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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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선물로 시간을 받아가고 싶은데.그 수많은 생일을 지나오면서 단 한 번도 내게 뭔가를 바라지 않던 리안이 그리 말했다.
- 그때까지 답은 유보하도록 하지.바스러지는 햇살처럼 웃던 리안,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
“안 된다고 어떻게 말해?”
게다가 당연히 황태자궁에서 만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리안의 시종이 전해온 장소는 번화가의 한구석이었다.
“알 수가 없네…….”
여기를 왜 와? 여기서 뭐 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안 잡힌다.
애초에 저랑 나랑 둘이 나다니기도 힘들 텐데.마차 창을 통해 들이치는 한낮의 빛이 따사롭다.
그러니까 어둠을 틈타 얼굴을 가릴 수도 없는 이 시간에 과연 뭘 할 수나 있나!
“설마, 개의치 않고 돌아다니겠다는 건 아니겠지?”
수도의 번화가는 제국민은 물론 귀족들 또한 머무는 곳이었다.
공식적인 자리 외에 사적으로 황태자와 함께하는 모습을 들킨 적은 없는데, 설마 오늘이 그날이니? 그런 거야?황태자와 단둘이 번화가를 거닐던 후작 영애, 알고 보니 대공의 연인으로 밝혀져…….절로 손이 관자놀이로 향했다.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고 있자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이었다.
“비비안?”
아, 올 것이 왔구나.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될까.”
나긋한 황태자의 목소리가 재차 들렸다.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것을 멈추고 소리 내 답했다.
“그럼요.”
허락이 떨어지자 마차의 문이 열리고, 거기 보여야 할 이가 보이지 않는다.
“어?”
화사한 금발은 어디 가고 농익은 과실의 색을 담은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럼 잠시 실례.”
궁에서보다 편안한 차림이어서 그런가.
자칫 딱딱해 보일 정도로 단정하던 리안의 몸놀림이 평소와 다르게 가벼웠다.사뿐히 마차에 올라선 그에게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향과 함께 잎사귀 이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다.
“전하, 머리는 대체…….”
손을 들어 붉은 머리칼을 매만지던 리안이 생긋 웃었다.
“비비안이 같이 어울려 준다면.
오늘은 다른 사람이 되어볼까, 하고.”
장난스럽게 웃은 그가 내게 손을 뻗어 건네는 것이 익숙하다.
“…….”
이게 왜 여기서 나와? 벨리타 시절 나와 함께한 은발이 여전히 결 좋게 반짝이고 있었다.
“왕국민 차림이 눈에 띈다지만, 황태자와 후작 영애보다야 사정이 나을 거라더군.”
“…누가 그러던가요?”
반투명한 푸른 천 또한 보였다.
당시 하얗던 천과는 색이 다르지만, 저게 어떤 용도인지 내가 잘 알지.
“마이어, 아니.
레사의 수장.”
스텔라, 우리 친우 사이 아니었니.
미리 말해줄 수는 없었던 걸까.
“예, 그러셨구나.
스텔라가…….”
황태자가 이미 다 준비해 왔는데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인가.
주섬주섬 가발과 천을 받아들고 착용하기 시작했다.
‘정들겠다.
은발이랑.’
차근차근 준비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안의 고개가 기울었다.
“많이 해본 솜씨인데.”
얼굴에 천을 뒤집어쓰려던 손이 멈칫한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던지라.”
많았지.
은발의 벨리타는 다사다난했다.
그 수치스러운 밤들이 빠르게 뇌리를 강타한다.
그 덕에 요동치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갈까.”
어느새 검은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리안이 손을 내밀었다.온통 빛으로 감싸인 듯 눈부시던 그에게 붉은색과 검은색을 덧입히자 어쩐지 낯설다.
금안을 제외하고는 그가 황태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한데 그 금안마저 자신은 황태자가 아니라 리안이라고, 절절히 외치는 듯했다.
“전하, 아까 다른 사람이라고 하셨죠.”
그 의미가 황태자라는 왕관을 지우는 데 있다면 기꺼이 네 바람대로 어울려 줄 생각이다.
그 마음, 무게는 다를지언정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그랬지.”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리안과 눈을 맞추고 힘껏 웃어 보였다.
내가 또 나보다 높은 사람과 맞먹는 거, 경험이 있다, 이거야.대공을 수하로 부리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을 떠올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저만 믿으세요.
우선 호칭부터 관둘게요.
뭐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내 저돌적인 면모에 놀랐는지 리안의 눈이 커졌으나 곧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것에 시선을 사로잡힌 채 답을 기다렸다.
“리안.”
…잘못 들었나? 지금 황태자가 자기를 이름으로 부르라고 한 것 같은데.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자 단호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리안이 좋겠어.”
“…예.
그러세요, 그럼.”
그래.
까짓것, 안 부르면 되지!그렇게 나는 조금 들뜬 듯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드리운 황태자와 함께 마차를 벗어났다.*푸른 천에 가려 비비안의 얼굴을 다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으나 이렇게 나란히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점은 만족스러웠다.
‘언제쯤 이름을 불러주려나.’
제 옆에 선 비비안을 내려다보는 리안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런데 저희 어디 가요?”
토끼 같은 눈망울을 깜빡이며 묻는 비비안을 보자 리안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고백 이후 눈도 마주치기 어려워하던 그녀가 분위기에 휩쓸려 호기심을 비치는 것이 사랑스럽다.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같이 가줬으면 해.”
그가 비비안을 이끌고 들어선 곳은 제국 내에서 제일 크다는 보석 상점이었다.의아하다는 낯으로 리안을 돌아보던 비비안이 곧이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음흉하게 웃었다.
“자자, 골라 보세요.
뭐든 좋으니까!”
호쾌한 그녀의 목소리에 리안 또한 숨죽여 웃는다.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직원이 재빠르게 두 사람을 훑었다.
유창한 제국어와 몸에 두른 것들이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한 직원은 리안과 비비안을 돈 많은 왕국민이라 확정한 후 살갑게 달라붙었다.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의 응대를 따라 위로 향하던 리안이 뒤편 어딘가로 눈짓을 전한다.
그 뜻을 받아들인 황태자의 호위가 곧장 가게의 점주를 찾아 나섰다.다시금 비비안에게 고정된 그의 시선이 한없이 달았다.
“전― 아니지!”
전하라고 부르려다 깜짝 놀란 비비안이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에 리안이 다정하게 고개를 틀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 마음에 드시는 건 전부 고르셔도 좋아요.”
리안과 마주 앉은 비비안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종용하던 그 순간, 그녀의 뒤편으로 조심스레 상자를 든 직원이 다가왔다.
“물건, 보여 드리겠습니다.”
탁자 위를 채우는 화려한 보석들에 비비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딱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물건들이었으나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모두 여인의 것인데, 이분이 착용할 법한 것으로 부탁해요.”
말을 받은 직원의 시선이 설핏 리안을 스쳤다.
눈치를 보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보고 계시면 곧바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비비안이 제 앞에 놓인 목걸이, 귀걸이, 팔찌를 살폈다.
그러던 중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곤 골몰한다.그런 비비안을 유심히 보던 리안의 눈동자에 상념이 담겼다.
“올라오기 전에 그대의 색을 일러뒀어.”
“어쩐지! 지금 저 은발인데, 온통 분홍색에 보라색 향연이라 놀랐어요.”
그랬다.
중간중간 조화롭게 다른 색도 섞여 들어갔다지만 어떻게 봐도 비비안 윈데이너의 색으로 점철된 모습이었다.탁자 위를 끝에서 끝까지 눈으로 훑은 리안이 오늘 유일하게 감추지 않은 비비안의 제 색, 보랏빛 눈동자를 빤히 봤다.
“다 받아줬으면 하는데.”
오래된 선물이었다.
제 마음에 비비안이 움튼 이후로 매년 그녀를 닮은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반지를 만들었다.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그것은 전해지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였고.다른 그 어떤 물건과도 다르게 보석만은 제 마음처럼 전혀 퇴색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 모양을 달리할 때가 되었다 여겼다.
‘그저 물건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정작 보석상에 의뢰해 쓰임이 달라진 것을 보자 리안의 마음에 한기가 스몄다.
“저는 괜찮아요.
오늘은 제 것을 사러 온 게 아닌걸요.”
난감한 웃음으로 극구 사양하는 비비안.거절당하는 것이 꼭 제 마음 같아서, 리안이 애틋함을 담아 희미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 된 김에 좀 제멋대로 굴어볼까 하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가볍게 말하는 듯했지만 그는 알았다.
무엇을 핑계 삼으면 그녀의 마음이 약해지는지.
“네게 이유가 없어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어.”
거절하기 어려워진 비비안이 소파 위에 두었던 제 손을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쥐었다.
“그럼 오늘 제가 드리는 선물도 다 받아주세요.”
결연하기까지 한 그 외침에 끝내 허물어진 리안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이내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감탄하는 비비안의 시선을 그가 좇는다.비비안의 나이가 열여섯이 되던 해 준비했던 반지, 그를 장식했던 영롱한 보랏빛 보석이 이제는 그 의미를 잃고 목걸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그렇게 보석마다 담긴 그해의 비비안을 함께 떠올리며 절절히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이 마음의 형태를 바꿀 수 있으려나.’
비비안이 제게 돌려줄 답을 알았다.그렇기에 홀로 수없이 단념했음에도 비비안을 앞에 두면 꼭 찬란한 꿈을 꾸게 된다.
“전―”
호칭을 바꾸지 못해 말문이 막힌 비비안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비비안, 리안이라고 불러줘.”
한참 입을 달싹이던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제 이름을 기다리던 그.
“…리안.”
그리고 기어이 들려온 작은 소리에 리안이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묻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비안은 항상 크고 단단해 보이던 황태자가 지금은 여린 아이 같다 느껴져서 당황했다.이내 그녀가 정적 속을 헤매었다.한 손은 그대로 제 얼굴을 감싼 채 나머지 한 손을 앞으로 뻗은 리안이 비비안의 손을 찾았다.
“…잠깐이면 돼.”
움찔한 비비안의 손이 머뭇댔다.
소파로부터 떨어진 손의 방향은 리안에게 향했고, 천천히 그 거리를 좁혔지만 끝내 맞닿지는 못했다.보지 않고도 그 움직임을 여실히 느끼던 리안이 뻗었던 손을 거둔다.몸을 뒤로 물리고 고개를 젖힌 그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름을 불릴 일이 별로 없어서.”
숨 막힐 정도로 팽팽하던 공기에 더없이 아늑한 리안의 목소리가 흘렀다.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불리는 이름이란 게, 이렇게 기꺼울 줄 몰랐어.”
정말로 기쁜 듯 미소 띤 그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왔다.
“이거 감당이 안 되네.”
단지 이름으로 불렸을 뿐인데 리안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