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56화 (56/109)
  • 56화

    【 슈베른 왕국 남매 】

    던컨 공작가 응접실, 2층 높이에 달하는 높은 층고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이 진해진 원목 가구들, 그리고 이 중후하고 고풍스러운 공간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 던컨 공작.

    “노인네를 만나러 친히 여기까지, 그것도 두 분이 함께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눈이 무섭다, 할아버지.두 손을 깍지 낀 채 턱을 얹은 공작의 입꼬리가 분명 호선을 그리고 있음에도, 제 양옆에 자리한 나와 대공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에는 날이 서 있다.

    ‘…어쩌다가.’

    살아 있는 권력의 화석이라 칭할 수 있는 던컨 공작, 내 평생 이 할아버지랑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화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공작, 비비안이 무서워하니 이만 그 표정 좀 풀지 그래.”

    디에고의 격 없는 어조에 놀라 두 사람을 곁눈질하는데 공작의 코웃음이 들렸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는 한낱 늙은이고, 영애는…….”

    아, 뭐요.

    나야말로 한낱 영애인데!

    “영애 뒤를 지키고 있는 분들이 원체 대단하신지라 떠는 것은 오히려 이 늙은이 아닙니까.”

    할아버지, 그렇게 안 봤는데 얄밉네.

    돌려 까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 노인네.억울함에 말도 못 하고 입만 삐죽대고 있자 디에고와 눈이 마주쳤다.

    얄밉기는 마찬가지인 그의 미소에서 도리어 안도감이 느껴지다니.그래, 날 향한 편견에 새삼 감탄하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지.시간의 흔적이 단아한 나이테를 닮은 듯 보이는 테이블에 시선을 두었다.

    이렇듯 묵직하고 단단해 보이는 공작가의 품격이 부디 그 가주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라 믿고 싶다.

    “공작님, 오늘은 부탁이 있어서 이리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가까스로 운을 떼자 디에고를 향해 있던 공작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부탁이라? 영애가, 내게?”

    미심쩍다는 시선, 의아함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목소리.

    ‘와.

    황제 상대할 때보다 더 떨리는데, 이거.’

    황제 내외나 황태자, 대공까지 나보다 훨씬 위에 있는 자들이 하도 친근하게 굴어서 잊고 있었다.권력을 가진 자들의 위압감.

    그들 앞에서 말 한마디 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예.

    비오첼라 백작가의 일은 알고 계시지요?”

    비오첼라를 언급하자 공작의 얼굴에 혐오가 들어찼다.

    이윽고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던 공작에게서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늙은이가 그 일을 모를 만큼 세상일에서 멀어지지는 않았지, 아직.”

    그렇게 밉살맞게 말하니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가가 이리 휑한 거 아닌가.

    문턱이 닳도록 귀족들이 드나들어도 모자랄 판에.

    “그럼요.

    아직 정정하신걸요.”

    재빠르게 벨리타 상단주 역할로 갈고닦은 영업용 미소와 꿀 바른 혀 놀림을 선보였다.

    지금의 나는 무슨 말을 해도 웃으며 받아칠 수 있는 경험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 일을 밝히는 데 제가 아주 조금 힘을 보탰답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있어서요.”

    얼마 전 황궁에서도 선보였던 비오첼라의 장부를 여기서도 꺼내본다.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작이 손을 뻗었다.

    “이게 무언가.”

    뭐긴, 영감이 앞으로 하나하나 손봐야 할 명단이지.

    “비오첼―”

    쾅―갑작스런 소음에 말을 끊고 돌아보자 공작과 똑 닮은 회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이가 보였다.

    “쯧, 웬 소란이냐.”

    “이런.

    제가 급한 마음에 큰 실례를 범했군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남자가 잔뜩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공작과 대공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내가 다 진땀이 난다.

    그것보다 얜 또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해리스, 좀 떨어지지?”

    내내 흡족한 미소로 내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디에고의 미간이 구겨져 있다.

    “아! 그래, 그래.

    내가 너무 가까웠나? 영애,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단하다, 해리스 공자.

    디에고의 서슬 퍼런 눈빛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물 흐르듯 넘기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예, 저도 공자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스스럼없이 내밀어진 공자의 손을 못 본 척하고 깊숙이 고개를 숙이자 내내 방긋대던 그가 난감한 듯 뻘쭘히 손을 거두었다.내가 여기서 너랑 악수하고 막 그럴 만한 친화력은 갖추지 못했단다.

    “그만하고 앉거라.”

    못마땅함이 가득한 공작의 말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공자가 마지막까지 내게 미소를 선보이고 자리로 향했다.

    ‘외모는 참 많이 닮았는데 속은 엄청 다른가 보네, 할아버지랑 손자가.’

    현 던컨 공작의 아들 내외는 해리스 공자를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어린 손자를 도맡아 키웠다던 패트릭 던컨 공작의 시선에서 숨겨지지 않는 애정을 순간 본 것 같다.

    “자네가 공작가에 다 들러주고,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를 모시고 오는 날이 오다니! 이것 참.”

    대공의 옆에서 여전히 능글맞게 주절대는 공자의 말에 내가 다 초조하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는 디에고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짜증? 짜증?! 화도 아니고 불쾌함도 아닌, 옅은 짜증만을 내비치는 것이 도리어 의아한데.

    ‘오, 친우.

    둘이 친우라고 들은 것도 같아.’

    대공에게 저런 모습이! 그에게 친우가! 감탄 어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둘을 살폈다.모두를 거부하던 대공이 유일하게 곁을 내준 친우가 던컨 공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한데 지금 보니 곁을 내줬다기보다 일방적으로 공자가 비집고 들어가 드러누운 것 같은 관계인데?한참 둘을 번갈아 보며 디에고의 색다른 면모를 눈에 새기는데, 연이은 헛기침이 응접실에 울린다.

    “크흠, 그래서 이게 무어냐고 물었다만.”

    그제야 공작에게 모두의 시선이 이끌렸다.

    장부에 얹어진 손을 탁, 탁, 두드린 그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우리를 둘러봤다.

    “아, 그러니까.

    그게 바로, 비오첼라 저택에서 찾아낸 비밀 장부랍니다.”

    “호오―”

    장부를 두드리던 공작의 주름진 손가락이 멈춘다.

    얼굴에 놀라움과 감탄을 담은 공자의 시선 또한 장부로 향했다.

    “이걸 내게 가져온 연유는?”

    한 치의 온기도 담기지 않은 굳은 표정, 심판과도 같은 틈 없는 공작의 시선이 곧게 나를 향했다.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살펴봐 주셨으면 해요.

    비오첼라가는 몰락의 기로에 섰다지만, 어디 한쪽 손만으로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들과 손을 맞춰 제국을 욕보인 자들의 발자취가―”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장부를 향했던 시선을 들어 공작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 장부에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부디, 제국을 수호해 오신 던컨 공작가가 그들에게 합당한 처우를 내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말을 다 마쳤음에도 한참을 나와 시선을 나누던 공작이 이내 장부를 살피기 시작했다.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는 조용한 응접실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이어지던 차, 찬찬히 공작의 고개가 들린다.

    “이 늙은이가 너무 오래 자리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나 보군.”

    조소가 걸린 공작의 얼굴을 확인한 디에고가 턱을 괸 채로 흥미롭게 미소 지었다.

    “그걸 이제 알았나.”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 사이로 많은 말들이 오가는 것 같아 슬쩍 시선을 돌리자 해리스 공자와 눈이 마주친다.씨익 웃어 보인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할아범.

    지금의 황제를 인정한 지도 오래되었으면서 아닌 척 그만하시고.

    이제 일 좀 하시죠.”

    말하는 것 좀 봐.

    와, 공자의 말본새에 경악하는 것은 나뿐이었지만, 그가 탐탁지 않음은 공작도 마찬가지인지 혀를 찼다.

    “그래, 던컨이 이젠 이름값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냐, 해리스.”

    별안간 온화하게 웃으며 제 손자를 바라보는 공작의 모습에 왜 내가 다 소름이 돋는 걸까.이 방에 들어선 이후로 변함없는 미소를 유지하던 공자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보인다, 보여.

    당황했다, 쟤.공작이 제 앞에 놓인 장부를 공자 쪽으로 스윽 밀었다.

    그와 동시에 공자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보았어.

    “…이걸 왜?”

    “왜긴.

    네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제부터 네 할 일인데.”

    아하! 일은 해리스 공자가 하는 거구나.

    그럴 만도 하지.

    이르면 공작의 작위를 받을 수도 있는 나이니까.나와 디에고의 시선이 모두 해리스를 향했다.

    “이 할아비가 다 늙어서 이런 조무래기들 기강 잡는 데 나서야 하겠느냐.

    너도 이제 그만 놀 때가 되었지.

    마침 잘되었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공작에 비해 공자의 얼굴은 세상 다 산 사람 같다.

    “해리스 자네, 앞으로 바빠지겠군.”

    디에고마저 공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유의 종말을 확정 지었다.입을 달싹이는 게 할 말은 많지만 안 나오는 모양이네.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리는 것이 퍽이나 일하기 싫은가 보다, 너도 참.

    “공자님, 잘 부탁드려요.

    참고로 황태자 전하께서 이 일이 성사되면 바로 입궁하라 일러주셨습니다.”

    황망히 나를 보던 공자가 끝내 제 양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참 길게, 길게도 내쉬었다.귀족 사회의 우두머리이자 그에 맞는 가풍을 지녔기에 던컨 공작가가 적임이라 여겼다.

    그런데 공자를 보아하니 다른 의미로 너희가 하는 게 맞네.지금껏 놀고먹었다, 이거지?내 생각이 여지없이 대공에게 보였는지 그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럼 일이 잘 성사된 걸로 알고, 비비안과 나는 가보도록 하지.”

    디에고의 마무리에 공작이 나와 대공을 번갈아 바라보기를 수 번 반복한다.

    “예, 어쩐지 조만간 영애에게 존칭을 써야 할 날이 올 것만 같군요.”

    꼬아서 말하기 장인인가, 이 할배.

    “그럴 리가요.

    공작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찾아뵙도록 할게요.”

    생긋 웃자 공작의 무심한 얼굴에 처음으로 꾸미지 않은 미소가 떠올랐다.

    “영애, 내 그대를 믿고 있으리다.”

    내내 날 아니꼽게 보아 숨 막히게 하던 사람이!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 전에 연회장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오른다.알겠어요.

    알겠다고요.

    걱정 마세요, 저도 제국에 혼란을 가져올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그 부분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힘 있는 눈 맞춤을 공작에게 선사했다.이윽고 두 던컨을 두고 응접실을 나서자마자 디에고가 내 손을 끌어 제 손과 얽는다.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재빨리 공작가의 복도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홱홱 날렵하게 고개를 돌려가며 그를 노려보았으나 도무지 꼭 쥔 손의 힘은 풀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도리어 디에고가 이보다 더 다정할 수 없을 것 같은 미소를 띤 채, 그의 머리칼이 내 이마를 간지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을까지.

    비비안 마음 지키고 싶다며.”

    아.내 마음, 황태자가 내게 보여준 그 마음.어느새 닿아 있는 디에고의 온기를 느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맞닿은 이마가 살며시 흔들렸다.

    ‘…간지러워.’

    “…그때까지, 네게 마음껏 닿아보려고.”

    이내 디에고의 푸른 눈이 감기고 코끝을 스쳐 마침내 서로의 숨을 빈틈없이 머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