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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61화 (61/109)

61화

【 소유욕 】

안 오리라 믿고 싶었다.

저녁도 잘 들어가지 않아 수프만 간신히 뜬 채 소파에 몸을 뉘었다.내일이면 퍼런 왕국 남매와 검은 짐승 하나를 데리고 번화가를 나다녀야 했다.

“자고 싶지 않구나, 마리.”

“안 주무셔도 내일은 와요, 아가씨.”

고심하며 머리 장식을 고르던 마리가 차갑게 응했다.

못마땅함에 몸을 뒤집어 소파를 팡팡, 두드렸다.

“축제라면 아가씨도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요.”

번화가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스며드는 일은 매력적이었다.

원래라면 설레서 밤잠 못 이뤄야 맞지.같이 가는 일행이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왕국민들은 다 그런가.”

어려웠다.

사실 제국 사교계에도 그런 성향은 많다.

아는데, 알고 있는데도.

“왕세자 저하가 무서운 분이세요?”

무섭다기보다 휩쓸리기 딱 좋은 화술과 태도가 꺼려질 뿐이다.

왕세자는 제 뜻대로 일을 몰아가는 데 능력이 뛰어난 듯했다.

“그보다.”

왕녀가 훨씬 신경 쓰인다.

디에고가 티타임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그가 나타나고 왕녀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보자 속이 뒤틀렸다.낯설고 거북한 감정 사이로 불안이 스며드는 것을 그날 나는 여실히 느꼈다.

“나한테 그런 감정은 없는 줄 알았어.”

“어떤 감정이요?”

때마침 결정을 내렸는지 푸른빛의 보석이 꽃잎 다섯 장을 모아둔 것처럼 세공된 머리 장식을 들어 보이는 마리.디에고가 같이 간다고 푸른색의 장식만 죄다 긁어왔구나.멀뚱히 푸른 보석의 나열을 바라보자 디에고와 왕녀의 벽안이 떠오른다.

‘분명 같은 푸른 계열이어도 완전 다른데.’

그마저 부럽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나 질투하나 봐.”

담담히 내뱉은 심경에 마리의 두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자 허탈했다.그래.

나도 너무 놀랍다, 진짜.

“질투요? 아가씨가요? 누구를?”

“왕녀가 각하 보면서 눈을 이렇게, 이렇게 반짝반짝 빛내더라.”

나는 한껏 예쁜 척을 하며 눈에 힘을 주고 깜빡여 보였다.

“…그 각하께서 그럼 왕녀님께 웃어주셨다던가, 두 분이 대화를 정겹게 하셨다던가 그러셨나요?”

아닌데.

디에고는 처음 인사를 나눌 때 빼고는 왕녀와 그 무엇도 섞지 않았다.

시선도, 말도.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자 마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우리 아가씨, 소유욕 있으시네~”

음흉하게 웃는 마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소유욕……?”

나에게 그런 것이?!

- …나 말고 그대를 욕심내는 사람이 더 없었으면 좋겠는데.디에고가 그렇게 속삭일 때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았다.

- 내게 소유욕이 있더군.

아무도 비비안을 볼 수 없게끔 하면 어떨까… 하고 가끔 충동이 일 정도로.

“아…….”

나는 입을 벌린 채 탄식했다.너를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건 오히려 나였다.*같은 시각, 대공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있던 디에고가 입을 떼었다.

“후작은.”

“벨리타 상단을 쫓아보려는 것 같은데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하더군요.”

그럴 만했다.

그 어디에 정보를 의뢰한들 레사의 손아귀 안,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들 브라이트의 손이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었으니까.

“한스 자작이 장부를 무기 삼아 귀족들에게 약물을 팔아보려 시도는 하는데, 장부라면 저희 쪽에도 있고.

무엇보다…….”

보고를 이어가던 콘라드가 눈썹을 들썩였다.한스 자작 따위는 감히 비교도 안 될 황태자와 던컨이 장부를 손에 쥐고 귀족들을 압박하고 있으니 될 턱이 없지.

“그리고 지켜보라던 그자는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슈베른 쪽은.”

각기 일을 나눠서 한다지만 디에고의 눈은 모든 것을 보고자 했다.

이는 비단 그가 나머지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 습성에 가까웠다.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왔던 자들의 습성.황태자와 레사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다.

서로가 잠깐의 동맹 관계에서 용인하고 있는 사항.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과 레사의 수하가 맡아서 진행하던 상단의 조직이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전달받았습니다.”

“겨울을 넘기지 못하겠군.”

벌써 귀족들에게 약물을 들이대는 것을 보아 후작은 머지않아 어리석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좀 더 소파에 몸을 묻는 디에고를 보며 콘라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내일 축제에 가십니까?”

수도에서 벌어지는 거리 축제와 제 상관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비비안이 가.”

분명 거절하라던 그녀의 외침이 너무 큰 글자로 형상화되어 보이는 바람에 모를 수가 없었으나.디에고는 에녹을 알았다.제가 거기서 가지 않겠다 하면 어떻게 해서든 비비안만이라도 데리고 축제에 가려 할 터.

“봐서 적당히 빠질 거니까.”

천장을 향해 있던 디에고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뜨였다.

혼자 있을 때면 근래 그가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눈을 뜨고 있어도 비비안을 생각했지만, 눈을 감으면 그녀의 모습이 좀 더 생생하게 그려져서 생긴 버릇이다.

“슈베른 왕국의 왕녀.”

“아,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미모가 상당하다면서요.”

그랬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왕녀를 보는 비비안의 표정이 찰나 어두워졌음을 알 뿐인 디에고는 이미 그녀가 탐탁지 않았다.

“비비안이 불편해하더군.”

아주 잠깐 비비안 곁에 머무는 이라도 혹여 그녀에게 탈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그였다.윈데이너 영애의 주변인을 먼지 한 톨까지 털어내는 일에 이제 익숙해진 콘라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조사하겠노라 일렀다.듣자 하니 넷이서 티타임을 가진 듯한데, 가만히 그 모습을 그려보던 콘라드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왕녀가 각하께 반했네, 반했어.’

어디에 내놔도 여인들의 호감을 사는 사내였다.

그간 그런 시선과 관심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니 모를 만도 한데.

“두 분이 모두 외모와 가문이 출중하시니 시선을 끌 수밖에요.”

슬쩍 내뱉는 콘라드의 말에 디에고의 미간이 구겨졌다.

“알고 있어.”

저건 전혀 모르는 얼굴이라고 그의 보좌관은 생각했다.

‘뻔하지.

윈데이너 영애가 예쁘다는 말로만 들리는 게 분명해.’

남모르게 한숨을 내쉰 콘라드가 내일 착용할 보랏빛 커프스를 골라두고 디에고의 방을 나섰다.혼자가 된 디에고가 몸을 일으켜 침대 가에 앉았다.

그가 멍하니 벽 한쪽에 자리한 태피스트리를 바라본다.

“…예쁘네, 비비.”

은은한 미소를 띠던 디에고가 이내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비비안을 만날수록 욕심이 커져만 갔다.

눈앞에 있을 때면 몇 번이고 뻗어 나가는 제 손을 붙잡아두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할 정도로.익숙해졌다지만 지금도 제 손이 닿을 때면 그녀는 긴장하고는 했다.세 번을 참아내고 끝내 입술을 내리면 작게 헐떡이는 숨이 사랑스럽다.그렇게 수없이 제 연인의 얼굴을 되새기는 그의 얼굴에 행복이 번졌다.여지없이 비비안을 생각하며 잠이 든 디에고, 그의 얼굴 위에 드리운 그늘이 들이치는 햇빛에 점점 자취를 감췄다.

“…….”

잠이 덜 깬 몽롱한 디에고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비비안이 그려진 태피스트리.나른하게 웃는 그의 상반신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침대 밑으로 흘러내렸다.

“비비안.”

제 하루를 그 이름으로 시작하는 디에고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준비를 끝마치고 집무실로 향했다.오후 내내 밀린 업무를 처리한 그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외출할 채비를 하는 디에고의 옆에서 준비를 돕던 콘라드가 어제 골라둔 보랏빛 커프스를 마저 장식하며 제 주군을 보았다.

‘이러니 왕녀가 반할 만도 하지.’

머리의 반은 올리고 반은 내린 모습이 단정하면서도 위험해 보였다.그 넷이 거리를 거닐 것이라 하였다.

어떻게 해도 가려질 외모는 아니라 생각한 콘라드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다녀오지.”

성큼성큼 대공저를 나선 그가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마차에 앉아 눈을 감은 디에고가 왕세자 에녹을 떠올렸다.

그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에녹에 대해 딱 하나 확신하는 것이 있었다.항상 일을 성가시게 만든다는 것.

‘이번엔 네 뜻대로 되지 않을 텐데.’

손으로 제 이마를 한 번 쓴 그가 이윽고 멈춰 선 마차에서 몸을 내렸다.때마침 들어서는 윈데이너가의 마차를 보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디에고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마차의 문이 열리고 짙은 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은 비비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어깨를 크게 들었다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이 꽤나 싫은 모양이다.

그녀의 머리 위로 칙칙한 색의 구름이 세 개 떠 있다.처량한 눈으로 제 눈앞의 궁을 한 번 보더니 심지어 구름 형상에서 빗방울이 쏟아진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감상하던 디에고가 비비안에게 향했다.

“비비안.”

제 주인에게 닿지 못한 채 대공저에 울려 퍼지던 그 이름이 비로소 주인을 찾아갔다.

“각하?”

형상인 줄 알면서도 그녀 위로 내리는 빗물이 신경 쓰인 디에고가 손을 들어 비비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물기 하나 없이 보송한 감촉에 만족한 그가 오밀조밀한 비비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여기 황궁이그든요?”

커다란 눈에 잔뜩 힘을 준 비비안이 이를 악물고 뭉개진 발음으로 경고를 날렸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반걸음 떨어지자 흘겨보면서도 아쉬워한다.[머리 쓰다듬는 게 이렇게 설렐 일이야?!]입은 꾹 다물고 있어도 머리 위로 쉴 새 없이 떠드는 것이 어여쁘다 여긴 그가 비비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 분이 친분이 두터우신가 봐요?”

서로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제 눈동자와 비슷한 하늘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왕녀의 등장에 디에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다시 비비안에게 시선을 돌리자 방금까지 흩날리던 꽃잎은 어디 가고 어두운 먹구름이 하나둘 생성되고 있었다.

“왕녀님,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애써 밝은 목소리로 왕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비비안의 모습에 디에고의 눈썹이 꿈틀댔다.

“영애야말로 꽃이 따로 없네요.”

왕녀가 뭐라 떠들든 하등 관심 없는 디에고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서로 인사치레를 건네며 어색한 웃음을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에 선 그는 고심했다.

‘…왕녀가 싫은 건가.’

번개까지 치기 시작하는 혼란한 형상을 더는 두고 보기 힘들었던 디에고가 상체를 숙여 비비안과 시선을 맞췄다.돌발 행동에 놀라 토끼 눈이 된 비비안을 귀엽다고 생각한 그가 말했다.

“그대, 몸이 안 좋은 거 아닌가?”

뜬금없는 질문에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하자 디에고의 손이 거침없이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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