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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63화 (63/109)
  • 63화

    *

    “아가씨! 그간 잘 지내셨어요?”

    여전히 푸근함을 잃지 않은 로라가 나를 반겨줬다.

    그간 나답지 않게 바빠 전처럼 매일같이 숲에 들락거리지 못한 터라 반가움이 더했다.

    “응응.

    로라, 잘 지냈어? 필립은?”

    “저희야 잘 지내죠.

    그 양반은 잠깐 마구간에 가 있어요.”

    격한 환영을 끝마친 그녀가 내 옆에 선 디에고를 힐끔거렸다.숲에 들어서고 우리를 마주한 로라의 얼굴에 기쁨이 서린 것도 잠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디에고에게 그녀는 최대한 예의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그 후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로라의 신경이 온통 디에고에게 쏠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각하와 승마를 좀 하고 싶은데.”

    내 입에서 튀어나온 호칭에 로라의 동공이 한없이 흔들린다.미안해, 로라.

    많이 놀랐지?후작가의 선량한 숲지기로서 마냥 평화롭게 살던 이들에게 제국의 대공은 먼 나라 이야기였을 텐데.살면서 대공을 만나게 해버린 게 미안했다.

    숨 쉬는 법마저 잊을 것 같아 로라의 도톰한 팔뚝을 톡톡, 두드려 본다.

    “가서 나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겠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로라가 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두막으로 향했다.

    “저 승마복 갈아입고 올게요.”

    디에고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그의 눈매가 부드러이 휜다.

    “기다릴게.”

    근처 숲을 둘러보겠다는 그를 두고 오두막에 들어서자 미친 듯이 반짝이는 눈을 한 로라가 덮쳐들었다.

    “왜, 왜 이래.”

    내 팔을 부여잡고 바짝 다가온 로라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가씨.”

    “뭐, 뭐가, 어떻게 돼.”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로라가 날 빤히 봤다.

    숲에 둘만 살아서 그런가.

    그렇게 사람을 붙잡고 세상 모든 이야기를 들쑤신다며 마리가 투덜대더니.그 시선을 모른 체하며 승마복으로 갈아입자 손은 누구보다 빠르게 나를 도우면서 능글맞게 웃는다.

    “알겠어요~ 아무튼 우리 아가씨 얼굴이 훤한 게 저는 좋네요.”

    어릴 적 외롭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숲에 와서 울었다.

    그때도 우는 모습은 남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으니까.그때마다 로라는 나를 못 본 척하며 집안일과 할 일을 했다.

    꼭 제 시야에 나를 담아두고서.한바탕 울고 나면 파이를 구워주기도 하고 막 끓인 수프를 내어주기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도왔다.

    “…좋아하는 사람이야.”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작게 말하자 로라가 두 손을 맞잡은 채 온 얼굴로 감동을 표했다.

    “세상에!”

    그 모습을 보자 작은 후회가 밀려와 재빨리 문가로 향했다.

    “나오지 마! 승마하고 올게!”

    쾅―

    “후우.”

    점점 늘었다.

    이 관계를 아는 자들이.

    이거 양심 찔려서 비밀 연애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제.나무 그늘 아래 놓인 의자, 거기 앉아 있던 디에고의 입매가 유려하게 올라갔다.

    “자, 가시죠!”

    좀 자신이 넘쳤다.

    내가 여기서 한두 번 말 달린 것이 아니란다.

    디에고를 이끌고 숲의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는 일은 즐거웠다.

    “각하, 호수가 좋으세요? 아니면 꽃밭? 이렇게, 이렇게 엄청 큰 나무가 동굴처럼 이어진 곳도 있어요!”

    양손으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설명하는데 대답은 안 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너.

    “…대답 안 하실 거면 제 마음대로 가겠습니다.”

    누군가와 같이 승마할 생각에 너무 신났구나, 나.

    부끄러워진다.마리에게 같이 승마를 배우자 여러 번 졸랐지만 무섭다며 번번이 거절하는 바람에 늘 혼자 달렸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가지.”

    이젠 아주 당연한 듯 손을 잡은 그가 걸음을 옮긴다.마구간 앞, 말을 쓰다듬고 있던 필립이 눈에 들어왔다.

    “필립!”

    내 목소리에 환하게 웃으며 돌아본 그의 얼굴이 어정쩡하게 굳어갔다.

    나와 디에고를 번갈아 보더니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예를 차려 인사했다.

    “아가씨.”

    “내가 너무 오랜만이지.

    잘 지냈나 몰라.”

    온화하게 미소 지은 필립이 반가움을 표했다.

    “승마하시려고요? 안 그래도 녀석들이 아가씨를 무척 기다렸어요.”

    필립의 뒤로 푸르릉거리는 말들에게 다가갔다.

    나를 따라 말에게 다가선 디에고가 흑마의 얼굴에 손을 대고 눈을 맞췄다.

    “관리가 잘 되어 있군.”

    “그렇죠? 필립이 공들여서 돌봐주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쓰다듬고 있는 흑마, 네가 탈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틀렸다.

    “그리고 참고로 각하가 어루만져주는 아이가 제가 탈 말.”

    이내 손가락을 들어 내 앞에서 새침하게 고개를 틀고 있는 백마를 가리켰다.

    “이 친구가 각하가 오늘 탈 말.”

    한쪽 눈썹을 꿈틀댄 디에고가 두 말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걔가 좀 까탈스러운데 괜찮겠지.

    그냥 보고 싶었다.

    항상 흑마만 타길래.별말 없이 백마를 끌어낸 그가 투레질하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며 시간을 가진다.백마와 달리 순한 흑마는 금방 나를 반기며 받아들여 주었다.

    애교 많은 흑마의 얼굴을 두어 번 쓸어주고 그 위에 올라탔다.디에고에게 다가가니 높아진 나로 인해 그가 고개를 꺾어 올려다봤다.더불어 젖혀진 머리로 인해 목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자꾸만 목을 훑어 내려가는 내 눈을 단속하느라 힘들다.

    “상상 이상으로 잘 어울리는군.”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디에고는 백마와도 잘 어울렸다.

    그 까다롭던 백마가 제 등을 디에고에게 쉬이 내어주는 것을 보니 짐승도 인간의 외모를 따지고 막 그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따라오실 수 있죠?”

    고갯짓을 신호로 냅다 달렸다.

    땅을 차고 뛰어오르는 감각이 호쾌했다.그렇게 한참 달려 호수 앞에서야 멈춰 섰다.정신없이 달렸는데, 처음 와보는 숲이면서 잘도 따라왔네.여전히 단정한 모습으로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디에고가 말에서 내리더니 단숨에 내게 다가왔다.

    이내 그가 내 허리를 붙들고 조심스레 말에서 내려준다.

    “혼자 할 수 있는데.”

    “알아.

    그냥 내 욕심.”

    허리에 닿은 손길이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여기가 비비안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가.”

    나는 호수를 바라보는 디에고의 눈동자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살포시 매만졌다.

    “가장 좋아졌어요, 얼마 전부터.”

    내 생각이 맞았다.

    “보고 있으면 디에고 눈동자가 생각나서.”

    호수에 빠진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 내가 가득 찼다.*비비안과 디에고가 자리를 뜨자 더 이상 이 놀이에 흥미가 없어진 에녹과 클라라는 곧장 황궁으로 돌아갔다.두 사람이 머무는 궁의 응접실, 소파에 길게 누운 클라라가 술잔을 흔들었다.

    “내 취향인데.”

    그녀는 영특했고 욕심이 많았다.

    가지고 태어난 것에 온전히 만족하지도, 그렇다고 쉽게 여기지도 않았기에 제 자리를 지켜왔다.그래서 여태 제 짝을 정하지 않고 고심한 것인데.그날 정원으로 들어서던 대공을 보았을 때, 그의 정체를 가늠하기 전에 저 정도 외모라면 타협할 수도 있지 않겠나 싶었다.황궁을 드나들 정도의 위치와 풍기는 분위기에서 꽤 괜찮은 귀족 출신은 되겠거니 싶었으니까.눈을 찌푸린 클라라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낸다.

    “오히려 대공이라 문제네.”

    차라리 적당한 귀족 자제였다면 제힘으로 어떻게 휘둘러보았겠지만.제국의 대공을 상대로는 어림도 없었다.그런 클라라를 보던 에녹의 입꼬리 한쪽이 치솟는다.제 위로는 쓸 만한 이가 없었지만, 누이는 좀 사정이 나았다.

    적당히 욕심부리고 그를 얻어낼 만큼 충분히 영리했으니.이번 제국 방문에 저 아이를 데려온 것은 순전히 작은 심술.

    이리저리 따져봐도 모자란 점 하나 없는 황태자를 보면 필시 클라라가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다.그 융통성 없는 꼬맹이가 좋아하는 이가 있는데, 그런 접근을 달가워할 리 없으니 좀 괴롭겠거니 하고.

    “그런데 디에고라니.”

    클라라가 관심을 보인 이가 디에고인 것도 흥미로웠지만 그건 저녁으로 나온 스테이크가 유독 먹음직스러울 때 느끼는 감정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그보다 왕국을 떠나올 때부터 궁금했던 여인.

    “비비안 윈데이너.”

    그녀를 둘러싼 상황도 흥미롭고 직접 만나본 비비안 자체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간 무수하게 대면해 오던 여인들과 다르게 그녀는 맑았다.

    ‘내게 원하는 것도, 관심도 없었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고 있는 제 오라비를 멀거니 보던 클라라가 혀를 찼다.

    “예쁘던데, 비비안.”

    자신과 다르게 자그맣고 몽글몽글한 생김새가 사랑스럽긴 했다.

    끊임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여기저기 눈치 보는 것도 소동물 같아서 귀엽고.

    “대공이랑 만나는 것 같았지.”

    담담히 내뱉는 그녀의 말에 에녹의 고개가 기울었다.

    “이걸 리안도 알고 있으려나.”

    “리안? 황태자?”

    그게 중요한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던 클라라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분명 대공과 영애는 서로 마음을 확인한 것처럼 보였는데.에녹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클라라는 곧 제 오라비의 그림을 엇비슷하게 그려냈다.

    “인기 많구나.”

    소파에 누워 제국 권력의 행방을 점쳐보던 클라라가 씨익 웃었다.

    이번 제국 방문에서 제가 취해야 할 것은 실연당한 황태자의 마음일까.혹은.

    “사랑받는 공주님인가.”

    몸을 일으켜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운 그녀의 시선이 에녹을 향한다.

    ‘너는 어떨까.’

    대공의 겉가죽은 정말 훌륭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적은 시간이었지만 함께해본 결과,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자신을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이는 흔치 않으니까.자신처럼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특히나.한데 비비안 윈데이너는 달랐다.

    분명 시간을 보낼수록 저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종족.아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제 오라비를 보는 클라라의 눈이 이채를 띤다.

    “에녹, 조심해.”

    “무엇을?”

    태연한 저 낯이 부디 왕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건재하기를 바라며 클라라가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지 않아야 할 텐데.”

    이어진 클라라의 나긋한 말에 에녹이 코웃음을 쳤다.그제야 제 누이의 의중을 알아챈 그가 화사하게 눈매를 휘었다.

    클라라가 제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그러기엔 지금 내 생이 너무 척박하지 않나.”

    클라라가 염두에 두었을 상대인 비비안 윈데이너를 떠올려보았다.왕세자로서의 제 삶은 사람을 들일 수 없는 황무지였다.

    그것도 모래바람이 끝없이 불어대는.

    그곳에 불러들이기엔 그녀는 지나치게 연약하다 여긴 에녹이 미간을 찌푸린다.

    ‘적당히 즐기고, 최선을 다해 얻어가면 그만인 것을.’

    의도치 않게 제 처지를 다시 한번 실감한 그가 비어 있는 제 잔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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