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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60화 (60/109)

60화

왕세자가 머무는 궁을 벗어난 후 디에고를 곁눈질하자 바로 눈이 마주친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순간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다행히 궁에 있었어.”

그래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내게 사람을 붙인 것이 분명했다.

“…미안, 불안해서.

네가 위험에 빠지지는 않을까 하고.”

“제가 움직이면 그 뒤에 얼마나 많은 그림자가 있는 걸까요.”

내가 알기로 어릴 적 황태자가 붙여준 호위도 있는 것 같던데.

거기에 대공이 붙인 자까지.우루루 내 뒤에 따라붙는 걸까.

서로 소속이 다르신데 어떻게, 다투지는 않으시나요?신세가 참 그랬다.

“곤란하거나 위험한 일이 아니면 내게 보고가 올라오지는 않아.”

내가 빤히 바라보자 난감한 듯 웃은 디에고가 서로의 이마를 맞대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느릿하게 속삭인다.

“하지 말라면 안 할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내게 와주던 너.꼭 그런 순간에 아무렇지 않게 모습을 드러내던 지난날이 떠올랐다.내가 근래 자꾸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으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는 갔다.한데 내게는 여전히 그에게 전해줄 수 없는 황태자와의 이야기가 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황태자의 마음에 내가 답을 줄 수 있을 때까지는 디에고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정말 위험할 때나 전해 듣는 거 맞죠?”

디에고가 맞대고 있던 이마를 부빈다.

작게 한숨을 쉬고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제야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그런데 어쩌다 에녹한테 붙잡힌 거지?”

에녹, 왕세자의 이름.

아까부터 서로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것이 남다른 친분이 있기는 한가 보다.거의 물어뜯는 것이나 다름없는 대화였지만 진짜 악의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황후 폐하 만나뵙고 돌아가는 길에 마주쳤어요.

그런데 갑자기 차를 함께하자 하더니, 정신 차려보니 거기 앉아 있게 되었네요.”

미간을 찌푸린 채 허탈하게 말하자 디에고의 검지가 내 미간을 조심스레 문질렀다.

“비비안은 사람을 끄는 재주가 있는 건가.”

어느새 내 한쪽 손을 그러잡은 그의 손에서 온기가 전해져왔다.

“…사고를 몰고 온다는 말을 예쁘게 해주시는 거죠?”

내가 작게 읊조리자 그걸 또 어떻게 다 들었는지 디에고가 소리 내 웃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걱정은 되는군.”

장난기를 담고 웃던 모습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내가 진짜 사고를 너무 쳐서 걱정이 된다는 거니? 조금 억울한데.걸음을 멈춘 디에고가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웃음기 없는 눈동자에 찰나 짙은 열기가 비친다.

“…나 말고 그대를 욕심내는 사람이 더 없었으면 좋겠는데.”

디에고의 커다란 손이 내 한쪽 뺨을 감쌌다.

느리게 내 볼을 쓸던 그의 시선이 이내 내 눈을 향한다.마주한 시선에 가슴이 요동쳤다.

“내게 소유욕이 있더군.

아무도 비비안을 볼 수 없게끔 하면 어떨까… 하고 가끔 충동이 일 정도로.”

지독히 집착 어린 말을 하는 것과 다르게 그의 얼굴엔 해사한 미소가 자리했다.*내가 황궁에 당분간 안 오겠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구나.

세상에 정말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슈베른 왕국의 이번 제국 방문에는 귀한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왕국의 유일한 왕녀, 클라라 벨라드.제국엔 황녀가 없고, 공녀도 없고.그러다 보니 황궁에서 나를 왕녀의 말동무 상대로 뽑아버린 것이다.

‘내가 백작 영애만 되었어도 여기 안 앉아 있는 건데!’

황후가 친히 부탁을 했으나 말이 부탁이지, 이번에도 내게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왕국을 떠나 이리 멀리 나온 것은 처음이라.”

왕녀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자 머리칼이 스르륵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푸른 기가 도는 은발이 절로 왕세자의 파란 머리를 떠오르게 했다.제 오라비보다 밝은 하늘빛 눈동자와 눈부신 은발의 조화가 요정이 따로 없구나.그녀가 하얀 손가락으로 푸른 찻잔을 쓸며 머뭇대듯 시선을 맞춰왔다.

“이렇게 아리따운 영애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이 기쁘군요.”

느리게 올라가는 입매가 정교했다.

분명 황홀하리만치 완벽한 아름다움인데, 너무 잘 짜여 있달까.

“왕녀님이야말로 너무 아름다우세요.

이런 귀한 기회를 제가 받을 수 있어 영광이랍니다.”

나 또한 눈매와 입꼬리를 한껏 휘어 보였다.서로를 마주한 미소와 함께 잠시간 정적이 흐른다.

‘이거, 얘도 나처럼 내숭 떠는 거 같은데.’

확실했다.

내가 매번 하는 거라서 보였다.

웃음기 없는 눈동자, 도착한 이후로 수 번 보이던 미소 모두가 거의 동일한 형태를 띠는 것.그리고 무엇보다 느낌이 그랬다.둘 다 형식적인 대화를 끝내고 나자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먼저 자리를 파하자고 할 수는 없지.공식적으로 약속을 잡고 가진 티타임이었다.

제국의 신하로서 나온 자리인지라 충분한 예의와 호의를 내비치는 것이 내 역할이니 기다리는 수밖에.

‘너도 그만 자리 뜨고 싶구나.’

차만 홀짝대며 가끔 눈이 마주치면 웃어 보이는 왕녀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인 듯싶다.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헤어져야 아~ 둘이 좋았구나! 하고 말들을 않지.

“오, 누이.”

두 번째 듣는 음성임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잘못 들었기를 바라며 마주한 왕녀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뭐? 미간을 찌푸려?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보았을 때는 이미 환하게 웃는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오라버니.”

왕녀의 부름에 나는 체념하고 뒤를 돌아보았다.분명 마음의 준비를 하고 돌아본 것인데, 어떻게 네가 또 여기?왕족의 상징인 걸까.

예의 그 꾸며진 미소로 정원에 들어서는 왕세자의 옆에 세상 불만을 가득 안은 검은 짐승이 딸려오고 있다.성큼성큼 다가오는 디에고의 시선이 작은 이탈 한 번 없이 나만을 향했다.

“어쩐지 꼭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싶더라니, 이리 즐거운 일이 생길 줄이야.”

혼자만 신나 보이는 왕세자를 향해 인사를 올리자 그가 한껏 눈을 빛낸다.

저 눈에 담긴 반가움이 드물게 진심인 것 같아서 껄끄럽다.문득 돌아간 시선이 왕녀를 향했다.

내내 무료함을 담고 있던 그녀의 눈이 이채를 띠는 것이 보인다.그 시선 끝에 디에고가 있었다.원래도 저런 색이었나 싶게 반짝이는 왕녀의 하늘빛 눈동자에 검은빛이 아른댄다.

디에고의 색이 거기 담겨 있었다.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디에고의 얼굴을 찾자 의문이 담긴 그의 눈동자가 곧장 내게 향했다.

따스한 걱정이 스민 눈, 입 모양으로

‘왜?’

라며 묻는 모습에 정신이 돌아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티타임에 동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제 여동생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왕세자가 내게 물었다.

이 상황에 결과는 뻔했지만 그래도 이 자리의 주인, 왕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대공, 여기는 내 누이 클라라.

처음 보는 것이겠군.”

왕세자의 소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 오갔다.

“슈베른 왕국과 맞닿아 있는 대공령의 주인을, 이제야 만나뵙네요.”

청초하고 정제되어 있던 미소와 말투 어디 갔어, 너.나는 지금 다른 사람이 와 있는 줄 알았다.

나랑 있을 때는 그렇게 요염하게 안 웃었잖아.

심지어 목소리마저 달랐다.한층 테이블 앞으로 숙여진 왕녀의 상체가 얼마나 이 대화에 적극적인지 대변하고 있었다.그와 반대로 맞은편 대공은 의자에 등을 맞댄 채 팔짱을 끼고 왕녀를 봤다.

이내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디에고의 첨예한 시선이 왕세자를 노려본다.

“그렇지.

나도 놀랐지 뭔가.

옛 친우를 보고자 친히 와준 건가?”

샐쭉 웃은 왕세자가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수도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그렇긴 하다.

매년 신년 연회 때나 모습을 드러낼까 말까 하던 이가 지금은 누가 보면 수도 귀족인 줄 알 정도로 장기간 머무르는 상황.

‘왜 안 가지, 대공령?’

디에고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다.

“…수도에 탐나는 것이 있어서.”

낮게 읊조린 그가 날 보며 짧게 웃어 보였다.내가 연애를 안 해봐서 이런 일에 감이 없다지만, 저렇게 직접적으로 구는데도 모를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진정시키며 찻잔을 들어 달아오른 얼굴을 어떻게든 가려봤다.

“제국의 대공이 탐을 내는데, 손에 넣지 못할 것이 있는가.”

깐족대듯 말하는 왕세자를 향한 대공의 시선이 싸늘했다.그렇게 서로 으르렁대면서 오늘도 둘이 만나고 있었구나.사실은 너희 사이좋은 거 아니니? 저번 해리스 공자를 만났을 때도 그렇고.

어쩌면 디에고의 친우 관계는 다 이런 색을 띠고 있는 거 아닐까.서로를 못마땅해하면서도 같이 붙어 다니는…….그러고 보니 조금 다르긴 하다만 해리스 공자와 왕세자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저렇게 방실방실 웃는 거나, 디에고가 매서운 눈길로 바라본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거나 그런 점들.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의 탄신일을 맞이해 제국 수도에서는 축제가 열린다지?”

불길했다.

“축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왕녀가 흥미를 보인다.

“이것도 인연인데 딱 좋지 않은가.

넷이 축제에 참여하면 좋을 것 같은데.”

왕국 남매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는 것과 달리 제국의 두 귀족 얼굴은 파삭 말라버렸다.이건 아니야.

이런 참사는 벌어져서는 안 돼.내게는 힘이 없지만, 제국의 대공은 할 수 있지! 거절해, 디에고!

“생각해 보게.

영애와 잘 꾸며진 번화가를 걸으면 즐겁지 않겠나.”

넷이라며.

교묘하게 마치 단둘이 가는 것처럼 꾸며 속삭이는 왕세자를 빤히 쳐다보던 디에고가 미간을 좁혔다.평소대로 단번에 거절의 말을 내뱉을 줄 알았던 그가 잠잠하다.

“오라버니, 웬일로 훌륭한 생각을 하셨네요.”

두 손을 모으고 나를 바라보는 왕녀, 암묵적으로 나 빼고 다 동의한 듯한 이 분위기.

“…예.

그것참, 신나겠네요.”

벌써 너무 힘겨웠다.

어떻게 전날 대차게 아파보는 것은 어떨까.힘 빠진 동공으로 망연히 테이블을 보다 고개를 들자 왕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옆을 응시하고 있었다.급격히 기분이 가라앉는다.

방금까지 쉬이 지어 보이던 미소가 좀처럼 나오지를 않았다.생소한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데 무릎 위에 놓아둔 손 위로 온기가 덮쳤다.갑작스런 행동에 순간 몸이 경직되자 커다란 손이 톡톡, 내 손등을 다독인다.

‘…들키면 어쩌려고.’

고개를 돌리자 디에고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자연스레 몸을 틀어 여전히 떠들고 있는 왕세자를 시린 눈으로 본다.자리가 파할 때까지, 그 손은 내게서 거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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