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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55화 (55/109)

55화

‘이거 뭘까……? 나 뭐 하는 거지?’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 안고 있자니 기분은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숨고는 했어.

그러다 잠들면 궁이 발칵 뒤집어졌지.”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가 좋아서 두 팔로 디에고를 더 껴안았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지만, 그가 쓸쓸해하지 않았으면 했다.제 얼굴을 내 머리 위에 올려놓은 덕에 웃을 때마다 진동이 전해졌다.

“비비안, 그렇게 너무 붙으면 곤란한데.”

분명 좀 전까지 곤란하지 않았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지금 행동이 곤혹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구나.

‘…미쳤네.’

내가 벌인 행동을 돌아보니 이제야 온몸이 굳는다.*

“비비안, 그렇게 너무 붙으면 곤란한데.”

품에서 바르작대는 비비안의 움직임을 감지하던 디에고가 눈을 감는다.

별다른 사심 없이 일을 벌였다면 거짓이겠지만, 결단코 이렇게까지 자극을 원하지는 않았다.

“뭐가 곤란해요?”

느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디에고가 피식 웃었다.

“네가 닿는 곳마다 불에 덴 것 같거든.”

“네?”

과연 비비안이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의 어느 정도를 이해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 디에고였다.반면 떨어져 있었던 만큼 그가 그리웠던 비비안은 좀 더 품을 파고들며 디에고의 향을 맡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 비비.”

좀 더 고개를 숙여 비비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디에고가 말했다.

그녀의 향기가 들어차자 그간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비비안의 서슴없는 답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디에고가 그녀를 들어 안았다.디에고가 성큼성큼 걸어 소파에 그녀를 눕힌다.

그 위에 덮치듯 자리한 디에고가 비비안을 내려다보았다.

“잘 지냈어?”

“네.

각하는요?”

디에고의 입매가 나른하게 풀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 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비비안.”

“네?”

비비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제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귀가 쫑긋댔다.

‘토끼가 따로 없네, 정말.’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절로 미소가 차오른 그가 그녀를 꼬시기 시작했다.

“다음에 대공령에 내려갈 때는 같이 갈까?”

빤히 디에고를 보며 그 의중을 살피던 비비안이 이내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그녀의 미약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디에고가 비비안의 양옆에 제 팔을 세워 지탱했다.

“…무거워.”

“…제가 무거워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비비안 때문에 웃음이 터진 그의 몸이 진동했다.

“아니.

끌어내리면 내가 널 누르게 되잖아.”

이해했다는 듯 작게 벌어진 비비안의 입에 시선을 두던 디에고가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떼었다.그 짧은 입맞춤에도 볼이 빨개진 비비안이 부러 화제를 돌린다.

“대공령에서 쓸쓸했어요?”

비비안의 물음에 잠시 눈을 감고 되새겨본 디에고가 고개를 저었다.

전과 달라진 것은 그다지 없었다.

환경도, 사람도, 제 감정도.다만 단 한 가지가 저를 힘들게 했을 뿐이다.

“아니, 쓸쓸하다기보다는 그냥 계속 네가 보고 싶었어.”

눈을 휘며 웃어 보인 그가 그대로 비비안을 안아 몸의 위치를 바꾼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운 디에고의 위에 비비안이 자리했다.단숨에 바뀐 자세를 신기해하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던 디에고가 비비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나른해진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 있어?”

계속 무언가 불편한 듯 눈치를 보며 제게 닿아 있으려 애쓰는 비비안, 그게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네.

내 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 거.”

가만가만 비비안의 머리를 토닥이던 손길이 멈칫한다.

‘다른 사람이라.

마이어 백작 영애? 아니면 리안인가.’

비비안이 감싸고자 하는 이가 누구일지 짐작해 보던 그가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래.

그럼 계속 닿아 있자.”

“…계속은 아니고, 가을까지?”

그 미묘한 기한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천장을 보던 디에고가 끝내 웃는다.

“아! 그리고 꽃마차.

그거 정말 고마워요.”

선물 전해주는 일을 맡아준 필립이 잔뜩 흥분해서 제게 전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비비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찬양으로 시작한 필립은 끝에 가자 하도 울어서 눈가와 코가 빨개졌는데도 정말 요정이 따로 없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저와 밤새 검을 겨눠야 했다.

“응.

마차가 흔들릴 정도로 대성통곡했다며.”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문 비비안이 속으로 필립 경을 부르짖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필립 경! 대체 어디까지 진실을 전한 것이냐!’

“뭐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

다시 그 행복했던 시간을 되새기던 비비안의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보석으로 장식한 아주 커다랗고 예쁜 함에 디에고가 준 쪽지들이 한가득이었다.

“쪽지요.”

“…쪽지?”

생각지도 못한 답에 당황한 디에고의 미간에 주름이 진다.

설마 제가 보낸 그 모든 물건이 죄다 비비안의 취향이 아니었던 걸까.

‘그래서 그나마 쪽지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디에고를 뒤로하고 비비안은 여전히 쪽지를 떠올리며 히죽이고 있었다.

“다음엔 제가 선물할게요.”

“꽃마차를?”

제 가슴에 얼굴을 댄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몸소 느끼던 디에고가 팔을 들어 제 눈가를 가렸다.

“그거 정말…….”

꽃마차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생각하자 그보다 우스운 광경이 있을까 싶은 디에고였으나, 비비안이 돌을 준다고 해도 기뻐할 자신이 있었기에 마냥 행복했다.*

“이거 너무 천박하잖아.”

슈베른 왕국의 왕세자, 에녹이 케이크를 가르던 나이프를 그대로 벽에 던져 꽂았다.

“우리, 제국에 열등감 있어요, 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조소 지었다.

“제국에서 귀족 노예를 사들여 자기만족 같은 걸 하다니, 안 그래?”

그의 보좌관이자 호위 기사를 겸하고 있는 아론이 무심하게 답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다 잡아내고 싶은데.”

그간 뒤를 쫓았으나 알아낸 것이 고작 정황이었다.

제국의 얼간이가 노예를 공급하고 왕국의 머저리가 그를 거금을 들여 사들인다는.

“황태자 탄신 축하 연회가 얼마 안 남았지.”

“가시겠습니까.”

에녹이 제 푸른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긴다.

“필히 가봐야겠어.”

어릴 적에는 양국의 친선 교류랍시고 서로 몇 달씩 오고 가고는 했다.

제 형들과 제국을 방문할 때에도 큰 기대는 없었는데.가뜩이나 왕국에서도 무시당하는 삼남이 제국이라고 사정이 나아질 리 없다 여겼으니까.

- 네가 마음에 들어.

친구 하자.

“그때만 해도 귀여웠는데 말이야.”

저와 같은 나이의 디에고는 아첨과 비아냥을 일삼는 제 형들을 무시하고 제게 손을 내밀었다.

‘그 뒤에 형이랍시고 옷자락 붙들고 있던 꼬마가 황태자가 될 줄이야.’

“그쪽도 화가 많이 났겠는걸.”

에녹의 입매가 유려한 곡선을 그린다.

그가 생각하는 제국의 황태자는 융통성은 없으나 올곧고 지나치게 선한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상황이 뻔히 그려졌다.

‘잘하면 왕국에 불똥이 튀겠어.’

“리안이 뭘 좋아했더라.”

턱을 괴고 방실방실 웃는 제 주군을 물끄러미 보던 아론이 제국의 두 사람을 떠올렸다.

한없이 가벼운 왕세자와 달리 무겁다 못해 지나치게 제 삶을 관망하던 이들.탁―

“에녹!”

벌컥 열린 문으로 서릿발 같은 고함과 함께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이 들어섰다.일순간 자리 잡은 차가운 표정을 단숨에 미소로 바꾼 에녹이 나긋하게 말을 한다.

“오셨습니까, 왕후 전하.”

“지금 네 형님이 곤란에 빠졌는데, 넌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게야!”

‘그 곤란에 빠트린 사람이 저인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속마음은 고이 접은 채 속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힌 그가 상냥하게 답했다.

“저런.

이번엔 또 무슨 일로 곤란해지셨을까요?”

여인? 도박? 그도 아니면 어디서 추태라도 보이셨답니까?이어지는 그의 질문에 붉으락푸르락하던 얼굴로 끝내 화풀이와 저주 그 사이쯤 되는 폭언을 퍼붓고 돌아갔다.이를 하루 일과쯤으로 치부한 두 사람이 왕후가 떠난 문에 잠시간 시선을 두고 이내 털어버린다.

“아, 리안이 내내 마음에 둔 영애가 있지 않나.”

그래, 누가 어떻게 봐도 좋아하는 게 틀림없는 여인이 있었지.

저는 숨긴다고 숨기는 것 같았지만.

“이름이…….”

“비비안 윈데이너 후작 영애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정보를 일러준 아론이 능숙하게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맞아.

이번에는 거기를 찔러볼까.”

제국의 둘을 향한 저 삐뚤어진 애정이 매번 그들을 진저리치게 한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 저리 즐기는 것일까.제 주군에게 방금 내린 찻잔을 내어주며 그가 말을 올렸다.

“제 느낌에, 그 영애는 건들지 않으시는 게 신상에 좋을 듯합니다.”

“그래? 왜?”

호로록 차를 마시며 별 뜻 없이 되묻는 에녹을 보던 아론이 무표정을 고수한 채 답했다.

“사랑이니까요.”

풉―이제 막 입 안으로 흐르던 차가 그대로 허공에 흩뿌려진다.그 엄청난 광경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아론이 에녹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방금 사랑이라고 했어?”

“그렇습니다만.”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망한 표정으로 아론을 바라보던 에녹이 끝내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제 주군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론은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제가 맞았다.딱 한 번 황태자가 비비안 윈데이너를 바라보는 순간을 포착한 적이 있다.

그녀의 이름을 여태 알고 있는 것도 그날의 기억 때문이었으니까.

“황태자는 진심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그래도 주군이라고 충언을 올린 것이나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진심, 진심이라.”

에녹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진다.

그를 본 아론이 혀를 찼다.

저건 이미 틀린 미소였다.

‘이번에 크게 데이겠군.’

“탄신 축하 연회에 가기 전에 미리 언질을 해둬야겠어.

간만에 서신을 보내볼까.”

왕세자의 흥겨운 콧노래가 슈베른 왕국의 집무실 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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