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땀에 흠뻑 젖은 나탈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인지라, 혼자 힘으로 침대를 미는 데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하아, 하아.”
얼굴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지경이다.옆에 놓인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인 그녀가 엉금엉금 기어 바닥을 살폈다.
“어디에, 뭐가 있다는 거야, 대체!”
급한 마음에 비해 어디를 봐도 무언가 있을 법한 구석이 없다.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내리친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아야 해.’
그리고 그때, 절대 제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게 부서진다고……?”
나무로 된 바닥에 금이 가 있다.
바로 자세를 달리 한 그녀가 금이 간 위치를 집중적으로 두드렸다.빠직―우지끈, 소리를 내며 톡 떨어져 나간 나무 바닥 아래.
그 밑에 난 공간에 책같이 생긴 것이 있다.
“…이건가?”
나탈리가 손을 뻗어 꺼낸 후 살핀 결과, 이것은 장부였다.그간 비오첼라가 약물이며 노예를 거래한 내역을 정리해 둔 장부.숨죽인 채 그 내용을 훑어가던 나탈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제가 아는 귀족의 이름이 나올 때면 사교계에서 그들의 위치와 처세를 상기하며 비교했다.탁―힘없이 제 손에서 흘러내린 장부를 보는 그녀의 눈에 죄책감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난 정말 몰랐나?’
제법 어릴 때는 이렇게 부유하지 않았다.
가난하다 말하는 것이 정확했지.여러 사업을 한다지만 정말 돈이 되는 것은 도박장임을 알았다.
때때로 수상쩍던 움직임.
딱 한 번 스치듯 본 모르는 여인의 절망 어린 표정과 비명.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구나 했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모른 척했다.제 몸을 뒤덮는 한기에 떨던 나탈리가 비틀대며 침대로 향했다.
정신없이 침대 위로 기어오른 그녀가 이불을 돌돌 말고 눈을 감는다.
“나는 몰랐어.
정말 몰랐다고.”
잠이 들었다 깼다, 흐느끼면서 그렇게 나탈리 비오첼라가 새벽을 견뎠다.버석거리는 몸을 들어 굴러떨어지듯 침대를 내려온 그녀가 한참 장부를 내려다봤다.
‘방법 없어.
나한테 지금 선택지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장부를 꽁꽁 품에 안은 나탈리가 방을 나섰다.
제 꼴이 형편없음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그녀가 저택의 문을 지나 마차에 올라탔다.
‘후작이 일러준 곳으로 가야 해.’
제 유일한 편인 알렌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저를 품에 안아줬었다.
- 영애, 백작님이 말씀 주신 무언가를 찾으시면 곧장 제가 일러준 곳으로 오세요.마차의 창에 기댄 나탈리가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얼른 제 품에 있는 이것을 누구에게든 던져버리고 싶었다.퍽―멈춰 선 마차의 흔들림이 채 가시기 전 튀어 나간 나탈리가 누군가에게 몸을 부딪혔다.
“꺅.”
손에 쥔 장부부터 살핀 그녀가 표독스러운 눈을 든 곳에 비비안 윈데이너가 있었다.
“비오첼라 영애……?”
네가 맞냐는 듯 의문 서린 부름에 나탈리가 인상을 찌푸린다.
하필 만나도 비비안 윈데이너일 건 뭐란 말인가!엉망인 제 모습과 달리 틈 없이 눈부시게 빛나는 비비안을 보자 속이 뒤틀린다.
“영애, 괜찮아요?”
상체를 숙여 제 안위를 묻는 가증스런 모습에 치가 떨렸다.휙 그녀의 손을 쳐내자 벌겋게 달아오르는 손등이 보인다.
비참했다.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 중 하나인 너를 지금 만난 것이 억울했다.단호하게 변한 표정으로 저를 쳐낸 자신에게 더 바짝 다가오는 비비안 윈데이너.
‘뭐, 뭐야? 뺨이라도 때리겠다는 거야?’
그 기세에 움츠러들던 차, 부드러운 머리칼이 귓가를 쓸며 귓속말을 남겼다.
“영애,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비오첼라 저택의 셀리라는 하녀를 찾으세요.”
단숨에 멀어진 비비안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럼 부디 몸조심하세요, 영애.”
돌아서는 눈동자에 걱정이 묻어난다.
‘끝까지, 아주 끝까지! 잘난 척이구나.
돌아가면 셀리라는 하녀를 찾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나탈리가 이를 갈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낮임에도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뒷골목, 이런 곳에 발 들인 적 없던 그녀가 주춤대며 벽을 더듬었다.그 순간, 나탈리의 머리 위로 검은 천이 씌워졌다.
“악.”
비명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그녀가 그대로 괴한에게 들려 자리를 떴다.*
“오랜만이구나.”
언제 봐도 아름다운 온실이긴 한데.
온실 주인하고 만날 때면 긴장감에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예, 폐하.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그런가.
영애의 활약은 심심찮게 듣고 있다네.”
황후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당최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무섭다, 무서워.’
“저야말로 황태자 전하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놀라곤 하지요.”
황후도 알고 나도 알고 서로 알 거 다 알고 있지만, 이런 무의미한 대화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영애, 여기는 그대와 나 둘뿐이랍니다.”
나도 봤다.
곁에 있던 모든 시녀와 시종을 온실 밖으로 다 내보내는 것을.
그래서 더 무섭단 말이다, 오늘.
“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폐하.”
정말이다.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황후는.
‘그러고 보니 황태자가 엄마를 닮은 거였군.’
“나는 오늘 그대와 비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저는 아닌데요.
비밀 이야기라는 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누는 그런 것이었던가.
황후의 비밀 같은 건 알고 싶지 않다.
알아서 좋을 게 뭐 있겠냔 말이다.
‘그에 반해 나는, 정말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이 산더미군.’
디에고와의 비밀 연애, 황태자의 고백, 스텔라의 레사.대체 언제 이렇게 온통 거짓을 일삼아야 하는 삶으로 변모한 거지?
“어떤……?”
그러나 나는 웃었다.
둘이 남았다고 저분이 황후가 아닌 것도 아니고.
내가 일개 영애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내 친우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친우?’
“영애는 기억하지 못한 듯싶지만.”
황후가 제 앞의 레몬 케이크를 내게 밀었다.
“이건 윈데이너 후작 부인이 종종 만들던 케이크죠.”
그러고 보니 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레몬 케이크를 좋아했었다.
지금은 한 번도 먹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윈데이너 후작 부인 그리고 전 황후 폐하와 저는, 절친한 친우랍니다.”
과거가 아닌 말로 끝맺은 그녀의 표정에 못다 한 수 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전혀 몰랐어요.”
“그걸 기억하는 이들이 입을 다물었으니까요.”
찻잔을 부여잡은 황후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다들 슬픔에 겨워 그들이 남기고 간 소중한 것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라는 것은 변명일 뿐이지만.”
처음 보는 황후의 연약한 미소, 그녀는 지금 내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영애, 추억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요.
그편이 저도 기쁠 것 같군요.”
황후의 얼굴에 내가 아는 것이 보였다.
종종 거울 속 내 모습, 때때로 아버지의 얼굴에서 흔히 보이던 그리움.
“예.
다음에 세 분이 어찌 친해지셨는지 듣고 싶어요.”
처음으로 그녀의 앞에서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엄마의 친구.’
그리 생각하니 아주 찰나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한없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 덕이다.그렇게 도란도란 세 분의 우당탕탕 격변의 소녀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해가 지고 나서야 저택에 당도했다.
‘이야, 엄마는 알았는데 황후도 만만찮았고만.’
꽤 재밌었던 이야기를 되새기며 저택으로 들어가자 마리가 달려 나왔다.
“아가씨!”
“응? 무슨 일 있어?”
침을 꿀떡, 삼킨 마리가 내 귓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왔어요.
비오첼라 영애요.
지금 따로 응접실에 모셨어요.”
비오첼라 영애가 저택 밖으로 나섰다는 정보에 일부러 그녀와 마주친 것이 불과 이틀 전이다.
‘그때만 해도 나라면 치를 떠는 것 같았는데.’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스텔라와 상의 끝에 셀리라는 하녀를 끝까지 상주시킨 보람이 있다.
“아.”
응접실로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비오첼라 영애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나를 돌아본 그녀의 눈에 절망이 비쳤다.
“갈 곳이 없어서.”
비오첼라 영애의 담담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소파로 향했다.탁―앉자마자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무언가를 테이블로 던진다.
“이게 뭔가요?”
“비오첼라 백작가가 그간 약물과 노예를 거래한 장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는 그녀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이틀 전에도 이 비슷한 것을 고이 품에 안고 있던 게 기억났다.
‘그걸 다시 내게 가져온 건가?’
“하나만 약속해.”
그녀가 입술을 짓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녀린 몸에 넘쳐흐르는 분노가 갈피를 못 잡고 비오첼라 영애를 삼킬 것만 같았다.
“알렌 데이비드, 잡아줘.
다시는 귀족으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없게, 지옥까지 끌어내 주겠다고 나랑 약속해.”
“그에게 이걸 가져다주었나요?”
흠칫, 떨린 어깨와 흔들리는 동공으로 보아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 그게 내게 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맞아.
멍청했지.
다들 외면하는 데 도와준다길래.
그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말을 하면서도 저를 용서하기 힘든지 온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나, 하나가 더 있었어.
만일 하나가 발각되면, 찾았다고 생각하고 더는 들쑤시지 않을 테니까.
두 군데 숨겨두었거든.”
‘아, 그렇게 안 봤는데…….
백작, 이런 일에는 고민을 많이 했구나.’
말을 끝낸 비오첼라 영애의 불안한 시선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앞으로 영애는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뜻밖의 질문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달싹였다.
“…모르겠어.”
“백작가는 살아나지 못할 거예요.
제게 이것을 가져다주셨지만, 이걸 비오첼라를 살리는 데 이용하지는 않을 거니까.”
세차게 흔들리던 동공이 이내 체념한 듯 눈꺼풀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알고 있어.
이제 그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알렌, 그 자식만 어떻게 해줘.”
‘제대로 배신당했나 보다…….’
보통의 집념이 아니었다.
알렌 데이비드 후작을 향한 복수의 칼날이 벼려지다 못해 섬뜩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보다 아까부터 왜 반말이세요, 영애?”
“뭐……?”
우리가 서로 말 놓고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았니? 당장 삶이 끝났다는 듯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는 태도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영애의 마음, 잘 받았으니까.
뒤는 제게 맡기시고 그대는 신중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세요.”
“무슨 생각……?”
“그 정도는 스스로 생각하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그대가 오롯이 해내는 일도 있어야지요.”
이내 입술을 말아 문 비오첼라 영애의 눈에 열기가 되살아난다.
그것이 수치심인지, 억울함인지, 혹은 오기일지 난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그게 무엇이든 삶을 놓기보다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