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낮이고 밤이고 온갖 빛을 다 받아들이고 빛내게끔 만들어진 황궁, 그 빛의 궁에서 유일하게 단 한 줄기의 빛도 허용치 않는 지하 감옥.그곳에 황태자 리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백작.”
이 철창 안에 갇힌 지 꽤 시일이 지났음에도 제 처지를 인정하지 못한 비오첼라 백작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전하, 모두 모함입니다!”
“모함이라, 대체 누가 그대를 모함한다는 거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반문하며, 제 발아래 주저앉은 백작을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눈이 싸늘했다.그를 올려다본 백작의 동공이 흔들렸으나 곧바로 잔뜩 눈에 힘을 준 그가 입을 달싹인다.
“그것은! 비오첼라의 부와 명예를 시기한 자들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악을 쓰며 자신의 악행을 부정하는 백작에게 칼날 같은 비소가 향했다.
“백작의 마차에서 약에 취한 영애들이 발견되었네.
미약도 한가득이었지.
증거, 증인, 그 모든 것이 명백한데 그대는 고작 한다는 말이 그것인가.”
당황함에 입만 벙긋대는 백작을 보며 황태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버러지 같은 인간에게 일말의 기대 따위 한 적 없으나, 정말 못 봐주겠군.
그대에게 죽음 같은 사치는 내려지지 않을 것이야.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나.”
황태자의 냉담한 시선이 망연자실한 백작의 뒤편으로 향한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눈동자를 번뜩이는 백작 영식, 레오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비오첼라, 그대들은 비참하게 끝을 맞이하게 될 테니.”
끝까지 탐욕스러운 눈을 빛내던 백작이 돌아서는 황태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잠깐.”
무언가를 직감한 백작 영식이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제 아비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이미 틀렸어! 너도 나탈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들었잖느냐!”
딱 한 번 간신히 제 딸이 저희를 찾아왔을 적, 그때 이미 일이 틀어졌음을 알았다.
- …그간 거래하던 모든 귀족들이 등을 돌렸어요, 그리고…….그녀가 초췌한 몰골로 담담히 내뱉은 모든 말이 절망이었다.
‘그 멍청한 계집이! 그것만 잘 지켰어도!’
장부 하나는 데이비드 후작에게 갖다 바쳤다더니 다른 하나는 보이질 않는다고 하였다.
그 사실을 다시 상기하자 분에 못 이긴 백작이 씩씩대며 철창을 부여잡는다.
“제가 전하께 이 일의 진짜 원흉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와 거래를 하시지요!”
황태자의 고개가 느리게 돌려졌다.
그 어떤 감흥도 없는 표정의 그가 읊조린다.
“진짜 원흉이라.”
아직도 제게 그 어떤 기회가 있을 거라 여기며 눈에 열기를 품는 백작, 그와 반대로 온기 한 점 없이 경멸만이 가득한 황태자의 시선.
“예, 제가 그자에 대해 낱낱이 고하겠습니다.
하니 부디 마땅히 벌해야 할 자를 벌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대는 벌 받을 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단박에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남에도 증거가 난무했다.
아무런 희생 없이 빠져나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판단한 백작이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표정을 꾸민다.
“권력에 눌려 잘못되었음을 앎에도 뿌리치지 못한 것은 제 잘못이지요.
그에 대한 책임은 무겁게 받겠습니다.”
가증스러운 백작의 얼굴에 얕게 한숨을 내쉰 황태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백작.
그대는 지금 내게 거래를 청할 수 있는 위치가 못 돼.
차라리 죽여달라 청한다면 모를까.”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선보이며 황태자가 성큼 철창 앞으로 다가섰다.
“알고 있는 것을 죄다 뱉어내면 그때, 내 그대의 사지 중 무엇을 남겨둘지 고민해 보겠네.”
차갑게 내리꽂힌 말에 백작뿐 아니라 그의 등 뒤로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백작 영식까지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만큼 황태자의 기운이 전에 없이 살벌했다.어느새 압도당한 백작이 더듬거리며 두서없이 말을 뱉었다.
“데, 데이비드 후작의 짓입니다.”
“그래? 그대 외에 후작을 위해 일하는 자가 누구지?”
고작 귀족 가문 하나를 움직여 이렇게 큰일을 벌이지는 못했을 거라 짐작한 황태자가 물었다.
“…하, 한스 자작.
그자가 물건을 다 구해다 주는 것으로 압니다.”
그 외에 묻지도 않은 것까지 줄줄이 쏟아낸 백작이 끝내 힘주어 쥐고 있던 철창을 놓았다.
모든 걸 쏟아낸 그가 넋이 나간 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그런 백작에게 짧게 시선을 둔 황태자가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스 자작.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새로이 등장한 이름을 되뇌며 감옥으로 이어진 통로를 벗어나자 낯익은 얼굴이 황태자를 반겼다.
“전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직 밝은 하늘을 힐긋 본 황태자가 말끔히 차려입은 사내를 바라봤다.
“항상 밤이 내린 연회에서나 모습을 본 것 같은데, 이리 환한 낮에 공자를 보니 새롭군.”
멋쩍게 웃은 해리스 공자가 이내 제 손에 들린 장부를 들어 보였다.
“던컨이 전하를 도와 처리할 일이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장부와 공자의 얼굴을 번갈아 본 황태자의 입꼬리 한쪽이 시원하게 올라갔다.
“이제야 내 부름에 응해주는군.”
던컨이, 제 주군은 스스로 정할 만큼 곧고 고집 센 그들이 이제야 황태자를 인정했음을 진심을 담은 인사로 전했다.
“가지, 할 일이 많아.”
반듯한 걸음으로 저를 지나쳐 앞서가는 황태자의 등을 본 공자의 표정이 어둡다.
“전하, 제가 그리 쓸 만하지는 않을 텐데 큰 기대는 안 하시는 편이.”
설렁설렁 뒤따르는 공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황태자가 코웃음을 쳤다.선황제가 승하한 뒤로 모든 일선에서 던컨이 물러났다지만, 그것이 성품과 능력의 퇴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황태자는 제게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공작가를 두고도 끊임없이 살폈다.그리고 알았다.해리스 던컨, 서류에 남는 모든 일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수준을 유지하는 그가 사실은 다방면에 박식한 수재라는 것.
‘대공의 곁에서 가장 그를 면밀히 살피던 인물.’
그러니까 던컨이, 그 가문을 짊어질 공자가 가장 가까이에서 제국의 미래를 점쳐보고 있었음을.*데이비드 후작가, 그 넓은 대저택 안에서도 내밀하게 숨겨진 방.
여기서 저택 밖으로 난 길은 허락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탁―그 문을 통해 이제 막 도착한 한스 자작이 한껏 몸을 움츠린 채 알렌 데이비드 후작에게 머리를 조아린다.소파에 몸을 묻은 알렌의 감은 눈이 천천히 뜨였다.비오첼라가 잡혀간 직후, 숨을 죽이고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혹시나 저를 찾아내는 것은 아닐까, 제 저택을 들쑤시고 다닐 황실 기사단의 모습을 떠올리며 초조한 나날을 보내기를 수일.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들은 끝내 저와의 연관성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그러고 나자 차츰 제 손을 떠난 것들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 것이었던 것들.
후작가 재정에 구멍이 나고 그만큼 제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자 더는 움츠리고 있을 수 없었다.
“…자작, 약물 거래는?”
굳어 있던 자작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다.
노예 거래는 그렇다 치고, 설마하니 약물마저 거래가 끊길 줄은 몰랐다.후작이 건네준 장부.
그를 토대로 비오첼라의 빈자리를 채워보려 했다.하나 자작은 물건을 만들기나 했지, 귀족들과의 거래를 주도한 적은 없었기에 그들과 접촉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지난 거래를 들먹이며 반협박조로 약물을 떠넘기려 했으나 귀족들의 태도가 지나치게 완강했다.
- 소규모 연회도 못 여는 판국에, 약은 무슨 약인가!…지금은 필요 없네.
“그것이, 아직 황가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후작의 입꼬리 한쪽이 비정상적으로 치솟는다.
그의 눈에 깊은 짜증이 묻어나자 자작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장부를, 감상하라고 던져준 줄 아나?”
후작이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문질렀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고 화를 억누른 목소리가 나직이 흐른다.
“그들은 나를 두려워해야 해.
왜? 그 장부는 살생부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백작이 제게 상납하던 것을 적어둔 부분은 이미 모두 태워버린 참이다.
‘아주 세세하게도 지껄여 놓다니.
그 멍청한 계집이 끝까지 장부를 살펴보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날짜별로 거래한 귀족과 품목을 나열해 놓은 장부, 그 끝에 다다라서야 데이비드 후작가가 무엇을 저들에게 제공해 왔는지, 그 대가로 얼마의 금전적 보상을 받아갔는지가 나왔다.
“그런데 고작 그걸 들고 가서 한다는 말이, 아직 황가의 눈치를 본다?”
코웃음을 친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작에게 향했다.
“자작, 내가 그치들보다 못한 것이 무어가 있지? 단지 그 잘난 피! 황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우러러본다니.”
그저 쥐던 것을 손에 넣고자 재개한 일에 다른 의미가 들어섰다.
‘나보다 황가의 눈치를 보는 게 중하다, 이건가?’
제국의 귀족으로서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임에도 제 욕망에 눈이 먼 후작의 이성은 이미 망가져 버린 후였다.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후작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자작이 고개는 숙인 채 눈만 들어 그를 힐끔 바라본다.
“…사실 상단 하나가 계속 접촉해 오고는 있는데.”
“상단?”
처음 들어본 상단이기는 했다.
은밀하게 접촉해 와 자신들을 소개하기를 평범한 약재상이라 하였지.
“예.
약재상이라고 하는데, 주로 왕국에 납품하고 있답니다.
한데…….”
왕국을 논하자 이번 비오첼라 사건이 떠올라 절로 미간에 주름이 진 후작이 곧 흥미를 잃은 듯 심드렁해졌다.
“거래하는 왕국 측의 상단에서 저희가 취급하는 약물의 종류를 찾는다고.”
그리 말했다.
평범한 약재만을 취급하는 자기네들은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아 이리 찾아오게 되었다면서.
“정체도 모를 놈들이랑 일을 도모할 수는 없지.
비오첼라 백작의 꼴을 보고도 자넨 그런 말이 나오는가!”
아무래도 비오첼라 백작이 종반에 어울리던 그 상단, 왕국 출신의 상단주가 이끈다던 낯설디낯선 벨리타 상단이 수상했다.
‘그 뒤로 계속 추이를 지켜봤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단 말이야…….’
역정 내는 후작을 본 자작 또한 그의 말이 맞다 여겼다.그 상단이 어찌 알고 꼭꼭 숨은 자신을 찾아왔는지부터 의문이기는 했다.
그래서 제안을 고려하기는커녕 뒤돌아 나가는 약재상의 뒤를 쫓아 뒷조사까지 진행하지 않았던가.
“…그렇지요.
제가 더 쓸 만한 게 있을지 찾아보겠습니다.”
납작 엎드려 몸을 사리라던 후작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자금을 만들라며 닦달하는 그를 마주한 자작이 견디다 못해 꺼낸 것이 저 약재상인데.
‘귀족 나리들을 더 쪼아봐야겠군.’
뾰족한 수가 없는 한스 자작은 결국 후작의 말마따나 장부를 앞세워 귀족들을 더욱 벼랑 끝에 세우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