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턱 하니 올려진 이 손 뭐야.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마에 손을 얹은 디에고.그 뒤로 가느스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왕녀가 보였다.나라면 지금 이 상황에 우리 둘이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걸 믿을까.
‘아니, 안 믿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회피하고 싶었다.
이 답 없는 상황을.
“열이 있나.”
디에고의 낮고도 듣기 좋은 목소리에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여전히 그와 눈이 마주친다.차라리 진짜 몸이 안 좋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
후에 자리를 피하고 싶어지면 그 핑계를 댈 수도 있고.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썩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곧바로 태세를 전환한 내가 눈꼬리를 내리며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몸이 조금 무겁다 싶기는 했으나, 저는 괜찮아요.”
아련하게 웃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이 여린 미소를 지난날 거울을 보며 얼마나 연습했던가.곧이어 조금 인위적으로 보이는 디에고의 끄덕임이 뒤따랐다.일련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왕녀가 짐짓 안타깝다는 듯 눈매를 내리는 게 보인다.절대 저렇게까지 내가 안타깝지는 않은 것 같은데, 너도 표정 연습 퍽 많이 했구나.
“저런, 영애 몸이 좋지 않은데 무리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한쪽 손을 뺨에 댄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모양이 익숙해서 부끄럽다.
나도 저랬나.
저렇게 가증스러웠단 말인가.
“아쉽지만 축제는 대공님과 둘이 다녀와야 할 것 같네요.”
이건 또 무슨 전개일까.
저번에 쟤 피붙이도 말을 교묘하게 바꿔서 하던데.대체 언제 이 외출이 대공과 너 단둘의 것이 되었느냔 말이다!
“아닙니다, 왕녀님.
모처럼 함께하자 청해주셨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딜.
너와 디에고를 단둘이 보낼쏘냐.
“그래도―”
왕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또 다른 파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늦은 건가.”
얘네는 자기애가 얼마나 강한 걸까.
저를 상징하는 색으로 온몸을 휘감은 파랑이들을 보는데 자꾸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려고 해서 큰일이다.비웃으면 곤란하다.
“오라버니, 영애가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요.
그만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걱정을 빙자한 배려심이 지나치다, 너.
“아, 영애 몸이 약하다 들었는데.”
눈살을 찌푸린 왕세자가 내게 성큼 다가서는데 그보다 디에고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슬쩍 제 등 뒤에 나를 둔 그가 고개를 틀어 나와 시선을 맞춘다.
“함께 가지.
혹여 몸이 더 안 좋아지거든 그때 돌아가는 걸로.”
동의하냐는 듯 눈짓을 보내는 디에고에게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네가 내 마음을 똑바로 읽었구나!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척척 일을 진행시키는 것을 보니 흐뭇했다.
“그런가.
영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이동하도록 하죠.”
꾸밈으로 가득한 표정만 짓던 왕세자의 얼굴에 담백한 걱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 놀라웠다.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따갑다 여겨질 정도로 내리치던 해가 좀 잠잠해졌을 즈음 우리는 번화가로 향했다.
‘이 조합, 괜찮나.’
좌우 어디를 봐도 눈이 부신다.
디에고야 말할 것도 없고, 왕국 남매의 외모 또한 쉬이 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기럭지마저 우월했다.이대로 번화가에 섞여드는 것이 가능한가.
분명 사람들 무리 속에서 툭 불거져 나올 것이 뻔한데.그러나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나뿐인 것 같다.
“변한 것이 그닥 없네.”
마치 그리운 것을 바라보듯 감회에 젖은 왕세자와 호기심이 흘러넘치는 왕녀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거리 곳곳에 색색의 등이 아롱거렸다.
평소 보이지 않던 여러 가판대가 즐비하고 그를 즐기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에 어느새 나 또한 동공을 굴리기 바빴다.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여러 목소리가 한데 섞여 정다운 소음을 자아내는 풍경.그 사이에서 어떤 흥미도 보이지 않는 디에고.
그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혼자만 어른 같구나.
“하고 싶은 것이 뭘까.”
“우리 비비.”
라고 작게 덧붙인 디에고가 내게 속삭였다.
거리의 소음에 묻혀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저택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음식들이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는 것이 보인다.나 어제저녁에 수프 반 그릇 먹고 잤는데, 배고프다.한 번 보이니까 온통 음식만 보이고, 냄새 때문에 허기는 더 지고.
“갈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일행에게 처음으로 목적지가 생겼다.
디에고가 길을 여는 대로 우리는 줄지어 따랐다.척척척 막힘없이 가판대로 향하더니 망설임 없이 음식을 구매하는 모습이 멋졌다.그러곤 손에 하나씩 쥐여주기까지.내 손에 들린 꼬치,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스름하게 구운 것과 익힌 토마토가 앙증맞게 끼워져 있다.단번에 입 안으로 넣으려는데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저지했다.
“뜨거워.”
손목을 붙든 디에고의 손이 아쉬운 듯 느리게 떨어졌다.그렇게 시작한 번화가 탐방은 왕국 파랑이들의 존재를 잊을 만큼 즐거웠다.
왕세자는 내내 무엇이 그리 반갑고 그리운지 누가 보면 제국민인 줄 알겠더라.왕녀 또한 제 나라에서 편하게 돌아다닐 만한 위치는 아니었기에 지금 누리는 자유가 꽤 달콤해 보였고.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나 또한 번화가 축제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대공껜 약혼녀가 없다 들었는데요.”
왕녀의 관심이 다시 디에고에게 쏠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렇지.
디에고는 한 번도 약혼녀가 있었던 적이 없어.”
답은 왕세자에게서 나왔다.
약혼녀는 없어도 애인은 있는데…….
“마침 저도 아직이라서요.”
눈매를 휘는 왕녀의 뒤로 알록달록한 빛이 더해지자 가뜩이나 아름다운 외모에 아련함까지 묻어난다.대공과 슈베른 왕국의 왕녀는 퍽 어울리는 조합이기는 했다.그래도 안 돼.나는 디에고를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니 그가 나를 떠나지 않는 한 어떤 이유로도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상대가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인, 거기에 돈 많은 왕국의 유일한 왕녀라 한들 말이다.나도 제국에서 괜찮은 외모고, 또… 돈은 진짜 장담하건대 왕녀보다 많을 것이다.속으로는 큰소리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자 디에고가 고요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느릿한 손짓으로 제 입술을 톡톡, 두 번 두드린 그가 고개를 젓는다.그 다정함에 용기가 솟아 디에고의 옷 끝자락을 붙잡고 속삭였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나를 들어 안았다.
“대공?”
놀란 왕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영애, 괜찮은가?”
왕세자의 차분한 물음을 들으면서도 나는 디에고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영애가 서 있기 힘든 것 같으니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그의 가슴팍에 푹 박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공기로 느낄 수 있었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왕국 파랑이들의 시선이 날 샅샅이 훑고 있음을.그러나 그 시선마저 몸을 틀어 가려버린 디에고가 빠르게 자리를 이탈했다.주변 소음이 잦아들자 슬며시 고개를 들어본다.
내 움직임을 알아챈 그가 고개를 숙이곤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부딪혀 왔다.
“…내려주세요.”
“이대로 마차까지 가지.”
이제야 민망함이 잔뜩 올라왔다.
분명 감정이 격해져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디에고와 나는 닿아 있지 않았다.다 봤니? 그걸 다 본 거야?오랜만에 극강의 수치심이 치밀어 오른다.나는 왜 매번 잊는 걸까.
얘가 내 속을 항상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윈데이너가의 마차에 나를 내려놓은 디에고가 뒤따라 올라탄다.차마 그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내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여기 앉자.
도무지 지금 네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내가.마차가 작지 않음에도 디에고의 몸이 너무 커다란 나머지 옆에 앉자 자연스레 몸이 맞닿았다.
“…저 안 아파요.”
“알아.”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옆을 돌아보자 눈을 감은 채 굳어 있는 게 보였다.왜 이래.
화났어? 나 뭐 잘못한 거니.
거짓말한 거는 잘못이 맞기는 한데…….질투에 눈이 멀어서 마음이 진짜 아프기는 했다? 막 따끔따끔 가슴이 조여오고 그랬거든.한참을 바라봐도 말이 없는 모습에 괜히 눈치가 보였다.
“약혼녀 얘기가 나와서 각하가 곤란할까 봐.”
그의 핑계를 대보자 옆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비안이 곤란했던 건 아니고?”
그래, 사실은 내가 곤란했다.
왕녀가 디에고에게 보이는 관심이.
“…그것도 맞고.”
얼버무리듯 말을 흐리며 입을 삐죽이는데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비튼 디에고의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메움과 동시에 그에게 삼켜진다.더 가까워지려는 그의 몸짓이 퍽 다급하게 느껴져 갈증이 전해졌다.잘근잘근 내 입술을 물었다 놓던 디에고가 숨을 내쉴 수 있을 만한 작은 공간을 내어주곤 웃는다.
“네가 원한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
“둘이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내렸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깊게 가라앉아 짙어진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미세하게 끄덕이기만 해도 곧바로 허허벌판으로 데려갈 것만 같아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데.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말해.”
두 번만 질투했다가는 정말 사람 그림자도 못 보게 될 것 같아서 티끌만 한 소유욕도 허공에 흩어졌다.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고르고 있자 디에고가 손을 잡아온다.
“여기서 후작가의 숲이 가까운 걸로 아는데.”
우리 숲? 마차 창으로 내다보았지만 여기가 어딘지 나는 잘 알지도 못하겠는데.주인도 모르겠는 위치를 네가 어떻게 아니?
“그런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아직 하루가 다 가지 않았으니 좀 더 같이 있을까.”
산뜻하게 웃은 그가 우리 집 마부에게 일렀다.
후작가의 숲으로 가자고.
“숲에 가서 뭐 하시려고요?”
잔뜩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자 디에고가 짓궂게 웃었다.
“비비안 말 타는 솜씨 좀 볼까 해서.”
말 타는 솜씨……?나 승마 좋아해서 후작가 숲에서 틈나는 대로 내달리고는 했지만.
누군가랑 같이 달려보거나 내가 말 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갑자기 너무 긴장되는데…….
‘좀 신나는 것 같기도 하고.’
긴장과 흥분이 뒤섞여 숨이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콧김까지 내뿜을까 싶어 눈감고 마음을 다스려본다.
“깜짝 놀라실 거예요.”
끝내 들뜬 목소리가 튀어나가자 그가 허리까지 접은 채 웃어댔다.
“아무렴.”
웃음기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목소리를 배경으로 마차가 숲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