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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51화 (51/109)
  • 51화

    *비오첼라 관련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황제의 부름에 입궁한 것까지는 좋다, 이거야.

    ‘…그냥 돌아갈까 했는데.’

    황제를 만나러 입궁할 때면 늘 황태자를 찾아갔지만, 오늘은 도저히 제가 먼저 그를 만나러 갈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망설이던 차 어떻게 안 것인지 황궁 복도까지 친히 찾아온 황태자가 산책을 권했다.

    “그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근래 몇 번이나 전해 듣는지 모르겠군.”

    한창 바쁠 터인데 호숫가까지 나오니까, 부담스럽다.물론 그래 봤자 황궁 내 호수라고 하지만 보통은 집무실 밖으로 발 내밀기도 힘든 사람인데.

    “별일 아니었어요.

    자고 일어나니까 이렇게 멀쩡한걸요?”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보는 황태자의 눈에 책망이 가득하다.

    “내게는 별일이니, 부디 몸을 생각해 주면 고맙겠군.”

    나도 그럴 참이다.

    쓰러진 것보다 쓰러진 이후 돌아오는 원망과 잔소리가 어마어마했다.

    전 같으면 있지도 않은 오라버니의 마음이려니, 하고 웃어넘겼을 텐데.눈동자를 굴리며 찻잔을 어루만지고 있자 리안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어색해할 필요 없는데.”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요.’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고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그럴 수 있는 거지? 고백을 내가 했나? 아님 역시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비비안, 오늘 날이 좋아서 호수가 꽤 아름다워.”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햇빛을 반사하는 호수가 보석의 반짝임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자잘한 빛 덩어리들이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별 무리가 춤추는 듯 보였다.

    “오, 진짜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근심 걱정이 조금 옅어지는 듯하다.

    “네게 부담을 주고 싶어서 고백한 것은 아니야.”

    잔잔한 호수처럼 리안의 목소리가 내 주변을 감쌌다.

    “한 번쯤 황태자가 아니라 리안 로렌스로서 네가 날 봐주기를 바랐어.”

    담담하게 말을 잇던 그가 이내 웃음소리를 흘린다.

    “물론 네가 날 오라버니로 보는 걸 바란 것도 아니지.”

    ‘…얘도 내 마음 보는 거야?’

    당황한 내가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그가 이제 아예 고개를 젖히고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그 표정도 소리도, 모두 너무 후련하고 청아하게 보여서 멍하니 감상하게 된다.여전히 웃음기가 만연한 얼굴로 리안의 눈동자가 나를 좇았다.

    ‘오늘도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과묵한 줄 알았던 황태자만 말하다 돌아가게 되는 것일까.’

    “궁금한 거 없어?”

    “네? 궁금한 거요?”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의 얼굴에 장난기가 엿보이는 것은 내 착각이겠지.

    “응.

    어디가 좋은지라든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

    “혹은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지 같은 거.”

    황가, 무슨 일이니.

    거기 무슨 피가 흐르는 거지? 어째서 안 그러던 얘까지 이렇게 변하는 건가.

    ‘이성 관련해선 다 이렇게 능글맞고 여유로워지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중 뭐 하나 감히 듣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눈물이 날 것 같은 얼굴을 애써 지워보려 하는데, 황태자의 손가락이 내 미간에 닿는다.

    “그렇게 괴로워하면 곤란해.

    비비안은 그다지 궁금한 것 같지 않으니 내 마음대로 말해보도록 하지.”

    “나는 꽤 오랫동안 혼자 간직한 이야기라서 말이야.”

    라고 가벼운 어조로 무거운 진심을 툭툭 내뱉는 리안 덕에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정신을 못 차리겠다.

    “정확히 언제부터 널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군.

    어느 날 새삼 알게 됐지.

    나는 이 앨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알 것만 같아서.

    “좋아하는 점은, 음.

    착하고 예뻐서?”

    ‘응?’

    지금 뭐라고, 너? 앞선 말에 가슴이 저리던 차, 한없이 발랄한 목소리로 그가 내뱉는 말에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니.

    뭐, 내가 무슨 장황하고 섬세한 이유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당황스러웠다.

    “아, 예.

    그러시구나.”

    그러셨구나.

    착하고 예뻐서 나를 좋아하시는구나.

    “응.

    내 곁에서 나를 봐주는 네가 너무 예쁘고 착해서.

    내 주변의 다른 이들은 나를 그렇게 봐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렸을 때는 정말 못 견디게 비비안이 좋았지.”

    지난 어린 날의 우리를 회상하는 듯 그의 눈이 애틋하고 따사롭게 빛났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전하.’

    누구든 조금만 황태자의 곁에서 그를 지켜봤다면, 리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여자든 남자든 노인이든 어린아이든.보려고 하지 않는 자들에겐 그저 한낱 도구나 방해물 취급을 받았을지 몰라도, 제대로 그를 본 사람 중에 리안을 싫어할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실제로 스텔라는 리안의 대단한 점을 알고 있는걸.’

    “전하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제 욕심에 가려진 눈으로 전하를 대하는 이들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내 간절한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아, 오해가 생겼군.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 않아.

    어릴 때 그랬단 거지.”

    더불어 안심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네가 이렇게 걱정 어린 눈으로 부딪혀 오는 건 기쁘지만.”

    호수로 시선을 돌린 그의 황금빛 머리칼을 바람이 흔든다.

    선선히 불어온 바람에 기분이 좋은지 은은한 미소가 리안에게 머물렀다.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미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저기, 전하.

    그러니까.”

    몇 번을 입을 달싹이다 어렵게 입을 뗀 나를 멀거니 바라보던 리안의 눈이 곱게 휘었다.

    “비비안, 생일이 얼마 안 남았어.

    기억하지? 내게 시간을 주겠다고 한 거.”

    - 생일 선물로 시간을 받아가고 싶은데.

    그때까지 답은 유보하도록 하지.그러겠노라 답한 적은 없지만.

    분명 그리 말하기는 했다, 황태자가.

    “실은 남은 시간 좀 더 알차게 쓰고 싶었는데.”

    미간을 좁힌 그가 못마땅한지 다문 입에 힘을 준다.

    “기껏해야 호숫가라니.

    이래서야 비비안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손에 이마를 기댄 채 심각한 표정을 지은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다분히 과장된 연기를 하는 듯 보이는 리안의 모습에 결국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내 풀어진 입매가 호선을 그리자 그가 따라 웃었다.*

    “계집은?”

    신경질이 가득한 얼굴로 알렌 데이비드가 복도를 걸었다.

    죄다 몸 사린다고 귀족들이 각자의 저택 안에 꽁꽁 들어앉은 탓에 손발이 묶인 건 비오첼라뿐만 아니라 데이비드도 마찬가지였다.

    “응접실에 와 있습니다.”

    비오첼라의 입을 틀어막은 채 하루빨리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저도 편해질 것 같았다.

    “오는 동안 별다른 일은 없고?”

    만에 하나 그와 비오첼라의 관계가 의심받을까 사방을 경계했다.

    그녀 또한 보호라는 명목하에 은밀하게 데려온 참이다.응접실 문 앞에서 고개를 좌우로 꺾은 알렌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그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서글한 눈매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사교계의 알렌 데이비드가 자리한 상태였다.벌컥 열린 문 안으로 이제 막 달려온 것처럼 허둥대는 그가 들어섰다.응접실 소파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비오첼라 영애가 그런 알렌 데이비드를 보고 울먹인다.

    ‘그래, 저렇게 날 위해 달려와 줄 이는 저 사람뿐이야.’

    “후, 후작님.”

    그녀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무릎을 꿇고 비오첼라 영애를 올려다보았다.

    “영애, 괜찮으세요?”

    걱정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에 끝내 비오첼라 영애의 눈물이 터졌다.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린 알렌의 눈꼬리가 한없이 아래로 처졌다.

    “이게 대체, 어쩌다가…….”

    차마 말을 이을 수조차 없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비오첼라 영애가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모, 모르겠어요.

    뭔가,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처음엔 하룻밤 지나면 오해가 풀리고 제 아비가 저택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초조한 마음이 들었으나 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불과 며칠 전 간신히 저택을 둘러싼 황실 기사단이 돌아갔으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그렇게 제 저택을 드나들던 수많은 귀족 가문들에게 도움을 청해보려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디찬 냉대였다.

    “영애,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손을 잡은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저를 다독이는 것을 보자 온갖 서러움이 밀려왔다.

    “후, 후작님밖에 없어요.”

    정말이었다.

    시궁창에 박혀 사방이 막힌 제 인생의 한 줄기 빛.

    그런 저에게 손을 내밀어준 유일한 사람.

    ‘나를 좋아하는 거였어.’

    이전에는 이렇게 살갑지 않아 후작도 저처럼 그저 가벼운 마음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제 본심을 드러내는 진중한 사람이었던 거야.’

    어느새 제 깃털 같은 마음조차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탈바꿈시킨 그녀가 후작의 품에 몸을 내맡긴다.제 품에 안겨오는 여인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린 그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등을 토닥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한참 통곡하던 비오첼라 영애의 들썩임이 잦아들자 그녀를 떼어낸 그가 진정 묻고 싶은 것을 입에 담는다.

    “제가 어찌 도와드려야 할지.”

    눈물 젖은 눈가를 손으로 쓸어주며 짐짓 안타깝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알렌이 말을 이었다.

    “혹여 백작님이 남기신 말은 없으신가요.”

    그 다정한 손길에 온 마음을 빼앗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있었다.

    제 아비가 답지 않게 진지하게 말을 전하던 날의 분위기를 똑똑히 기억했다.

    - 나탈리.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가문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사건이 일거든.

    네 침대 아래를 확인하거라.

    그리고 그것을 쥐고 있어.아무에게도 넘겨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후작은 이미 제게 아무나가 아니었다.

    “나, 남기신 것이 있어요.

    기사들이 있어서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더듬더듬 바닥을 보며 말하는 나탈리를 내려다보는 알렌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걸렸다.

    ‘저것이 분명해.’

    두 손으로 나탈리의 얼굴을 감싸 든 그가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을 훑으며 미간을 좁혔다.

    “힘드시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영애가 정신을 붙드셔야 합니다.”

    너무나 따스한 손길과 애틋한 눈빛, 거기다 저리 강건한 말을 하는 이를 의지하지 않으면 제가 여기서 더 어떻게 버티겠는가.

    “아무래도 백작님께서 남기신 그것이 이 일을 해결할 실마리가 되지 싶은데.”

    말꼬리를 늘이는 알렌 덕에 애가 탄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으며 재촉한다.

    “그런데요.

    네?”

    “그건 영애께만 허락된 것이 아닐지.

    혼자 헤쳐 나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

    고개를 세차게 저은 나탈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후작님이 계시는걸요.”

    “하지만 저는.”

    신뢰 가득한 눈으로 애처로이 웃은 나탈리가 쐐기를 박는다.

    “후작님은 이미 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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