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각하~ 디에고~ 잘 지내고 있나?”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발을 까딱이는 이 평화가 얼마 만인지.
“아가씨, 벌써 며칠째 저택 안에만 계시는 거예요.”
내가 저지른 흔적들을 치우며 마리가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우리 좋았잖아?’
얼추 벌여놓은 일들이 마무리되고 쓰러진 일을 교훈 삼아 저택에 박히자 이게 그렇게 좋더라.
원래 내가 이렇게 살았었지, 하며 행복을 곱씹는 일상.무엇보다 이 평화가 이루어지는 데 열 몫 한 것은 대공령으로 내려간 디에고 브라이트 덕이 크다.
“마리, 이런 게 행복인가?”
흐린 눈으로 나를 보는 네 표정이 불경하구나.
일없이 이리 지낼 때는 너무 지루했는데.
이래서 사람이 고통과 과로 뒤에 진정한 행복을 만끽하는 거라 했나.참 좋았다.
신경 쓸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생활이란 안락함 그 자체여서.
‘…그런데 갈수록 디에고 생각이 많이 나네.’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억해 둬야지.
재밌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말해줄지 생각해 놔야지.
그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
디에고가 있던 장면들.무엇보다 내 앞에서 웃던 얼굴과 내 몸에 닿던 너의 체온.끝없이 반복되어 내 일상을 채웠다.
“보고 싶다, 이거야.”
- 늦지 않게 돌아올게, 네 곁으로.떠날 때면 꼭 귓가에 잊히지 않는 목소리를 남겨두곤 했다.
“…네가 말한 그때가 언제일까.”
손에 걸쳐진 목걸이를 들어서 창가로 들이치는 빛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보라, 분홍 그리고 디에고의 색이 한데 어우러져 온통 빛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무겁다.”
툭―그대로 손을 내리고 멍하니 천장을 보던 시선이 피아노로 향했다.
내내 마음이 쓰이던 것을 이제야 조금 진지하게 마주해 본다.
“해볼까.”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선율이 네게서 흘러나온 순간, 수없이 떠올리던 그리운 그날로 돌아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엄마 곡이다, 라는 생각뿐이었는데.”
- 아가씨 곁을 정말 한시도 떠나지 않으셨어요.
잠도 안 주무시는 것 같았고.
나중에는 정말 각하가 지레 쓰러질 것 같았다니까요.기가 질린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하던 마리가 끝에 덧붙인 것이 가슴에 머물렀다.
- 아가씨가 눈을 뜨셨을 때 혼자가 아니었으면 한다고.그때, 들려온 피아노 소리에 저와 같은 그리움이 깃든 것을 알았다.
디에고도 같은 곡을 들으며 자랐을 줄이야.외롭고 쓸쓸할 때, 엄마가 유독 그리운 시절엔 이 곡에 집착했었다.
아는 건 나뿐이라 혼자 매일매일 연주하곤 했었지.그러다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더는 피아노 앞에 앉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추억 속에 머물던 것이 네 손에 의해 현실로 꺼내지던 날.
새로운 색을 입었다.
“…다음에는 내가 연주해 볼까.”
“아가씨!”
헐레벌떡 들어온 마리가 숨을 고르며 서신을 내밀었다.
“뭐야?”
“각하께, 후, 편지가 왔어요!”
뭐? 누구한테, 뭐가 와? 너무 놀라 오히려 뒤로 물러났던 몸을 바로 하며 서신을 받아들었다.[비비안, 좋아할 것 같아서 보내.
그대가 보고 싶어.]글은 짧았다.
그런데 좀처럼 내려놓을 수가 없다.
읽고 또 읽으면 그때마다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건 내 감정인가.’
“그리고 마차가 하나 도착했는데.”
“마차?”
어딘가 들뜬 듯 방싯방싯 웃은 마리가 얼른 함께 나가자며 재촉한다.
한 손에 서신을 꼭 쥐고 저택을 나서자 꽃을 한가득 두른 마차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마부석에서 내린 사내가 한껏 예를 갖춰 인사를 전해온다.
마부라기보단 기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브라이트 기사단의 필립이라고 합니다.”
역시! 시원스레 웃는 얼굴이 인상적인 그가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다.
브라이트 기사단이라면, 디에고였다.
“아, 네.
필립 경.
비비안 윈데이너예요.”
나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필립이 옆으로 물러나며 마차를 가리켰다.
“저희 주군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무래도 제 주군의 이런 모습이나, 그 상대인 내가 꽤 신기하겠지.
“아, 각하께서…….”
이 마차가 우리 저택으로 들어서는 것을 모두가 보았겠지.
비밀은 없다.
비밀의 대상이 그를 지키고자 할 마음이 하나도 없을 때는 더욱.놀랍고 기쁜 것도 잠시, 침잠하는 내 얼굴을 확인한 것인지 필립이 다급히 말을 꺼냈다.
“각하께서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하라 하셔서 새벽에 주변 확인 마치고 들어왔습니다.
게다가 검은 천으로 다 가리고 들어와서 이런 꽃마차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제 치밀한 방법이 자랑스러운지 가슴을 당당히 편 필립.
‘경…….
경도 정말… 주군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구나.’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감사해요, 경.”
내 의례적인 인사에도 퍽 감동한 것인지 필립의 얼굴에 감정이 들어찬다.
그런 그는 이제 내버려두고 꽃마차를 맞이할 차례다.
‘내 생애 꽃마차를 만나는 날이 올 줄이야, 허.’
달칵―예쁘장한 마차라 그런지 문 여는 소리마저 경쾌했다.문을 열자마자 가득 차는 꽃향기.
그리고 그 안에는 알록달록 리본을 맨 상자들이 가득했다.꽃에 둘러싸여 상자를 하나둘 열었다.[좋아할 것 같아서 보내.][맛있더군.][네게 어울릴 것 같았어.][비비안의 눈동자 색과 같길래.][그냥, 네가 유독 보고 싶은 날에.]초콜릿, 귀걸이, 보석 그리고 책까지.
정말 없는 게 없다.
선물마다 함께 있는 자그마한 쪽지는 물건을 살 때의 디에고가 담겨 있었다.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목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많은데…….
좋아하는 게 없을 리가 없지.”
어느새 차오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콧물을 빼기 시작했다.
“네 쪽지가! 그게! 제일 좋다고! 흐어엉.”
가지각색의 작고 큰 물건들.
그 순간순간 내 생각을 했다는 증표, 그게 더없이 마음에 와닿았다.
“저, 저기 아가씨, 괜찮으세요?”
“흐엉.”
마차 밖에서 슬며시 나를 들여다보던 마리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마, 마리, 이것 봐.
미쳤나 봐.”
“네?”
나는 한 아름 안고 있던 쪽지를 내보였다.
얼떨결에 받아든 마리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슬쩍 쪽지를 살폈다.그 손길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마리 또한 눈에 물기가 가득해졌다.
“아가씨! 각하는! 각하는 정말!”
훌쩍―흐르는 콧물을 빨아들이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야, 행복해…….”
그 말을 끝으로 목 놓아 울기를 한참.
몸에 수분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쯤 대성통곡을 끝마쳤다.추레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내린 나를 보던 필립이 한껏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데.
‘초면에 미안하다.
부디 디에고에게 이 모습은 전달하지 않기를 바라마.’
울다 지친 몸을 침대에 뉘고도 오랜 시간 쪽지를 어루만지는 하루가 이어졌다.
“…보고 싶다, 디에고.”
*대공령의 상점가를 시찰하러 나온 디에고가 걸음을 멈춘 채 유리창 너머의 물건을 뚫어져라 살폈다.
“각하, 뭘 그렇게 보십니까?”
“이거, 비비의 머리 색 같아서.”
끝내 보석상 안으로 들어선 디에고의 손에 분홍 보석이 쥐어져 있다.그가 손에 쥐고 한참을 들여다보던 보석에 힐긋 시선을 준 콘라드의 얼굴에 비웃음이 차올랐다.
“선물 마차는 이미 떠났는데요.”
“…….”
콘라드의 깐족임은 하나 신경 쓰지 않는 디에고가 끝내 분홍색의 보석을 구매했다.기실 영애의 머리 색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근래 제 상관의 눈이 닿는 곳곳이 비비안 윈데이너로 귀결된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이 정도면 병이다, 병.’
곧 굴러가는 돌에도 비비가 밟은 돌 같아, 라며 손에 쥘 것 같아 두려울 지경이다.
“마차 말인데, 비비안이 좋아할까.”
세상 심각한 고민을 하듯 미간을 좁힌 디에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콘라드가 한숨을 삼켰다.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그 무미건조한 답변에도 대번에 안색이 밝아진 디에고가 대공저로 향하는 말에 올라탔다.
“알렌 데이비드 그리고 나탈리 비오첼라, 잘 감시하고 있지?”
“예.
아직 둘의 관계를 확실시할 만한 걸 찾지는 못했지만.
없을 리가 없죠.
지금쯤 아마 이를 아는 자들 모두가 그것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비오첼라의 마지막 보루.
그걸 쥐는 자가 여럿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조만간 수도로 갈 준비를 하지.”
말의 속도를 올려 달려가는 디에고의 뒷모습을 보던 콘라드가 머릿속으로 날짜 계산에 들어갔다.
“한 달, 이 지났군.”
고개를 끄덕인 콘라드가 디에고의 뒤를 따라 달려간다.
그래도 제 상관의 성장이 못내 기쁜 그였다.그렇게 안도한 것도 잠시.그날부터였다.
수도로 가자 할 때 알아봤어야 했나.
그것이 신호였던 걸까.
“…각하.”
“왜 부르나.”
일만 했다.
집무실 유령이라도 되는 것인지.
언제, 어떤 시간에 집무실을 들러도 그가 있었다.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의 펜 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저은 디에고가 팔랑팔랑 서류를 넘긴다.
“한가하면 너도 일해, 콘라드.”
입술을 말아 문 콘라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는 이미 일할 만큼 하고 있었다.
제 상관이 괴물같이 하고 있어서 저가 처리하는 서류의 양이 초라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수도에 가시려고 이러십니까.”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펜이 잉크를 떨구며 멈춰 섰다.
“이제 꿈도 꿔.”
고해성사를 하듯 미간을 좁힌 괴로운 얼굴, 디에고가 펜을 놓고 마른세수를 했다.그대로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감은 눈 사이로 드러나는 비비안의 모습을 탐닉한다.
“어딘가 망가진 거 아닌가, 나.”
헛숨에 어깨를 들썩인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그런 디에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콘라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저기 나도는 사랑, 저도 해보고 남들이 하는 것도 수없이 봐왔는데.
‘저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단어가 작다고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제 상관을 옭아매고, 때때로 세상과의 경계를 없앤 듯 자유롭게도 만드는 저것을 정녕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이미 충분하십니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해도 되니 수도에 갈 채비하시지요.”
모르겠다.다만 삶의 의지가 하나도 없던 제 주군에게 살고자 하는 하나의 이유가 그것이라면, 그게 무어라 불리는 것인들 그게 중요하겠는가.
“…내가 아주 유능한 수하를 두었네.”
고개를 젖힌 채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린 디에고.
그의 눈동자가 지독한 열망과 순수한 갈망으로 뒤섞인 채 비비안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