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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58화 (58/109)
  • 58화

    *또, 또 입술을 막! 막!소파에 앉아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기억을 되새겨봤다.

    코로 숨 쉬면 콧김이 닿을까 두려운 거리에서 보는 디에고의 얼굴은, 미쳤다.내 안목을 걸고 장담하건대, 평생을 본다 해도 질리지 않을 외모였다.자꾸만 느리게 다가오는 그의 얼굴, 그러다 결국 서로의 입술이 닿는 그림까지 생각이 미치고 만다.그런데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 막 입 맞추고 그래도 되는 거야?

    “아니지.

    비밀이기는 해도 우선 연인 맞잖아.”

    다들 연인끼리 입도 맞추고 그러잖아.

    나는 안 될 거 뭐 있어?!

    “네, 두 분이 연인 맞으시죠.”

    “악?!”

    화들짝 놀란 가슴에 손을 대고 소리의 근원지, 마리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저 아까부터 여기 있었는데.”

    건조한 음성과 텅 빈 마리의 눈동자를 보니 괜히 멋쩍다.

    “아니, 내가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나 보네.”

    하하하, 누가 들어도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고 괜히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좋으세요?”

    다정한 목소리를 따라 눈을 돌리자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운 마리의 얼굴이 보인다.

    ‘그렇게 좋냐라.’

    이제는

    ‘좋다’

    라는 단어만 들어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심심할 틈이 없다.

    매일 디에고를 떠올려야 하니까.그와 하루를 함께 보내고 나면 그 하루는 곧 나의 한 달을 앗아가곤 했다.

    계속 곱씹다 보면 하염없이 시간이 가버려서.그렇게 디에고를 그리느라 흘러가 버린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그가 좋았다.

    “응.

    좋은 거 같아.”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내 얼굴에 미소가 자리했다.

    그리고 그 웃음을 마주한 마리의 얼굴에도 번지듯 따스함이 스민다.

    “저도 아가씨가 즐거워 보여서 좋아요.”

    …후끈했다.

    우리 둘 사이에 훈기가 돌다 못해 아주 기분 좋은 노곤함이 방을 가득 메웠다.

    ‘어후,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나?’

    호호호, 웃음꽃이 만발한 오후를 만끽하다 보니 나의 또 다른 즐거움이 때마침 찾아왔다.

    “아가씨, 마이어 백작 영애께서 도착하셨다고 해요.”

    “오―”

    하늘이 스텔라의 색으로 다 물들었음에 한 번 시선을 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향했다.내가 서 있는 복도 반대편, 하녀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향하는 스텔라가 보였다.

    “영애~”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다가섰으나, 언니 표정은 여전하구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안부를 묻는 그녀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텔라도 잘 지내셨어요?”

    은근슬쩍 이름으로 불러보자 그녀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안 되니? 우리 이제 서로 이름으로 부르면 정말 안 되는 거니?

    “…예, 비비안도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비비안?절로 입이 벌어졌다.

    지금 이 새침한 애가 나 이름으로 불러준 거 맞아?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스텔라가 고개를 돌려 응접실로 모습을 감췄다.

    ‘매일이 행복하다.

    삶이 이렇게까지 만족스러워도 되는 건가? 정말?’

    스텔라의 뒤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서자 미리 준비해 둔 온갖 다과가 그 모양을 뽐내고 있다.

    “저녁 드시고 가지 않으실래요?”

    “아뇨, 이리 잘 차려주신 티타임만 즐겨도 충분할 것 같네요.”

    쉽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주기에 오늘은 좀 더 우리 사이 진전이 있을까 기대했건만.가늘게 뜬 눈으로 좀처럼 넘어오지 않는 스텔라를 유심히 바라보자 우아하게 차를 호록대던 그녀가 눈을 맞춰왔다.

    “던컨 공작가를 찾으신 일은 잘 성사되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내가 이뤄낸 성과에 진한 미소를 띠며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예, 공작께서 친히 공자에게 서둘러 일을 처리하라 명하셨지요.”

    해리스 공자, 그 뒤로 황태자에게 불려갔다 들었다.

    내가 그 성실한 리안이 일 처리를 함에 있어 얼마나 가차 없는지 어렴풋이 아는데.

    ‘본의 아니게 엄청 고생 중이겠어.’

    “해리스 공자가 그리 보여도 보통 인물은 아닌지라, 아마 기대 이상으로 해낼 겁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하긴, 그 던컨인데!비록 나는 공자의 헐렁헐렁한 모습만 보았어도, 그건 그의 극히 일부분이어야 했다.

    “물론 그래 주셔야 할 겁니다.

    던컨을 찾은 이유가 거기 있으니까요.”

    제국의 그 어느 귀족보다도 던컨에게 기대하는 바는 남다르고 컸다.

    그들의 올곧음에는 한 치의 자비도 없으니까.

    ‘귀족의 목을 치는 검으로 더할 나위 없지.’

    “그쪽은 이제 황태자 전하와 던컨에게 맡겨두고, 후작 쪽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스텔라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무척 지루한 작업을 행하고 있다는 듯 나른하게 고개를 돌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소소한 자금줄부터 틀어막고 있어요.

    아마 지금은 전혀 알아챌 수 없을 정도겠지만.

    비오첼라를 잃어서 이미 타격이 클 테니 다른 방도를 찾으려 하겠죠.”

    확실히 비오첼라가 운영하던 도박장이 다 문을 닫았을뿐더러 분위기에 압도당해 상당히 많은 귀족들이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게다가 내가 알기로.

    “…후작가의 사업이.”

    콧방귀를 뀐 스텔라가 한껏 비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냈다.

    “아주 형편없죠.”

    그랬다.

    후작은 사업을 못해도 너무 못했다.

    기존 상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하건 새롭게 만드는 일에 투자를 하건, 그냥 뭘 해도 다 이익은커녕 투자금 회수도 못 하더라.능력이 없으면 가진 거라도 지켰어야지.

    사치는 또 어찌나 부리던지.

    “뭐, 그래서 우리야 일이 수월하지만요.”

    내가 씨익 웃자 스텔라 또한 진한 웃음을 흘린다.

    봐도 봐도 심장이 벌렁이는 미소였다.

    “영애, 조만간 황태자 전하의 탄신 축하 연회가 열리는 거 아시지요?”

    벌써 가을이 코앞까지 왔구나.

    리안의 탄신일이라, 기쁜 날인데…….그때까지라고 했다.

    내 대답을 유보하는 것은.

    ‘…벌써 생각만 해도 숨 막히네.’

    “예, 알죠.”

    내 시무룩한 음성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스텔라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텅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꽤 재밌는 손님이 오실 예정이랍니다.”

    손님? 재밌는 손님이란 게 뭐야.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말을 하다 마는 그녀 때문에 괴롭다, 너무 궁금해서.그러나 잔인하게도 대답 대신 흥미가 잔뜩 묻어나는 미소를 끝으로 스텔라가 마이어 저택으로 돌아갔다.*슈베른 왕국의 왕세자, 에녹이 제 궁의 응접실을 빙 둘러보았다.

    “아론, 내가 지금 왕궁의 응접실에 앉아 있는 것이 맞지?”

    소파에 앉은 에녹의 옆에서 단아한 몸짓으로 차를 우리고 있던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어찌하여 방문 예정이 없던 제국민이, 여기 있는 걸까.”

    에녹의 맞은편, 왕국민 옷차림을 한 채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두 사람.

    “우선 상품을 좀 보실까요?”

    방긋 웃은 사내가 테이블 위로 상자를 내려놓고, 열었다.

    색색의 보석들이 저마다 빛을 뽐내는 것에 에녹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간다.

    “…분명 왕국의 보석상이 들기로 했는데, 그대들, 언제 왕국으로 망명을 온 건가.”

    한 명은 무려 황태자를 보좌하는 최측근이었으니, 그가 응접실로 들어선 순간 에녹의 미간이 좁혀진 것은 당연했다.

    “저는 제국에 뼈를 묻기로 하였으니, 망명은 어렵습니다만.”

    능글맞은 황태자의 보좌관 벤자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보석이 든 상자를 슥 왕세자 쪽으로 밀었다.

    “자네는 황태자의 곁에서 종종 보았다만, 저쪽은?”

    에녹의 물음에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내가 단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사의 수장이 보내서 오게 되었습니다.”

    레사, 슈베른의 왕세자인 에녹도 잘 알고 있는 단체였다.

    그도 가끔은 제국의 사정을 두루 살펴보고자 의뢰를 청하기도 한 곳.

    “레사라.

    그래서 이리 은밀하게 거짓으로, 겁도 없이 왕세자를 독대하고자 한 이유가 무얼까.”

    제국과 왕국의 규모가 다르다지만, 그렇다고 한낱 제국의 신하가 왕국을 속여 만남을 청할 만큼 왕세자가 만만한 상대일 리 없었다.불쾌감을 숨기지 않는 눈빛을 한 채, 하나 본론을 듣기 전까지 이들의 처분을 보류한 에녹이 느릿하게 다리를 꼬았다.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리 저하께 무례를 저지르게 되어 깊이 사죄드립니다.”

    제국 황태자의 명을 앞세워 제 신변을 먼저 보호한 벤자민이 뒤늦은 사과를 올렸다.

    그 가증스러움을 모를 리 없는 에녹의 입매가 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 하는 데 시간 쓰지 말고, 본론을 말하게.

    내 들어보고 그대들의 처분을 결정할지니.”

    난감한 미소를 지은 벤자민이 입을 열었다.

    “제국에 협력을 요청하신 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느새 몸을 바로 하고 장난기를 지운 벤자민이 이어 에녹에게 말을 올린다.

    “윗분들이 전하시길, 굴에 숨어든 너구리를 잡기 위해 그 굴을 무너트릴 터이니 저하께서는 그 뒷일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시면 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미 레사의 주도 아래 제국 내 그럴싸한 상단을 만든 참이다.

    남은 것은 왕국에 그와 같은 상단을 꾸리는 것.

    “호오, 그래서 그 굴은 어찌 무너트릴 작정인가?”

    에녹의 눈에 흥미로운 이채가 스쳤다.

    “이미 비오첼라 백작가를 잘라낸 덕에 데이비드 후작가의 큰 물줄기는 막혔지요.

    그 외 자잘한 부분은.”

    벤자민의 시선이 제 옆에 자리한 레사의 사람에게 향했다.

    “저희 레사가 숨통을 조이는 중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벤자민이 그의 말을 받아 이었다.

    “후작은 제힘으로 살 수 있는 자가 못 되어서 조만간 해왔던 일에 눈을 돌릴 겁니다.”

    에녹이 꼬았던 다리를 천천히 풀어내며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서, 왕국에 파렴치한 짓을 자행한 후작의 목을 잡아채는 데 내가 무얼 해주면 된다는 거지?”

    매끄럽게 올라간 입매와 서늘한 음성이 한데 어우러져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왕세자의 모습에 벤자민이 침을 삼켰다.

    “…왕국에 그들이 거래를 원할 만한 상단을 하나 만들 터이니 이를 묵인해 주십시오.”

    에녹이 그 일을 진행할 거라 생각되는 레사의 사람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살폈다.

    “묵인뿐이겠나.

    내 친히 왕국 상단의 표식까지 내어줄 수 있지.”

    도로 소파에 몸을 묻은 에녹이 다 식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아, 그리고 송구한 말씀이오나.”

    이야기가 성사된 후, 누그러진 분위기를 틈타 벤자민은 또 다른 황태자의 명을 수행하고자 목을 가다듬었다.

    “저하께서는 이미 그 추한 거래에 대해 알고 계셨을 텐데 마땅한 조치와 더불어 제국에게 아무런 언질이 없으셨던 점, 황태자 전하께서 무척 유감이라 전하라 하셨습니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제 눈썹을 까딱인 에녹이 한숨을 삼켰다.그런 왕세자의 모습에도 빙그레 웃은 벤자민이 다시 한번 보석이 든 상자를 앞으로 밀었다.

    “보석의 값은 저하께서 직접 책정해 주는 대로 진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하, 그래.

    보석 값으로 황태자 전하의 마음이 풀린다면야 싸게 먹히는 것이지.”

    웬만한 영지의 1년 치 예산에 버금가는 금액을 지불하며 에녹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끝일 거라 생각지는 말라고, 거래가 끝나면 전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말을 전하면서도 제 목이 여기서 날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 반쯤 울며 웃는 벤자민을 에녹이 빤히 쳐다봤다.

    “그를 모를 리가 있겠나.

    나머지는 탄신 축하 선물로 준비한다고 전하게.”

    말을 하는 왕세자의 눈에 불길이 이는 것을 확인한 아론이 혼자 고개를 저었다.

    ‘저건 필시 일을 치고도 남을 눈빛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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