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54화 (54/109)
  • 54화

    *이렇게 넷이 자리를 함께하는 날이 오다니.

    ‘지옥인가.

    필시 지옥이 틀림없다.’

    원형 탁자 위에 올려진 낡은 장부 하나.

    발단은 저거였다.

    비오첼라 영애가 내게 넘겨준 저 장부.

    “이것 참, 신선한 조합이군.”

    대공령에서 올라온 디에고가 다리를 꼬고 해맑게 웃는다.

    너는 좋겠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편해서.

    ‘벌써 다리가 아픈 거 같아.’

    비밀 연애도 지키고 황태자의 고백도 비밀로 하기 위해 나는 디에고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길지도 않은 다리를 쭉 뻗어 그의 다리에 닿아 있는 지금, 벌써 피곤하다.

    “그러니까 이걸 비오첼라 영애가 비비안에게 직접 건네줬다고?”

    나는 황태자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장부는 두 개였고, 하나는 알렌 데이비드에게 갖다 줬는데.

    알다시피 배신당하고 제게 나머지 한 부를 넘겨줬어요.”

    “피의 복수를 부탁하면서 말이죠?”

    스텔라가 매혹적인 미소를 걸고 무서운 말을 한다.서로 뒤엉킨 마음의 향방이 내 눈에만 보였다.

    그래서 자꾸 눈치가 보이고 막 깜짝깜짝 놀라고 무섭고 너무 힘들다, 나 지금.돌아가며 장부를 살피던 이들의 얼굴이 각기 험악해졌다.

    ‘그럴 만하지.’

    “너무 많죠? 생각지도 못한 인물도 있고.”

    눈썹을 들썩이며 불쾌감을 표하는 디에고, 특유의 서늘한 미소가 절정에 다다른 스텔라.그리고 제국 황태자의 얼굴은 감히 쳐다보기도 눈치 보일 정도로 굳어 있었다.

    “증거가 확실하니 다 잡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내 말에 난감한 듯 두 남자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다.

    ‘뭔데? 지금 나 빼고 너희만 아는 뭐가 있는 모양인데?’

    “슈베른 왕국에서 협력을 요청해 왔어.”

    황태자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왔다.

    왕국에서 제국에 무슨 협력 요청을……?

    “설마 왕국에 노예 보낸 걸 알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가 미간을 좁혔다.

    이어 디에고 또한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곤 말을 이었다.

    “전하랑 내가 거기 왕세자랑 어릴 적에 알던 사이거든.”

    “친우세요?”

    둘이 동시에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리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이것 봐라……? 저럴수록 친한 친구일 확률이 높다.’

    저리 거리낌 없이 싫은 내색을 보일 정도로 엉겨 붙은 추억이 있는 것이야.

    “그건 그렇고.

    그럼 어떤 협력 요청을 해온 건데요?”

    제 턱을 쓴 황태자가 난감한 듯 입을 뗐다.

    “제 나라에서 노예를 사들인 귀족들을 색출하고 싶다는군.”

    그걸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지? 눈앞에 펼쳐진 장부로 시선이 옮겨간다.

    그러나 거기에도 답은 없었다.제국 내 거래만 표기되어 있지.

    왕국 내 거래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그거 가능한 거예요? 애초에 왕국에서 알아보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요?”

    “어렵겠군요.

    모든 과정을 제국 내에서 해결했으니 왕국 귀족들은 꼬리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스텔라가 툭 말을 던지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비오첼라만 잡아들이고 여기서 마무리하는 척, 다시 한번 거래를 유도해 볼까 하던 참이지.”

    디에고가 굳이 날 보며 의견을 제시하더니 쓸데없이 환하게 웃는다.

    ‘…그냥 최대한 쳐다보지 말자.’

    “그렇지만 왕국은 제국의 귀족 출신 노예만 받지 않았나요?”

    턱을 괸 황태자가 가느스름한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더군다나 비오첼라가 이렇게 된 마당에 데이비드 후작이 쉽사리 노예 거래를 바로 재개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바보가 아닌 이상.’

    “후작은 성미가 급하지.

    자금이 끊어지면 별수 없이 손을 뻗을 거야.”

    답이 되었냐는 듯 고개를 까닥이는 디에고에게 하마터면 고맙다는 인사까지 할 뻔했다.

    ‘다리가 언제 떨어진 거지?’

    짧은 다리로 고생 많이 한다, 나 진짜.

    “그럼 제가 제국과 왕국, 양쪽에 상단을 준비하겠습니다.”

    생각이 끝났는지 스텔라의 또렷한 눈동자가 더없이 총명하게 반짝였다.

    ‘크~ 언니, 멋있다.

    벌써 멋있어.’

    “후작의 자금줄부터 조이고, 그가 부리는 수족에게 먼저 접근하도록 하죠.”

    유려하게 말을 뽑아내는 스텔라에게 홀린 듯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천천히 거래하다 왕국의 상단과 연결해 주면서 노예 거래를 부추기면 될 것 같은데.”

    간단히 말했지만 그 안에 생략된 과정이 어마어마했다.

    애초에 없는 상단을, 그것도 제국과 왕국 양쪽에 단기간 생성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나와 디에고는 스텔라가 레사의 수장인 것도 알고, 실제로 벨리타 상단을 창조해 내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 온 터라 납득할 수 있었지만.

    ‘황태자는 어이가 없는 것 같네.’

    “영애,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

    리안이 저렇게 당황하고 난감해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본다.

    “아, 전하께는 제가 말씀을 안 드렸군요.”

    그런데 뒤에서 활동하는 정보상이 제국의 황태자에게 제 정체를 저렇게 다 드러내도 괜찮은 거야?괜히 내가 다 안절부절못해서 디에고를 돌아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웃음으로 화답한다.

    “이쪽으로는 처음 인사드리네요.

    레사의 수장 스텔라입니다, 전하.”

    우아하게 인사를 올리는 스텔라의 짙은 미소가 아름다웠다.

    “…레사?”

    ‘나도 저렇게 멍했지.

    안다, 저 마음.’

    “그대가 그 레사의 수장이라고?”

    더욱 환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를 보자 기분이 묘했다.

    레사로서의 스텔라는 온 힘을 다해 황태자를 지지해 왔으니까.

    ‘그리고 그걸 전하도 알고 있지.’

    리안의 표정이 복잡미묘해 보인다.

    아마 제일 먼저 스텔라가 마이어 가문으로서 제게 어떤 관계에 있는지 돌아봤겠지.

    ‘이제껏 레사의 행보에 이유를 붙이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해서는 시간이 지나도 절대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전하가 알고 계신 백작 영애로서는 어려울지 몰라도, 지금 인사하신 레사의 수장에겐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겁니다.”

    디에고의 정리에 황태자 또한 긍정의 고갯짓을 보였으나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윈데이너가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맡도록 할게요!”

    돈으로 제국을 사고도 남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듣는 후작가였다.

    “그럼 필요한 무력은 브라이트가.”

    무심하게 말하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글 웃는다.

    “전하께서 지휘를 맡아주시면 될 것 같네요.”

    내게는 한 번도 안 보여준 것 같은데, 저 미소.

    스텔라가 저렇게 인자하게 웃는 것은 처음 봤다.괜히 황태자를 째려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일련의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태자가 고개를 숙이며 웃자 그 소리가 낮게 울렸다.다시 고개를 들자 상쾌한 미소가 자리한 얼굴이 보였다.

    거기서 한 번 더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린 리안이 장난기 담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지금 엄청난 자들을 편으로 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군.”

    농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마 황태자가 죽어 관 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의 편에 설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백작 하나, 후작 하나 날아가는 데 이참에 마이어 백작가가 후작가로 올라가면 좋을 것 같단 말이지.나만의 계획을 하나 더 수립하고 신나서 웃자 물끄러미 날 보고 있던 디에고와 눈이 마주친다.고개를 기울인 그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전했다.

    ‘욕, 심쟁이……?’

    “그럼 각자 일하고 다시 모이도록 하지.”

    때마침 황태자의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비비안은 언제나 리안에게 힘을 실어주는군.”

    ‘어라? 뭐지?’

    “무슨 뜻이세요?”

    “…그대가 지지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랄까.”

    지지하는 자라니.황태자의 응접실을 나와 나란히 걷자 내 정치색을 묻는 너.

    갑작스러운 질문이 퍽 당황스러웠으나 난 당당히 말할 수 있어.

    “윈데이너는 로렌스 황가의 편이에요.”

    가슴을 펴고 답하는 사이, 스텔라가 눈 깜짝할 새에 자취를 감춘 사실을 알아챘다.

    ‘얘, 아무래도 무예 능력도 뛰어난 거 같아.’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진단 말인가.

    “그럼 브라이트는?”

    얼굴까지 내게 들이밀며 물어보는 디에고가 마치 일곱 살 아이 같았다.

    “브라이트는 당연히 윈데이너를 지지해야죠.”

    내가 미간을 좁히며 당연한 사실을 일러주자 멈칫한 그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아, 그래.

    맞지.”

    뭐가 또 맞단 말인가.

    내가 지금 되게 당당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너는 대공가고 나는 후작가야!

    “나는 비비의 편이지.”

    ‘왜 또 뭉클하단 말인가.

    심장, 이렇게 쉬운 애였어?’

    쑥스러운 마음에 괜스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앞서 걷던 디에고가 멈춰 섰다.

    덕분에 등에 머리를 부딪힌 내가 의문을 표하자 그가 뒤를 돌아봤다.

    “비비, 그거 알아?”

    “뭘요?”

    “궁에는 쓰지도 않으면서 방이 참 많아.”

    지금도 옆을 보면 문의 행렬이 이어진다.

    이토록 많은 방이 쓰일 때도 있겠지만 보통은 비어 있는 경우가 많겠지.

    “그렇죠.

    그런데 대저택에도 그런 방은 많이 있잖아요.”

    “응, 그렇지.”

    그가 손으로 턱을 쓸며 무언가를 가늠하듯 문들을 뚫어지게 봤다.

    “뭐 하세요?”

    “어릴 때, 궁에서 살던 그 당시에 종종 하던 짓이 있거든.”

    아.

    이 사람, 유일한 황태자가 될 황자였었지.

    조금 씁쓸해지려던 그 순간, 디에고가 내 팔목을 움켜쥐었다.

    “뭐……?”

    짓궂게 웃는 그가 그대로 달렸다.

    “디에고?”

    당황한 내 부름에도 그저 웃음으로 답하던 그가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다지 빠르게 달린 것은 아니라 숨이 차지는 않았다.

    ‘나도 정말 제멋대로지만, 너도 심하다, 심해.’

    이유라도 묻자 싶어 입을 떼려는데 맞은편에서 시종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디에고도 그를 발견했는지 제 검지를 입 앞에 갖다 댄 채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물 흐르듯 나를 이끈 그가 문을 연다.

    나를 품으로 당기더니 그대로 문을 닫았다.쾅―다소 문 닫히는 소리가 컸던 탓에 시종이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소리지?”

    “뭐야? 누가 있어?”

    한 명이 더 있었나 보네.

    졸지에 숨은 사람이 되어 디에고의 너른 가슴에 얼굴을 대고 얌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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