 있었더라면.너와 더 많은 것을 함께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지그시 눈을 감은 리안의 옆얼굴을 들여다보던 에녹이 입을 달싹였다.실은 알았다.

황태자가 지금 누구를 만나고 돌아온 것인지.

일국의 왕세자가 다른 나라에 머물면서 황족의 동태를 살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뭘 하고 왔길래 이 모양이야, 대체.’

그러나 아쉽게도 황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전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제국이 만만하지는 않았다.

“왕세자는 궁에 돌아가지 않고.”

샐쭉 고개를 돌린 에녹이 곧이어 짓궂게 웃는다.

“얼마 전에 디에고를 봤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 듯 미동도 하지 않는 황태자를 에녹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많이 달라졌던데.

대공령에서 나온 것 자체가 놀랍더군.”

대공이 수도에 머문 시간을 세는 것이 이제 의미가 없어졌을 정도로 그는 비비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비비안 윈데이너.”

그 이름에는 저도 모르게 반응을 보이고 만 리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진다.

“황태자비 내정자라고 했나.”

그립고도 증오하는 그 호칭을 들은 리안의 얼굴에 조소가 걸렸다.

“이제는 아니니 신경 꺼.”

짧게 탄식한 왕세자가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걸 왜 이제 알았을까.

진작에 영애를 두고 황태자를 자극할 수 있었을 터인데.그 무엇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던 황태자가 거론만 해도 이리 감정적이 되는 사람.

“왜 아니지.

바라는 것 같은데, 전하가.”

얄미울 정도로 가벼이 미소 지은 에녹이 가라앉은 리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무려 제국의 차기 주인이었다.

그런데 이리 무력하게 텅 비어 보이는 것이 못마땅한 에녹이다.작게 혀를 찬 그가 리안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린다.감히 왕세자가 황태자에게 취할 행동은 아니었으나 이 밤의 만남은 처음부터 서로가 계급을 내려놓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된 것이라, 에녹은 생각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에녹이 재빨리 손을 거둬들였다.

“아무튼 황태자 자리가 무용하다 느낄 만큼 중한 것이라면 쥐어.”

황태자의 동공이 찰나 흔들리는 것을 본 에녹이 진하게 웃어 보였다.숨만 붙어 있는, 지난날 작은 짐승과도 같았던 저를 잠시나마 곁에 머물게 해준 것에 대한 순수한 호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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