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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59화 (59/109)
  • 59화

    *황제궁 응접실, 황제 내외와 황태자가 마주 앉았다.

    “슈베른 꼬맹이가 올 때가 되었지.”

    황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묻자 황태자가 달갑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예.

    새벽녘에 수도 경계 숲을 지났다 하였으니 곧이겠군요.”

    황태자 탄신 축하 연회에 굳이 참석하겠다며 먼 길을 오는 슈베른 왕국의 왕세자.

    일개 왕자 신분이었던 에녹은 어린 시절 친선 교류의 명목으로 몇 달 제국에 머물더니 곧잘 제국에 찾아왔었다.그러나 제 위로 두 형을 제치고 왕세자가 된 이후에는 그 자리를 지키느라 전처럼 제국을 왕래할 시간이 나지 않았으니 실로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왕세자가 어릴 때는 참 귀여웠는데 말이죠.”

    어린 에녹이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것을 회상한 황후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랬소?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구려.

    제 형들보다 영특하였지.”

    그렇지 않냐며 황제의 시선이 황태자에게 향하자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슈베른 왕국은 왕가의 피를 이은 자라면 순서에 상관없이 가장 뛰어난 자를 후계자로 삼으니, 가능했지요.”

    “여태 그리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능글맞은 태도로 이익에 있어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슈베른 왕을 떠올린 황제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지금 왕세자를 보낸 것만 해도 빤히 그 속내가 보이지 않느냐.”

    제국의 귀족을 왕국의 귀족이 노예로 삼은 것은 호락호락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아직 공식화하지 않은 것은 관련자들을 더 많이 잡아들이기 위해서일 뿐.이 일이 공론화되기 전에 해결하고자 왕국이 왕세자를 보냈음을 모를 리 없는 황가였다.

    “리안, 필히 왕국에게도 경고를 해두는 것 잊지 말거라.”

    묵묵히 고개를 숙여 그 뜻을 받은 황태자가 이내 자리를 떴다.왕세자를 맞이하러 갈 때였다.족히 열 대가 넘는 마차 행렬의 맨 앞, 낯익은 얼굴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탁―황태자의 얼굴이 명확히 확인되는 지점에서 말에서 내린 왕세자가 반갑게 다가섰다.

    “무려 황태자 전하께서 마중을 다 나와주시고.

    영광입니다.”

    생글생글 웃는 그를 마주한 황태자의 얼굴이 딱딱했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인 그가 간신히 예의를 갖춰 인사를 주고받는다.

    “…말을 타고 오셨습니까.”

    황태자의 떨떠름한 음성에도 개의치 않은 왕세자가 해맑게 답했다.

    “아, 먼저 제국의 수도를 돌아보고 오는 참이라.”

    행렬이 경계 숲에서 채비를 정돈할 시 먼저 말에 올라탄 왕세자는 제 수하인 아론만을 대동한 채 제국의 수도를 탐방하고 합류했다.

    “아주 멋지더군요.

    예전과 같이 말입니다.”

    어딘가 조금 들떠 보이는 왕세자를 한 번 본 황태자의 시선이 그들의 뒤편을 향했다.

    유독 화려하고 커다란 마차, 그 안에서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은발의 여인.그 시선을 따라간 왕세자가 짓궂게 웃는다.

    “처음 보시지요.

    이번엔 제 누이와 함께 왔습니다.”

    왕세자와 같은 푸른 눈동자를 지닌 미인이 황태자의 앞에 당도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클라라라고 해요.”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클라라의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가 피었다.*황후가 엄마의 친우라 밝힌 그 이후, 나는 종종 황후궁에 들러 그녀와 티타임을 갖고는 했다.그래서 잠시 잊었다.궁은 언제나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을.

    “이리 아름다운 영애와 티타임을 갖게 될 줄이야.”

    왜, 어째서 나는 지금 이 정원에서 타국의 왕세자와 티타임을 갖고 있는 것일까.푸른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외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슈베른 왕국에서 황태자의 탄신 축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국에 방문했다는 것 또한 알았으니까.하나 황궁이 좀 넓은가? 정말 황후궁에서 잠깐 머물다 돌아갈 건데 이 인간을 만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고요.

    “차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다른 차를 들이라 할까요.”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황후궁을 나서는 도중에 마주친 왕세자는 나를 보자마자 덥석 말을 걸었다.그래, 이미 맞닥뜨린 거 인사 정도야 나눌 수 있지.

    못 본 것처럼 서로 지나치기는 그러니까 거기까지는 나도 이해할 수 있는데.인사를 끝으로 서로 갈 길 가는 게 일반적이건만, 그는 다짜고짜 티타임을 갖자며 제가 머물고 있는 궁 정원까지 나를 끌고 온 참이다.도무지 거절할 틈을 주지 않더라.

    ‘…집에 가고 싶다.’

    절로 울상 짓게 되는 얼굴을 정돈하며 찻잔을 쥐었다.빨리 마시고 가자.

    영애의 품위는 잊은 채 벌컥벌컥 차를 들이켜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왕국에서 직접 가져온 차인데, 퍽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씨익 웃은 왕세자가 손짓을 하자 시녀가 다가와 내 잔에 분홍빛 차를 다시 채워준다.

    “아…….”

    나도 모르게 나온 안타까운 탄성에도 그는 짙은 미소를 유지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워낙 바쁘시니 뵐 수조차 없어 내심 무료한 참이었는데.”

    리안이 항시 바쁘기는 하지만 축하 사절로 온 이웃 나라의 왕세자에게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닐 텐데.

    애초에 아무리 바빠도 왕세자 만나는 것은 집무의 일환일 테고.그런데도 쟤 말대로 리안이 시간을 내지 못하는 거라면.힐긋 쳐다보자 마주치는 왕세자의 푸른 눈.디에고와 같은 푸른 계열임에도 그 색이 현저히 달랐다.

    디에고의 눈동자는 바다처럼 그 깊이를 담고 있다면, 왕세자의 눈동자는 좀 더 하늘빛을 띠는 투명함이 있다.그리고 그 눈빛에 꿍꿍이가 비쳤다.더불어 얼굴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꽤 다양한 표정을 보이고 있음에도.능글맞고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모든 행동에 이면이 있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이런 껄끄러움에 리안이 그를 반기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 저라도 잠시 저하의 무료함을 달래 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만 자리를 뜨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표현해 봤다.

    충분히 알아듣고도 남을 정도의 마무리였는데, 우리 여기서 그만 끝내자.

    “그러게 말입니다.

    아론, 왕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좀 가져오지.

    우리 친절한 영애께 보답을 해야겠으니.”

    왕세자의 말에 여태 뒤를 지키고 있던 사내가 자리를 뜬다.

    아니야, 아니라고.

    절로 그를 붙잡고 싶어 팔이 뻗어졌다.

    “저하, 보답이라뇨.

    저야말로 저하와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그렇다면 내일 이 시간에 또 함께 자리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영애.

    서로에게 즐거운 일인 것 같은데.”

    쟤 지금 뭐라는 거야.

    “…영애가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서로 잘 지내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양국의 미래에 있어서.”

    말이 안 나온다.딱히 떠오르는 답변이 없어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익숙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잘못 알고 있군, 에녹.”

    내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디에고.

    그 눈이 뚫어지게 나를 향했다.그가 지금 여기 나타난 것은, 당연히 제국의 대공으로서 공식적으로 타국의 왕세자를 만나러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 그의 눈을 바라보니 알겠다.디에고가 또 나를 구하러 왔다는 것을.

    “디에고?”

    왕세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 것이 보였다.

    그를 무감하게 바라보던 디에고가 내 옆 의자에 털썩 앉는다.

    “대공령에 박혀 있지 않고?”

    왕세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뱉는 말에 악의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 좀 전과 다르게 거칠었다.

    “그대야말로 왕궁에 붙어 있지 않고.

    불안해서 어디 자리를 비울 수나 있었나 모르겠군.”

    태평한 어조로 내뱉는 말, 여기도 말이 심하다.슈베른 왕국의 왕세자는 삼남으로 왕후의 견제를 심하게 받는다 들었다.

    외척을 등에 업기는커녕 방해를 받는 실정이니 안 봐도 뻔했다.자리 지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

    그런 상대에게 대놓고 저런 말을 하다니.디에고, 너도 참.왕세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스민 비웃음이 보였다.

    “고작 이 정도 자리 비운다고 뺏길 거였다면 내가 그리 생고생을 하고 있겠나.”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구나.

    그를 바라보는 디에고의 얼굴에도 조소가 서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짧게 답변한 디에고가 몸을 틀어 나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각하.”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지금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앞에 왕세자도 앉아 있는데, 얘가 또 둘만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네.눈을 질끈 감은 내가 곧바로 왕세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두 분 대화 나누실 수 있게 저는 이만 자리를 피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섬주섬 일어날 채비를 하려는데 왕세자의 감탄이 들렸다.

    불길했다.

    그저 맑기만 하던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지나치게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부담스러운데, 저 눈빛.나와 디에고를 번갈아 바라보던 왕세자가 끝내 소리 내 웃는다.

    “정말인가.

    이거 너무 뜻밖의 일이라 믿을 수가 없군.”

    혼잣말처럼 격앙된 목소리를 내던 왕세자가 그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영애, 정말 그대가 궁금하군요.”

    그 말에 힐긋 옆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디에고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다.

    ‘와, 나 진짜.

    이젠 제국도 모자라 왕국까지 알게 되는 거야? 이게 어딜 봐서 비밀 연애야.’

    자괴감이 밀려온다.

    잔뜩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 디에고를 보며 마음으로 전해본다.제발 가만히 있어달라고.

    “저하가 그리 궁금해하실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별다를 게 없어서요.”

    나라도 차분하자 싶어 답했으나 내 말은 듣지도 않는 것 같은 왕세자가 디에고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디에고, 아무래도 내가 이번에 제국에 오기를 잘한 것 같아.”

    “그거 의외군.

    지금 왕국이 제국을 볼 낯이 없을 터인데.

    그대, 이렇게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에 황제 폐하의 노여움을 어찌 풀어 드릴지 고민하는 게 좋지 않겠나?”

    연신 신나게 웃던 왕세자의 얼굴에 작은 금이 간다.

    그것도 잠깐, 금방 털어낸 그가 승자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런.

    내 걱정까지 해주고.

    자네도 많이 변했군.

    안 그런가, 영애?”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나는 대공의 옛 모습 같은 건 알지도 못하는데.난감함에 그저 멋쩍게 웃어 보이자 디에고가 일어선다.

    “영애, 이만 같이 일어나지.”

    “…예.

    저하의 시간을 더 뺏을 수는 없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대체 몇 번째 시도인지 모를 귀가를 다시 한번 청하자 이제는 더 붙잡을 방도가 없는지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영애, 다음엔 부디 제 선물을 받아주시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됐다.

    이제 한동안 궁에 얼씬도 안 할 테다!디에고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왕세자를 뒤로하고 정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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